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야 파키스탄으로 가기 위해서는 비자를 받아야 하지만, 2001년 이전에는 비자가 필요 없었다. 인도 펀자브 주에 있는 황금사원의 도시 암리차르를 거쳐 국경지대인 와가에서 도보로 넘어가면 곧 파키스탄이었다. 털털거리는 합승 지프를 타고 와가로 가면서 고민은 딱 하나였다. 이번엔 또 무슨 말로 출입국관리소 직원을 기쁘게 해서 손쉽게 국경을 넘어갈 수 있을까. 무슨 말이냐고? 뇌물을 주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입을 잘 놀리는 게 중요하다.

먼저 인도 영토에서 출국 절차를 밟아야 한다. 인도 측 출국 담당자가 딴죽을 건다. “너 어쩌려고 무식한 무슬림들이 우글거리는 파키스탄으로 가니? 그러지 말고 잘 생각해봐.” 나는 이렇게 답한다. “그러게 말이야. 사실 난 파키스탄엔 관심 없어. 오랑캐 땅은 빨리 지나가야지. 난 그저 중국 국경을 넘어가기 위해서야.” 순간 출국 담당자의 눈빛이 달라진다. “아 그렇구나. 행운을 빌어. 파키스탄은 무지막지한 곳이야.”

이제 파키스탄 측 입국 심사대다. 입국 담당자가 묻는다. “코리안, 정말 인도에서 왔다고? 와, 인도인들이 널 얼마나 괴롭혔니?” 나도 정색하며 답한다. “말도 마라. 인도 사람들은 입만 열면 거짓말이야. 세상에, 그 나라에서는 파키스탄으로 가라는 말이 욕이야. 나한테도 파키스탄으로 꺼지라기에, ‘생큐 베리 머치’ 하고 지금 여기 와 있는 거야. 인도는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아.” 순간 생기가 도는 파키스탄 입국 담당자의 눈빛. “그런 예의 없는 힌두 놈들을 봤나. 친구! 걱정 마. 파키스탄에는 그런 사람이 없어. 여기는 순수한 자들의 땅이거든.”

ⓒEPA인도와 파키스탄 국경의 양국 국기 하강식.

놀랍게도 이곳에선 국경을 넘을 때마다 출입국관리소 직원들이 ‘적성국’에 대해 험담 한두 마디쯤 해주길 원한다. 험담을 좀 하면 바로 도장을 찍어주지만, 안 하면 그동안 자기 나라에서 뭘 했는지, 건너편 나라에서 뭘 할 건지 꼬치꼬치 캐묻기도 한다. 국경에 홀로 선 연약한 외국인 여행자에게는 선택지가 없다.

인도에서 가장 중요한 격언 가운데 ‘그가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하라’는 말이 있다. 비루하지만 꽤 요긴한 여행 노하우다. 예컨대 이란 사람 대다수는 영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 없지만, 누구나 이런 말은 한다. “이란 굿?” “호메이니 굿?” “하메네이 굿?” 끝을 올려 억지로 의문문을 만든 ‘답정너’ 질문이다. 늘 “굿굿굿!” 하고 답하는데, 한번 장난삼아 “노”라고 했다가 여러 명 표정이 얼어붙는 걸 봤다.

나는 한국에서 꽤 까칠한 편이지만, 여행지에서는 달라진다. 내 안전을 위해서나, 여행국 주민과 온화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도 중요하다. 공항에서 잠시 스친 북한 사람에게 꼭 공화국이라는 단어를 붙인다거나, 평소 티베트 독립을 지지하면서도 중국인에게는 티베트라는 명칭은 일절 쓰지 않는다. 중국인들은 ‘시짱’이라고 말해주기를 원한다.

아시아에서는 ‘그 나라 사람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하라’

아시아를 여행하다 유럽 등 이른바 1세계로 가면 사람들 태도가 확 바뀐다. 외국인이 자기 나라를 어찌 생각하는지 아예 관심이 없다. 외국인인 내 머릿속을 그리 궁금해하지 않는다는 점은, 아시아만 다니던 내게는 꽤나 놀라웠다. 당연히 여기서는 이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준비하지 않았다.

최근 인도인들이 출연하는 한 예능 프로그램을 ‘정주행’했다. 출연진이 친구들에게 동해와 일본해 표기 문제를 공부시키고 있었다. 인도인 출연자는 친구에게 동해라고 불러야 한다고 교정시켰고, 또 다른 외국인 패널은 국제적으로 일본해라 부르게 된 역사적 연유를 한국인의 시각으로 설명했다. 이 장면을 보고 문득 인도와 파키스탄 국경을 넘을 때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라’는 인도에서만 유통되는 격언이 아닌 모양이다.

기자명 환타 (여행작가·<환타지 없는 여행> 저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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