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억원의 빚을 지고 있는 자영업자가 매월 300만원을 벌어서 모두 지출한다. 어느 날 ‘앞으로 매월 200만원만 벌 텐데 지출은 400만원까지 늘리겠다. 그래도 빚은 2년 만에 모두 청산할 것’이라고 큰소리를 친다. 이웃들은 그를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부른다.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부동산 억만장자인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미국에서.

트럼프는 당선 확정 직후 승리 연설에서 “고속도로, 다리, 공항, 학교 등을 새로 만들어 인프라를 재건하고…경제 성장률을 배가하겠다”라고 말했다. 그가 인프라 투자에 약속한 정부지출 규모는 첫 임기 4년 동안에만 5000억 달러(연임하면 1조 달러)다. 이렇게 정부지출을 확대하려면 세금을 많이 걷어 정부 수입도 늘려야 한다. 그러나 트럼프의 가장 중요한 공약은 감세다. 모든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개인소득세를 대폭 인하하는 한편 부동산세와 소득세도 사실상 폐지하기로 했다. 기업으로부터 받는 세금인 법인세율도 35%에서 무려 15%로 내린다. 개인이나 기업뿐 아니라 정부 역시 수입(세수)을 줄이고 지출을 늘리면 빚이 증가할 수밖에 없다. 트럼프는 연임하는 경우 8년 동안 연방정부의 빚 20조 달러를 모두 청산하겠다고 약속했다. 마술을 부리겠다는 것이다.
 

ⓒ연합뉴스11월9일 KEB하나은행 본점 직원이 미국 대선 개표 현황 생방송을 지켜보고 있다.

트럼프가 앞뒤 맞지 않는 공약들을 지키려고 엉뚱한 정책을 추진하다 보면 사상 유례없는 글로벌 경제위기로 이어져, 무역의존도가 강한 한국 같은 나라들이 최대 피해자로 전락할 수 있다. 그 경로는 다음과 같다.

버는 것(정부로서는 세수)보다 많이 쓰는데 빚까지 청산하는 마술의 트릭은 이미 트럼프의 입을 통해 밝혀져 있다. 채권자를 협박해서 빚을 줄이는 것이다. 고상한 용어로는 ‘상환조건 재협상’이라고 한다. 그동안 미국 정부는 국내외의 중앙은행, 투자기관 등에 20조 달러를 빚진 상태다. 한국도 미국 정부의 주요 채권자 가운데 하나다(채권 규모 기준으로 세계 5~6위). 예컨대 미국이 내년 6월에 한국은행에 1억 달러(원금과 이자 합쳐서)를 갚도록 계약되어 있다고 치자. 트럼프의 이야기는, 1억 달러가 아니라 7000만 달러 정도만 갚도록 한국 정부와 협상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개인이나 일반 기업이 부도 위기에 처했을 때 은행과 협상해서 원리금을 깎는 경우는 있다. 그 금액이 지나치게 크지 않다면, 해당 채무자의 신용이 하락할뿐 사회적 여파는 무시해도 된다. 트럼프도 사업가 출신인 만큼 종종 겪은 일일 터이다.

그러나 국가, 특히 글로벌 패권국인 미국의 경우는 다르다. 미국의 신용도와 통화(달러)는 다른 모든 나라들의 신용도 및 통화의 주춧돌이다. 좀 무리한 비유이지만, 각국의 통화를 중요도에 따라 무게로 나타낸다고 할 때, 한국 원화가 1㎏이라면 일본 엔화는 8㎏, 유럽연합 유로화는 10㎏쯤 될 것이다. 미국 달러는 몇 ㎏일까? 20㎏이나 100㎏? 그렇지 않다. 달러는 지금까지의 비유에서 각국 통화의 중요도를 나타내는 단위인 ‘㎏’ 그 자체다. 미국이 ‘돈을 제대로 갚지 않는 나라’로 전락하면, 달러의 신용만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나라의 통화도 믿을 수 없게 된다. 이에 따라 국제 거래 질서가 무서운 혼돈 속으로 빠져들 수 있다. 육류의 무게를 나타내는 ㎏이나 부동산의 넓이를 측정하는 제곱미터(㎡) 같은 단위가 흔들리면 해당 시장이 어떻게 될까? ‘경제적 대량살상’, 즉 누구도 쇠고기나 주택을 매입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진다. 트럼프는 당장 내년 1월20일부터 달러를 ‘경제적 대량살상무기’로 바꿀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다행히 트럼프는 ‘상환조건 재협상론’을 지난가을부터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 공약을 지키라는 압박이 쏟아지면, 트럼프가 다시 부동산 비즈니스맨의 마인드로 국가부채 문제를 해결하려 할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트럼프가 공약을 지킬 수 있는 길은 딱 하나밖에 없다. 감세에 따라 개인과 기업의 노동 및 투자 의욕이 엄청나게 증대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경제성장이 촉진되면 세수도 커질 것이다. 법인세의 경우, 연간 1억 달러의 수익을 올리는 기업(현재 법인세율 35%에서 세금은 3500만 달러)이 연수익 5억 달러 기업으로 성장한다면 법인세를 15%로 낮춰도 세수가 7500만 달러로 증가한다. 〈워싱턴 포스트〉에 따르면, 미국이 8년 동안 20조 달러의 국가부채를 청산하려면, 연 2~3%인 지금의 경제성장률을 연 24~25%로 높여야 한다. 엄청나게 황당한 시나리오다.

