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겨울. 고등학교 1학년 최석호는 경주 분황사에서 학기말 시험을 준비하다가 주지스님을 만났다. 도문 주지스님은 그의 비상함을 눈여겨 보아왔다. 몇 번 출가를 권유했다. 하지만 머리가 좋고 과학자가 꿈인 최석호는 출가를 망설였다. 도문 스님은 그런 최석호를 불러 세웠다. “너 어디서 왔어?” “학교에서 왔습니다.” “학교 오기 전에는 어디서 왔어?” “예. 집에서 왔습니다.”

선문답이 계속 이어졌다.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기 전에는?” “모르겠습니다.” “그래, 너 어디로 갈 거니?” “학교 도서관에 가야 합니다.” “도서관에 갔다가는?” “예? 집에 갈 것입니다.” 또다시 선문답이 이어졌고, 최석호는 결국 “죽습니다”라고 답했다. “죽은 뒤에는?” “모르겠습니다.” 도문 스님은 죽비를 내려치듯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야단쳤다. “야 이놈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놈이 바쁘긴 왜 바빠?”

그 스승에 그 제자. 깨달음의 죽비를 맞은 최석호는 출가했다. 도문 스님에게 사미계를 받고 법륜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법륜 스님은 수행 공동체 정토원(1988년), 국제기아·문맹퇴치 민간기구 JTS(1994년), 환경운동 단체인 에코붓다(1994년), 국제 평화·인권·난민지원 센터 좋은벗들(1999년), 평화·통일 정책을 연구하는 평화재단(2004년) 등을 설립해 이사장을 맡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삶의 상처를 치유하고 깨달음을 주는 ‘즉문즉설’ 법문으로 유명하다. 그의 입을 통하면 어렵기만 한 불교 경전도, 풀릴 것 같지 않던 부부·동료 관계 같은 고민거리도, 알기 쉽게 속시원하게 풀린다. 눈높이 법문인 셈이다. 지난해 펴낸 〈스님의 주례사〉는 스테디셀러 반열에 올라섰다. 〈행복한 출근길〉 〈답답하면 물어라〉 〈스님, 마음이 불편해요〉 〈행복하기 행복 전하기〉 등 즉문즉설집은 꾸준히 인기를 끌고 있다. 좌와 우, 가족과 민족, 통일과 환경을 넘나드는 법륜 스님을 부처님오신날을 일주일 앞둔 5월3일 평화재단 사무실에서 만났다.

ⓒ시사IN 윤무영법륜 스님은 즉문즉설을 하면서 다른 종교 교리도 많이 인용한다. 진리에 접근하면 되지, 기독교 언어냐 불교 언어냐는 중요하지 않다고 믿기 때문이다.
어제 오후에는 김해, 저녁에는 부산에서 강연이 있었다. 5월 한 달 동안 강연이 30회 잡혀 있다.

1년에 몇 번 정도 강연하나? 해외에도 자주 나가던데? 국내에서는 150번 정도 강연을 다닌다. 1년 가운데 5개월 정도는 해외에 머물고. 1월에는 주로 인도, 2~3월에는 스리랑카·인도네시아·캄보디아 등 동남아에서 보내고, 8월에는 중국 역사 기행을 다닌다. 그러다가 9월에는 미국 전역에서 순회 법회를 한다(스님은 1993년 인도의 최하층민이 사는 둥게스와리에 학교와 병원을 세웠다. 자국민들도 접촉을 꺼리는 하층민을 이방인이 보듬으면서 인도에서 화제가 되었다. 또 필리핀 민다나오 섬 29개 마을에 학교를 짓기도 했다. 캄보디아·인도네시아·스리랑카·네팔·몽골·라오스·베트남·미얀마 등 아시아 15개국으로 구호 사업을 확대할 계획이다. 2002년 라몬 막사이사이상을 받았다). 좋은벗들·JTS·평화재단 이사장 등 한반도 평화를 위한 활동도 한다. 시작한 계기는? 1993년도부터 청년·교사들과 고구려 유적 답사를 다녔다. 통일에 대한 민족 의식과 역사 의식을 키우기 위해 시작했는데, 1995년 가이드가 북한 식량 문제가 심각하다고 했다. 처음에는 안 믿었다. 뭘 얼마나 굶어죽겠냐 싶었다. 배를 타고 국경 지대를 돌아보면서 헐벗고 영양실조에 걸린 북한 아이들을 직접 보았다. 그때 모르는 것이 가장 먼 것임을 깨달았다. 인도까지 가서 다른 나라를 도우면서 실상을 모르니까 북한을 돕지 못한 것이었다.

