대학생 ㄱ씨는 120만원짜리 ‘신상’ 노트북이 무척 갖고 싶다. 한 달 용돈은 30만원. 그중 10만원을 따로 빼놓고, 단기 아르바이트로 20만원을 보태 매달 30만원씩 모으기로 결심했다. 이변이 없는 한 4개월 후면 노트북은 그의 손안에 들어올 것이다. 친구 ㄴ씨는 이런 ㄱ씨가 너무 이상하고 답답하게 여겨진다. “너 바보 아냐? 일단 노트북을 무이자 할부로 사서 쓰면서 나중에 돈을 갚아 나가면 되잖아?”

결과적으로 ㄱ씨는 8개월 후에나 노트북을 살 수 있었다. 무엇보다 용돈 소비 10만원을 아끼기가 쉽지 않았다. 아르바이트도 생각보다 안정적이지 못했다. 편의점 오전 아르바이트를 구했다가 너무 피곤해서 빵집 주말 아르바이트로 바꿨는데 자꾸 예기치 않은 일정이 생겨 이마저도 꾸준히 하기가 어려웠다. 시간제 학원 강사를 알아봐도 상황에 맞춰 일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나이 지긋하신 부모님께서 어렵사리 번 돈으로 주시는 용돈도 황송한데 노트북 사겠다고 돈을 더 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120만원을 겨우 모아서 노트북을 사러 갔다. 그런데 ㄱ씨가 점찍어둔 모델은 89만원에 특가세일을 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더 예쁘고 더 슬림한 신상 노트북들이 놓여 있었다. 최신 노트북 가격은 128만원. 그는 비상금까지 탈탈 털어서 예상보다 더 높은 사양의 노트북을 기분 좋게 구매했다.

친구의 제안대로 먼저 노트북을 할부로 구매하고 나중에 돈을 벌어 갚기로 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추가 소득 창출이 어려울 땐 곧바로 부채에 시달리는 처지가 되었을 것이다. 카드 결제 대금을 한 달이라도 연체하면 연체 이자는 물론 신용등급 하락의 위기에 놓이게 된다. 할부를 다 갚기도 전에 구식이 된 자신의 노트북은 가격이 뚝 떨어지고, 다른 신상 노트북이 128만원으로 나온 것을 보면 또 기분이 어땠을까?

‘선구매 후결제’ 시스템은 생각보다 소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치와 만족을 많이 갉아먹는다. 돈을 가지고 있으면 노트북뿐 아니라 그 어떤 물건도 살 수 있는 ‘무한 교환 가능성’을 쥐고 있는 셈이다. 그 돈을 수많은 물건 가운데 ‘노트북’을 사는 데 쓰기로 결정하는 순간 다른 소비 가능성이 사라지기 때문에, 사람들은 돈을 쓰는 대신 물건을 갖게 되면서도 왠지 돈이 그냥 없어지는 것 같은 아까움을 떨치지 못한다. 이것은 경제적으로 지극히 당연하다. 돈의 가치는 ‘무한 교환 가능성’으로 인해 항상 물건의 가치보다 높기 마련이니까.

신중한 소비, 상처받지 않는 길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기꺼이 돈을 써서 물건을 사는 것일까? 그 물건의 필요나 가치가 내가 현재 가진 돈의 가치보다 높다고 생각하면 기꺼이 그 물건과 내 피 같은 돈을 교환하는 것이다. 좋아하는 무언가를 보는 순간 ‘지름신’이 발동하는 것 또한 인간의 습성이다. 소비의 순간 절대로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다. 일단 매혹되면 어떻게든 그것을 얻을 방법을 강구하게 된다.

그런데 만약 돈을 쓰고도 만족을 얻지 못한다면? 돈은 돈대로 없어졌는데 만족도 얻지 못했을 때 우리는 ‘후회’라는 감정을 느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이 소비 활동을 할 때 얻는 가장 큰 손실은 바로 이 후회다. 돈을 썼으면 그 이상의 가치나 만족을 얻어야 하며, 그러지 못할 것 같으면 아예 돈이라도 내 수중에 남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소비할 때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단순히 신중한 소비가 미덕이어서라기보다, 영혼에 상처를 입히는 ‘후회’라는 감정을 최소화하기 위한 최선의 방어책이다. 그렇기에 즉각적인 소비 결정을 종용하는 신용카드보다는 현금이나 저축으로 소비하는 습관을 통해 스스로 ‘생각할 시간’을 버는 것이 후회를 줄이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 참고 서적: 강신주 〈상처받지 않을 권리〉

기자명 박미정 ((사)여성이만드는일과미래 생활경제상담센터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