트럼프 공약은 한국 경제에 큰 위협

트럼프가 보유하게 될 또 하나의 경제적 대량살상무기는 강력한 보호무역 정책이다. 트럼프에 따르면, 중국 등에서 저임금 노동으로 생산한 값싼 수입품들이 미국 산업을 망쳤다. 애플 같은 미국 기업들마저 중국의 공장에서 만든 제품을 다시 미국으로 수출한다. 당연히 미국 내의 일자리는 줄어든다. 신기할 정도로 단순명료한 대안이 있다. 미국의 관세를 대폭 올려 수입품들의 판로를 막아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해외로 나간 기업들도 미국으로 돌아올지 모른다. 그래서 트럼프는 포드가 현지 진출한 멕시코 자동차에 35%, ‘환율까지 조작하는’ 중국의 모든 상품에는 45%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공약했다. 또한 “미국 일자리 10만 개를 빼앗아간” 한·미 FTA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등을 재협상하고, 오바마 행정부의 숙원 사업이며 현재 의회 비준만 기다리고 있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은 폐기하겠다는 것이다.

트럼프가 실제로 이런 모험을 단행한다면, 무역의존도가 세계 최고 수준인 한국 경제로서는 국운을 바꿀 만한 위기다. ‘환율조작국’으로 지목되어 징벌적 관세를 부과당하거나 예기치 않은 무역장벽에 부딪히게 될지도 모른다. 11월9일 나온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코트라) 자료에 따르면, 당장 자동차 부품, 섬유·의류, 철강 등의 부문이 ‘트럼프식 보호무역주의’의 1차 희생자로 떨어질 공산이 크다. 한·미 FTA를 재협상한다면 의료·법률·금융 등 서비스 부문의 추가 개방을 요구받게 될 것이다. 중국에 45%의 관세가 부과되는 경우, 한국은 중국에 버금가는 피해를 볼 수 있다. 중국을 통해 미국으로 수출하는 상품의 비중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트럼프로부터 초고율 관세를 부과당하는 중국이나 멕시코가 가만히 있을 이유도 없다. 미국 상품에 대해 보복관세를 부과할 것이다. 이런 무역전쟁의 틈바구니에서 글로벌 경제 전체가 지금보다 한 단계 더 깊은 침체로 빨려들어갈 수도 있다. 이는 모두 글로벌 패권국인 미국을 무역흑자국으로 만들려는 트럼프의 야심 때문이다.

글로벌 패권국은 무역적자를 기록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만큼의 통화(달러)를 세계에 공급해 기축통화로 만들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한국·중국 등 수출국들은 열심히 일해서 만든 상품을 미국에 값싸게 파는 대신 무역흑자와 함께 일자리를 창출한다. 이를 통해 벌어들인 달러를 ‘국가 자산’으로 착실히 보관하면서 미국 중심의 국제경제 시스템 유지에 봉사한다. 대신 미국은 달러의 가치를 일정하게 유지해줄 도의적 책임을 지닌다. 한편 미국 시민들은 저렴한 수입 상품을 생활필수품으로 소비할 수 있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패권국으로서의 지위를 보장받는다. 미국과 다른 국가들 각자가 일정한 이익을 누리는 시스템이다. 미국 중심의 글로벌 질서가 유지되어온 가장 큰 이유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역대 지도자들이 암묵적으로나마 무역적자를 패권적 지위 유지에 필요한 현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등장한 트럼프는 사실상 미국의 패권국 지위를 유지하면서 주변국들이 누려온 이익은 깡그리 가로채겠다고 한다. 그가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지도자이길 바란다. 공약을 지키면 미국은 물론 전 세계의 파멸로 이어질 수 있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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