ⓒ뉴시스JTS가 벌인 ‘기아·질병·문맹에 놓인 어린이 돕기 캠페인’에 참여한 연예인들.
올해 북한 식량난이 심하다고 언급했다. 스님이 파악한 상태는 어느 정도인가? 1995~1998년 ‘고난의 행군’ 시기에 식량난이 가장 심각했다. 국제사회 지원도 있고 남북관계도 개선되면서 극복했다. 2006년과 2007년에 연속 홍수 피해를 입은 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08년 한국의 지원이 끊기면서 ‘고난의 강행군’이 있었다. 지난해 홍수가 발생하면서 올해는 북한 주민들 입을 빌리면 ‘고난의 초강행군’이라고 한다. 1990년대만큼은 아니지만 2008년보다는 어려운 것 같다. 스님의 행보를 두고, 진보·보수 양쪽 모두 싸늘한 것 같다. ‘JTS’는 북한에 조건 없이 인도적 지원을 한다. ‘좋은벗들’은 북한 인권 상태를 국제사회에 알린다. 진보 쪽은 좋은벗들을 반북 단체로 보고, 보수 쪽은 JTS를 퍼주기 단체로 본다. 우리는 비판할 건 비판하고 지원할 건 하자는 것이다. 북쪽을 비난하거나 그렇다고 두둔할 이유도 없다. 다만 북한 주민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접근하려고 한다(스님의 북한 관련 정보는 정확하고 풍부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2009년 북한 신의주에서 신종플루가 발생한 것을 가장 먼저 전한 것도 정부가 아닌 ‘좋은벗들’이었다).
MB 정부의 대북 정책을 평가한다면? 한마디로 말하면 대북 정책은 있는데, 통일 정책은 없다. 우리가 도와주어서 얻어먹는데 어디서 큰소리치느냐, 버릇을 고쳐주어야 한다는 식이다. 도와주면 고맙다고 인사하든지, 도와달라고 사정하든지 하라는 식으로 이른바 ‘갑·을 관계’를 북한에 요구한다. 북쪽은 지금 굶어죽었으면 죽었지 구걸할 입장은 아니라고 한다. MB 정부가 내세운 ‘비핵 개방 3000’은 어떻게 비핵을 할 것인지가 아니라 핵을 가지지 않으면 지원해준다는 논리에 기반하고 있는데, 쉽게 말하면 ‘인천에 배만 들어오면 부자다’라는 것과 같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고 할 수는 없다. 북쪽 지도자라면 남쪽에 요청해서라도 주민을 먹여 살려야 하고, 남쪽 지도자라면 요청을 안 해도 지원해야 한다. 2000만 동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이들을 내 동포 우리 동포로 여기는 마음이 중요하다.
ⓒ뉴시스법륜 스님(가운데)이 2008년 6월에 열린 ‘미얀마 사이클론 희생자들을 위한 천도재’에 참석해 기도하고 있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태도는 즉문즉설과도 통하는 것 같다.
즉문즉설은 인생 상담과는 조금 다른데, 위로가 핵심이 아니고 깨우침이 핵심이다. 깨우침이 중요하니 말이 좀 강하다. 잘못 들으면 야단치는 것처럼 비칠 수도 있다. 즉문즉설은 생각을 바꿔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남편이 술을 마셔서 괴롭다고 하면 보통은 ‘아이고, 얼마나 힘드냐’고 위로하는데, 난 ‘남편이 술 먹는데 당신을 괴롭히려고 술을 마시느냐, 아니면 제가 마시고 싶어 마시느냐, 그런데 왜 당신이 괴로우냐’는 식으로 도전적으로 얘기한다.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살 수도 있지 않으냐는 깨우침을 주기 위해서이다. 술 먹는 남편을 두둔하자는 게 아니라, 질문자가 그 상태에서 자유롭고 행복해질 수 있게 깨우쳐주는 것이다. 즉문즉설을 하다보면, 직장·가정 문제 같은  개인 질문을 많이 받을 것 같다. 다양하다. 사회문제도 있고, 불교 교리나 생명·자연과학 등 다채롭다. 일반적인 강연은 강사가 준비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 즉문즉설은 청중과 함께 만들어가는 깨달음의 과정이다(통일운동을 하는 법륜 스님과 즉문즉설을 하는 법륜 스님을 동명이인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많다.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를 융화시키는 스님의 활동은 스승들로부터 받은 영향이 크다. 법륜 스님의 스승은 조계종 원로회의 원로의원이자 대종사인 도문 스님. 도문 스님의 큰 스승은 용성 스님이다. 용성 스님은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불교계 대표였다. 용성 스님은 ‘불교의 지성화·대중화·생활화’라는 유훈을 남겼다. 법륜 스님의 ‘바른 불교·쉬운 불교·생활 불교’ 운동도 그 연장이다). 스님의 즉문즉설을 들어보면 다른 종교 교리를 가지고도 답변을 한다. 법회하면서 요즘은 성경도 많이 인용한다. 기독교 신자나 천주교 신자를 위해 성경을 인용하면 바로 이해한다. 기독교 신자가 종교를 불교로 바꾼다고 고통이 해결되는 게 아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궁극적으로 다가가면 해결된다. 진리에 접근하면 되지, 기독교 언어를 쓰느냐 불교 언어를 쓰느냐는 중요한 게 아니다. 일본 사람이 날 좋아한다고 국적을 한국으로 바꾸라고 하지는 않는다. 천주교든 기독교든 종교를 선택하는 것은 자유이다.

