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쯤 전에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강기훈이 간암으로 병원에 입원했고, 곧 암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강기훈은 암 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항암치료에 들어갔다.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은 잘 되었다고 하는데, 워낙 간 상태가 안 좋은지라 생존율이 절반이라고 했다니 그의 건강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그는 정신적으로 너무 지쳐 있다. 생각해보시라. 21년을 오로지 누명이 벗겨지는 날을 기다리며 버텨온 심신이다. 그의 심신이 온전할 리가 없다. 그렇지만 간암이라니, 2년 전에 아들의 명예회복을 간절히 바랐던 어머니도 간암으로 돌아가셨는데….


검찰이 이례적 항소한 이유는?

우리 사회가 잊어서는 안 될 이름들이 있다. 나는 그중에 꼭 기억해야 할 이름이 강기훈이라고 생각한다.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알려진 ‘유서대필 조작 사건’의 주인공이다. 전민련에서 같이 활동하던 김기설이 1991년 5월8일 아침 서강대 옥상에서 분신한 뒤 투신하여 사망했다. 4월26일 명지대생 강경대 학생이 죽은 뒤에 지속적으로 학생, 노동자들의 죽음이 이어지면서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들불처럼 일어났다. 정권의 위기 국면을 돌파하려는 이들이 기획한 게 ‘분신의 배후’를 찾으려는 것이었다. 민주화운동 세력을 도덕적으로 매장함으로써 위기에서 탈출하기 위해 치안관계 장관회의가 5월7일 열렸고, 8일 아침 7시에도 열렸다. 바로 이럴 때 김기설의 죽음이 발생하자 이를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기획에 활용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유서를 대필해 김기설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시나리오가 작성되고, 전격적으로 검찰 강력부가 수사를 전담한다. 그들에게는 강기훈이 가장 만만한 먹잇감이 되었다. 


ⓒ연합뉴스2007년 강기훈씨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왼쪽). 1991년 5월 필적 실연을 하는 강기훈씨(오른쪽).

명동성당에 피신해 있으면서 억울함을 호소하던 강기훈과 당시의 민주화운동 지도부는 마침 6월 초 한국외대를 방문한 당시 정원식 국무총리에게 학생들이 밀가루 세례를 퍼부은 사건을 계기로 정국이 싸늘하게 식어버리자 할 수 없이 자진해서 6월24일 검찰에 출두하게 된다. 강기훈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법원은 증거마저 은폐하고 조작한 검찰을 편들었다. 사기 문서감정으로 이후 구속되기도 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김형영의 문서감정서밖에는 증거라고 내세울 수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1심도, 2심도, 대법원도 모두 강기훈이 유서를 대필해 김기설이 죽음에 이르렀다고 판결하여 그를 3년 동안 징역살이를 하게 만들었다. 그런 뒤 강기훈의 억울함을 풀기 위한 노력이 언론이나 대책위원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지만 한번 판결이 난 사건에 대해 검찰도, 법원도 요지부동이었다.

그러다가 진실화해위원회가 2007년 11월13일 ‘강기훈 유서대필 의혹 사건’에 대해 ‘진실 규명’ 결정을 내리고 국가의 사과와 재심 등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 국과수가 감정한 문건들과 새로 발견된 문건들을 사설 감정원 7곳에 감정 의뢰한 결과 ‘강기훈의 필적과 김기설의 필적은 다르며, 유서는 김기설의 것이 맞다’는 결론을 얻은 것이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당시 유서 감정에 참여한 이들 또한 모두가 ‘김형영이 혼자서 문서 감정을 했다’는 사실을 토로하면서 사설 감정원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진실을 위해 모진 세월을 견뎌왔던 강기훈과 그 가족에게는 단비와 같은 소식이었다. 진실을 밝히기 위해 2008년 5월8일 서울고등법원에 재심 개시 결정을 요구했고, 서울고법은 마침내 2009년 9월15일 재심 개시 결정을 내리게 된다. 그러자 검찰이 매우 이례적으로 대법원에 즉시 항고를 했고, 그런 뒤 대법원은 3년이 다가오도록 재심 개시 결정을 미루고 있다.

정권 차원에서 기획된 유서대필 조작 사건과 그 실무를 신념을 갖고 책임 있게 완수한 검찰, 그리고 피고인의 억울함에는 귀 기울이지 않고 검찰의 기소 내용을 그대로 인정해버린 법원이 만들어낸 합작품이 이 사건이었다. 당시 이런 정권과 검찰의 움직임을 선도한 것은 보수 언론과 일부 지식인이었다. 그들은 있지도 않은 분신의 배후를 밝히라면서 노태우 정권 퇴진 투쟁의 방향을 돌리려고 애썼고, 그런 노력은 주효했다. 시인 김지하씨와 박홍 서강대 당시 총장은 이런 정권과 언론의 움직임에 기름을 부어 불길을 확산시켰다. 국가의 직간접 폭력에 문화적인 폭력까지 당한 강기훈은 21년을 온몸으로 견뎌내야 했다.

대법원은 양창수 대법관에게 사건을 배당했는데, 양 대법관은 당시 판결을 맡았던 법관들과 서울대 법대 인맥으로 얽혀 있다. 특히 1심을 맡았던 노원욱 재판장과는 ‘서울고 선후배 사이’라서 부담을 많이 느껴 재심 개시 결정이 늦어진다는 얘기도 들리고, 검찰의 저항이 거세기 때문이라는 소문도 들린다. 당시 수사를 했던 검사들이나 판결을 맡았던 판사들이 시퍼렇게 눈뜨고 살아 있는데 그들에게 치명적인 상흔을 남길 판결을 하겠느냐는 법조계의 분위기도 전해진다. 만약 그렇다면 정말 큰일이다. 정말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란다.

매년 5월이면 극심한 우울감을 주체할 수 없었던 강기훈에게 제2의 인생을 살도록 해주는 일은 재심 개시 결정이다. 하루빨리 대법원이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려주기를 바란다. 드레퓌스는 12년 만에 명예를 회복했다. 그런데 이 사건은 벌써 21년이다. 더 늦기 전에 대법원이 결단을 내려줄 것을 호소한다.

기자명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