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답이 계속 이어졌다.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기 전에는?” “모르겠습니다.” “그래, 너 어디로 갈 거니?” “학교 도서관에 가야 합니다.” “도서관에 갔다가는?” “예? 집에 갈 것입니다.” 또다시 선문답이 이어졌고, 최석호는 결국 “죽습니다”라고 답했다. “죽은 뒤에는?” “모르겠습니다.” 도문 스님은 죽비를 내려치듯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야단쳤다. “야 이놈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놈이 바쁘긴 왜 바빠?”
그 스승에 그 제자. 깨달음의 죽비를 맞은 최석호는 출가했다. 도문 스님에게 사미계를 받고 법륜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법륜 스님은 수행 공동체 정토원(1988년), 국제기아·문맹퇴치 민간기구 JTS(1994년), 환경운동 단체인 에코붓다(1994년), 국제 평화·인권·난민지원 센터 좋은벗들(1999년), 평화·통일 정책을 연구하는 평화재단(2004년) 등을 설립해 이사장을 맡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삶의 상처를 치유하고 깨달음을 주는 ‘즉문즉설’ 법문으로 유명하다. 그의 입을 통하면 어렵기만 한 불교 경전도, 풀릴 것 같지 않던 부부·동료 관계 같은 고민거리도, 알기 쉽게 속시원하게 풀린다. 눈높이 법문인 셈이다. 지난해 펴낸 〈스님의 주례사〉는 스테디셀러 반열에 올라섰다. 〈행복한 출근길〉 〈답답하면 물어라〉 〈스님, 마음이 불편해요〉 〈행복하기 행복 전하기〉 등 즉문즉설집은 꾸준히 인기를 끌고 있다. 좌와 우, 가족과 민족, 통일과 환경을 넘나드는 법륜 스님을 부처님오신날을 일주일 앞둔 5월3일 평화재단 사무실에서 만났다.
1년에 몇 번 정도 강연하나? 해외에도 자주 나가던데?
국내에서는 150번 정도 강연을 다닌다. 1년 가운데 5개월 정도는 해외에 머물고. 1월에는 주로 인도, 2~3월에는 스리랑카·인도네시아·캄보디아 등 동남아에서 보내고, 8월에는 중국 역사 기행을 다닌다. 그러다가 9월에는 미국 전역에서 순회 법회를 한다(스님은 1993년 인도의 최하층민이 사는 둥게스와리에 학교와 병원을 세웠다. 자국민들도 접촉을 꺼리는 하층민을 이방인이 보듬으면서 인도에서 화제가 되었다. 또 필리핀 민다나오 섬 29개 마을에 학교를 짓기도 했다. 캄보디아·인도네시아·스리랑카·네팔·몽골·라오스·베트남·미얀마 등 아시아 15개국으로 구호 사업을 확대할 계획이다. 2002년 라몬 막사이사이상을 받았다).
좋은벗들·JTS·평화재단 이사장 등 한반도 평화를 위한 활동도 한다. 시작한 계기는?
1993년도부터 청년·교사들과 고구려 유적 답사를 다녔다. 통일에 대한 민족 의식과 역사 의식을 키우기 위해 시작했는데, 1995년 가이드가 북한 식량 문제가 심각하다고 했다. 처음에는 안 믿었다. 뭘 얼마나 굶어죽겠냐 싶었다. 배를 타고 국경 지대를 돌아보면서 헐벗고 영양실조에 걸린 북한 아이들을 직접 보았다. 그때 모르는 것이 가장 먼 것임을 깨달았다. 인도까지 가서 다른 나라를 도우면서 실상을 모르니까 북한을 돕지 못한 것이었다.