최근 사회 참여 활동을 하는 연예인 김여진씨로 인해 JTS가 주목된다. 배종옥씨나 한지민씨 등도 JTS에서 활동하는데, 여성 연예인들에게 인기가 많은 것 같다(웃음). 우리가 보통 생각할 때 연예인들은 다 잘살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그들도 사람이라서 나름 고뇌가 있다. 그렇다고 고뇌를 공개적으로 털어놓지 못한다. 말 못하는 고뇌를 많이 안고 산다. 그런 고뇌는 평범해지는 사람으로 돌아갈 때 해결되고 그러면서 또 본인이 행복해진다. 평범해지면 자기 고뇌도 해결되고, 오히려 사람들이 더 좋아하더라. 그런 연예인들의 모임이 JTS 안에 있다.

취업난에 빠진 젊은이들에게 즉문즉설식 답을 준다면?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한국 사람이면) 베트남 사람이나 중국 사람보다 살기가 낫다. 베트남 사람들은 불법 입국해서 돈을 번다. 그런 측면에서 좌절·절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대한민국 국적 자체가 부자나 다름없다. 두 번째로, 빈곤은 상대적 빈곤이지 절대적 빈곤이 아니다. 젊은이들의 눈은 이른바 의사·변호사가 되거나 재벌 회사에 취직하거나 공무원이 되는 데 가 있다. 문제는 젊은이 10명 가운데 2명 정도만 이런 직업을 가진다는 점이다. 남은 8명은 어떻게 할 것이냐? 이들을 위한 사회적인 정책이 있어야 한다. 불평만 하지 말고, 또 스펙을 쌓아서 개인적으로 해결하려고만 하지 말고 국가 정책의 변화를 가져오도록 젊은이들이 나서야 한다. 개인적으로 자기만 살아남겠다는 태도는 젊은이로서는 좀 비겁하다. 젊은이들이 헌신해야 세상이 변한다. 도전적인 실험정신이 젊은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도전적인 실험정신은 스님의 삶에서도 읽힌다. 법륜 스님은 1969년 출가했지만, 학교는 계속 다녔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동국대 불교학과 이기영 박사로부터 불교대학 1·2학년 교재를 받아와 공부했다. 고등학교 3년 때는 불교대학 3·4학년 교재로 자습했다. 스승 도문 스님은 “넌 수재여서 동국대 불교대학에 수석으로 합격할 것이다. 동국대 교수로 활동하다가 총장을 거쳐 문교부(지금의 교육부) 장관이 되어 국민에게 이바지하라”고 권했다. 하지만 법륜은 스승의 뜻을 거절했다. “‘도문(스님) 대학’을 나왔으니 그만입니다. 세상 속으로 들어가 수행하겠습니다.” 엘리트 코스를 거부한 법륜은 그렇게 세상 속으로 스며들었다.

세상 속에 스며든 법륜 스님은 법사로 활동했다. 조계종의 종헌·종법상 6개월 행자 교육과 4년간 기본 교육을 받아야 승적을 받을 수 있다. 그는 그 시간을 세상 속에서 부대끼며 보냈다. 1991년, 보다 못한 도문 스님이 “절 밖에 있었으니, 절 안에서 활동하라”고 권했다. 법륜 스님은 “도에 안팎이 있습니까?”라고 답했다. 출가 때처럼 선문답이 이어졌다. “도에는 안팎이 없지.” “그런데 왜 안에서 활동하라고 하십니까?” 이번에도 큰스님은 버럭 고함을 쳤다. “야 이놈아, 네가 밖을 고집하니까 안이 생기지 않느냐.”

스승의 죽비는 그를 또 깨쳤다. 도에 안팎이 없다는 논리로 자기가 밖을 고집하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다시 머리를 깎고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고 수행자가 득도한 큰스님한테 깨달음을 인정받는 전법게를 받았다. 스승은 몇 달 머무르며 승적을 가지라고 했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그대로 두지 않았다. 승적보다는 굶주리는 사람들이 더 눈에 밟혔다. 그 길로 그는 인도로 떠났다. 그런 제자를 두고 도문 큰스님은 “전 세계 불교 포교의 기점을 형성하고 있으니,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다”라고 감쌌다.

기자명 고제규 기자 다른기사 보기 unjusa@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