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를 찾아왔다. 오타가 아니다. 그날 저녁 나를 찾아온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나였기 때문이다. 누구냐고 물었다. 일종의 악마라고 했다. 나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 악마가 나에게 제안을 한다. “세상에서 한 가지를 없애는 대신 넌 하루를 더 살 수 있어. 어때?”

평소 같으면 거절했을지 모른다. “매일 아침을 맞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 어제였다면 굳이 수락할 이유가 없다. 아직 새파란 청춘인데. 고작 하루 더 살게 해준다는데. 귀찮게 그딴 건 뭐하러? 이렇게 생각했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오늘 병원에 다녀왔고 뇌종양 판정을 받았으며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하루가 어디냐. 당장 내일 아침을 맞지 못할 수도 있는데. 그래서 나는 나의 제안을 수락한다. 제일 먼저 전화를 없애겠다는 악마에게 순순히 동의해준다.

마지막으로 허락된 단 한 번의 통화를 그녀와 했다. 헤어진 여자친구. 대학 시절 잘못 걸려온 전화 덕분에 우연히 대화를 시작했고, 그렇게 연인으로 발전한 뒤에도 밤마다 전화기를 붙들고 밤새워 수다 떨던 상대. 오랜만에 다시 만나 옛 추억을 나누고 헤어지기 전, 그녀가 말한다. “전화는 없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전화가 없었다면 우리도 못 만났을 거야.”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세상에서 전화가 사라지면 전화에 얽힌 추억, 전화가 이어준 관계도 함께 사라지고 만다는 걸. “뭔가를 얻으려면 뭔가를 잃어야 한다”라던 악마의 말을, 그 뭔가를 잃어버린 다음에야 이해했다. 이제 세상에 전화는 없다. 이제 그녀의 기억 속에 내가 없다. 다시 찾아온 악마가 말한다. “다음엔 영화를 없애는 거야. 어때?”

소설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을 먼저 읽었다. 그다음 영화를 보았다. 책은 책 나름의 재미가, 영화는 영화 나름의 미덕이 있다. 세상에서 전화가, 영화가, 시계가, 그리고 고양이가 사라져도 정말 괜찮은 건지, 주인공과 함께 고민하는 재미였다. 그 모든 걸 포기하고서라도 악착같이 연장하고 싶은 삶인지,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기회였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무엇이 인간을 비로소 인간이게 하는가. 나의 내일이 사라지는 한이 있더라도 차마 사라지게 놔둘 수 없는 오늘의 그 무엇이 나에겐 있는가. 책장을 덮은 뒤에도, 영화가 끝난 뒤에도 좀처럼 생각이 멈추질 않는다.

부재가 증명하는 존재의 가치

원작자 가와무라 겐키는 원래 영화 프로듀서다. 〈고백〉 〈악인〉 〈늑대아이〉처럼 내가 특별히 아끼고 좋아하는 일본 영화를 제작한 사람이다. 몇 해 전 휴대전화를 잃어버린 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단다. “무언가를 잃고서야 그 소중함을 알게 되는구나.” 그렇게 쓰기 시작한 생애 첫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마침내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몇 해 전 역시 휴대전화를 잃어버린 나는, 얼른 새 모델을 구입할 궁리만 했더랬다. 세상에 다 나 같은 사람만 있는 게 아니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바람이 차다. 낙엽이 진다. 10월이 가고 11월이 왔다.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닌 달.” 북미 대륙의 원주민 아라파호족이 11월을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고 들었다.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닌 달’에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을 본다는 건, 제법 쓸모 있는 행위가 될 것이다. 덕분에 내 삶에서 사라지면 안 되는 어떤 것들의 목록을 잠시나마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부재가 증명하는 존재의 가치, 그 역설의 스토리텔링에 나처럼 호감을 갖는다면, 아마 나와 같은 생각으로 영화관을 나서게 될 것이다. ‘그래, 아무래도 세상에서 영화가 사라지는 건 안 되겠어.’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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