최근 사회 참여 활동을 하는 연예인 김여진씨로 인해 JTS가 주목된다. 배종옥씨나 한지민씨 등도 JTS에서 활동하는데, 여성 연예인들에게 인기가 많은 것 같다(웃음). 우리가 보통 생각할 때 연예인들은 다 잘살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그들도 사람이라서 나름 고뇌가 있다. 그렇다고 고뇌를 공개적으로 털어놓지 못한다. 말 못하는 고뇌를 많이 안고 산다. 그런 고뇌는 평범해지는 사람으로 돌아갈 때 해결되고 그러면서 또 본인이 행복해진다. 평범해지면 자기 고뇌도 해결되고, 오히려 사람들이 더 좋아하더라. 그런 연예인들의 모임이 JTS 안에 있다.
취업난에 빠진 젊은이들에게 즉문즉설식 답을 준다면?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한국 사람이면) 베트남 사람이나 중국 사람보다 살기가 낫다. 베트남 사람들은 불법 입국해서 돈을 번다. 그런 측면에서 좌절·절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대한민국 국적 자체가 부자나 다름없다. 두 번째로, 빈곤은 상대적 빈곤이지 절대적 빈곤이 아니다. 젊은이들의 눈은 이른바 의사·변호사가 되거나 재벌 회사에 취직하거나 공무원이 되는 데 가 있다. 문제는 젊은이 10명 가운데 2명 정도만 이런 직업을 가진다는 점이다. 남은 8명은 어떻게 할 것이냐? 이들을 위한 사회적인 정책이 있어야 한다. 불평만 하지 말고, 또 스펙을 쌓아서 개인적으로 해결하려고만 하지 말고 국가 정책의 변화를 가져오도록 젊은이들이 나서야 한다. 개인적으로 자기만 살아남겠다는 태도는 젊은이로서는 좀 비겁하다. 젊은이들이 헌신해야 세상이 변한다. 도전적인 실험정신이 젊은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도전적인 실험정신은 스님의 삶에서도 읽힌다. 법륜 스님은 1969년 출가했지만, 학교는 계속 다녔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동국대 불교학과 이기영 박사로부터 불교대학 1·2학년 교재를 받아와 공부했다. 고등학교 3년 때는 불교대학 3·4학년 교재로 자습했다. 스승 도문 스님은 “넌 수재여서 동국대 불교대학에 수석으로 합격할 것이다. 동국대 교수로 활동하다가 총장을 거쳐 문교부(지금의 교육부) 장관이 되어 국민에게 이바지하라”고 권했다. 하지만 법륜은 스승의 뜻을 거절했다. “‘도문(스님) 대학’을 나왔으니 그만입니다. 세상 속으로 들어가 수행하겠습니다.” 엘리트 코스를 거부한 법륜은 그렇게 세상 속으로 스며들었다.
세상 속에 스며든 법륜 스님은 법사로 활동했다. 조계종의 종헌·종법상 6개월 행자 교육과 4년간 기본 교육을 받아야 승적을 받을 수 있다. 그는 그 시간을 세상 속에서 부대끼며 보냈다. 1991년, 보다 못한 도문 스님이 “절 밖에 있었으니, 절 안에서 활동하라”고 권했다. 법륜 스님은 “도에 안팎이 있습니까?”라고 답했다. 출가 때처럼 선문답이 이어졌다. “도에는 안팎이 없지.” “그런데 왜 안에서 활동하라고 하십니까?” 이번에도 큰스님은 버럭 고함을 쳤다. “야 이놈아, 네가 밖을 고집하니까 안이 생기지 않느냐.”
스승의 죽비는 그를 또 깨쳤다. 도에 안팎이 없다는 논리로 자기가 밖을 고집하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다시 머리를 깎고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고 수행자가 득도한 큰스님한테 깨달음을 인정받는 전법게를 받았다. 스승은 몇 달 머무르며 승적을 가지라고 했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그대로 두지 않았다. 승적보다는 굶주리는 사람들이 더 눈에 밟혔다. 그 길로 그는 인도로 떠났다. 그런 제자를 두고 도문 큰스님은 “전 세계 불교 포교의 기점을 형성하고 있으니,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다”라고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