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 언론 ‘뉴스타파’는 5월22일 기자회견을 열고 조세 피난처에 서류상 회사(페이퍼 컴퍼니)를 만든 한국인 현황을 1차 공개했다.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가 확보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조세 피난처 고객 명단을 분석한 결과다.

뉴스타파의 발표를 보면, 조세 피난처에 페이퍼 컴퍼니를 만든 한국인은 모두 245명이다. 주소지가 한국인 사람이 159명, 해외 주소를 적은 사람이 86명이다. 차명 대리인을 내세워 실소유자 확인이 어려운 경우도 많았다. 이 명단에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재벌 총수 일가 등 사회 지도층 인사가 다수 포함되어 있다고 뉴스타파는 밝혔다. 명단은 추후 더 늘어날 수도 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뉴스타파는 이수영 OCI 회장 부부, 조중건 전 대한항공 부회장의 부인 이영학씨, 효성그룹 회장의 막내 동생 조욱래 DSDL 회장과 그의 장남 조현강씨 등 다섯 명을 1차로 확인해 발표했다.

이들은 모두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페이퍼 컴퍼니를 설립했다. 이수영 OCI 회장은 경총 회장을 지낸 바 있는 재계 지도급 인사다. 조중건 전 부회장은 고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의 동생이다. 효성 가문은 이명박 전 대통령의 사돈 집안이다.

ⓒ시사IN 백승기5월22일 김용진 뉴스타파 대표(왼쪽)와 최승호 뉴스타파 PD가 ‘조세 피난처 프로젝트 공동취재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수영 회장의 측근은 뉴스타파에 “가깝게 지내던 해외 은행의 프라이빗 뱅커가 영업 차원으로 도움을 요청해와서, 큰 고민 없이 도와준다는 생각으로, 국내 계좌를 만들듯 만들었다. 지나고 보니 조세 회피라는 오해를 받을 수 있어서 폐쇄했다”라고 해명했다. 국세청은 조세 피난처에 페이퍼 컴퍼니를 만든 것만으로는 탈세로 단정할 수 없지만, 가족 명의로 페이퍼 컴퍼니를 만드는 것은 대기업 사주들이 벌이는 역외 탈세의 전형으로 보고 주목한다.

조세 피난 생태계는 촘촘한 글로벌 네트워크와 역동적인 작동 메커니즘을 갖추고 있다. 좋은 조세 피난처와 조세 피난 상품 발굴 경쟁이 실시간으로 벌어진다. 글로벌 금융시장의 그림자 경제 버전인 셈이다.

그 작동 메커니즘을 일반인들은 파악하기 힘들다. 〈시사IN〉은 관련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Q&A 형식으로 궁금증을 풀어봤다. 미국 현지에서 20년 경력의 조세 피난 전문 브로커를 직접 접촉해 실상도 들어봤다(택스 디자이너, “새로운 피난처는 따로 있다” 기사 참조).

ICIJ가 확보한 자료는 어디서 나온 것인가? 조세 피난처에 페이퍼 컴퍼니를 대신 만들어주는 대행사가 있다. PTN과 CTL이라는 두 대행사 내부 고객 자료를 ICIJ가 입수한 것이다. 페이퍼 컴퍼니 개설 자체로 탈세 혐의가 유력하다고 볼 수 있나? 그 자체가 범죄는 아니다. 그러나 조세 피난처를 이용하는 목적은 주로 두 가지인데, 첫째가 ‘비밀 금융’, 즉 비자금 조성이다. 특히 개인이 페이퍼 컴퍼니를 만들 때에는 주로 이쪽이다. 흔히 생각하는 탈세보다도 더 많다. 비자금 조성을 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탈세가 되는 경우도 있다.

이수영 회장 측은 프라이빗 뱅커의 영업을 도와준다는 생각으로 국내 계좌를 만들듯 만들었다고 해명했는데? 국세청이 밝힐 일이지만, PTN과 CTL 같은 조세 피난 대행사가 하는 업무 성격과는 차이가 있다. 이들은 고액 자산가가 그림자 경제에서 부를 이전·관리하도록 도와주고 수익을 얻는다. 최고의 비밀 보장 서비스를 제공한다. 큰돈이 되지 않는 단순 계좌를 취급하는 사례는 드물다. 이런 회사들은 실제 자금거래 내역 자료를 축적하지 않는다. 고객의 자금거래 정보는, 꼭 필요할 경우에만 만들고, 만든 자료 역시 별도 공간에 은밀하게 보관하거나 고객과 담당자만 공유하기도 한다. 이번 ICIJ·뉴스타파 분석 자료에도 실제 자금 흐름은 잡히지 않는다. 그 때문에 당사자들은 “페이퍼 컴퍼니는 만들었지만 큰 자금 거래를 하지는 않았다”라는 해명을 내놓을 여지가 있다. 조세 피난 대행사의 비밀 보장 시스템 덕분이다. 결국 비자금 조성과 탈세 여부는 국세청 조사로 밝혀야 할 문제다. 기자회견장 주변에서는 “실명으로 페이퍼 컴퍼니를 만들었다가 걸린 사람들이 오히려 ‘순진’하다”라는 말도 나왔다. ‘진짜 거물’들은 다들 대리인 이름을 사용했을 것이라는 관측인데?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PTN과 CTL 같은 회사들의 내부 정보는 원래 절대로 공개될 리가 없는 자료다. 고객들 처지에서 보면 전혀 예상 밖의 상황이 일어난 셈이다. 차명으로 한 번 더 대비한 이들이 ‘꼼꼼’하기는 하다. 차명 대리인의 경우, 그가 누구의 재산 관리인인지를 확인하는 까다로운 과정이 하나 더 필요하다. 언론은 물론 정부 당국에게도 만만치 않은 과제다. 우리 당국이 조세 피난처로부터 금융 자료를 넘겨받는 등의 협조를 받을 수 있나?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현재 조세정보 교환협정이 조세 피난처 국가들과 제대로 맺어져 있지 않다. 우리나라와 협정을 발효한 나라는 쿡아일랜드와 마셜 군도 2개국뿐이다. 이번에 주목받은 영국령 버진아일랜드는 가서명 상태이고 발효되기 전이다. 두 번째 문제가 더 심각하다. 조세 피난처들은 금융정보 수집 능력이 취약하다. 협정을 맺었다고 해도 실제로 받을 수 있는 정보가 많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브로커들이 선호하는 조세 피난처가 되는 것이고, 그것을 알기 때문에 조세 피난 국가들도 굳이 금융정보 수집을 강화하지 않는다. 국익에 반하기 때문이다. 조세 피난 국가 중에 유난히 영국 식민지 이력이 있는 곳이 많다. 여전히 영국령인 곳도 있다. 영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패권을 잃으면서 금융 산업에 집중했는데, 이때 영국 금융권이 자국의 영향력이 미치는 작은 섬에 조세 피난이 쉬운 제도를 디자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게 작은 섬나라들이 ‘조세 피난 자본 유치 경쟁’을 벌인다면 근절이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국제 공조가 중요하다. 올해 4월 미국 워싱턴 DC에서 열린 G20 재무장관회의에서 ‘자동 조세정보 교환협정’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기존 협정과 달리 이 자동협정은 타국에 조세 정보를 요구하는 국가가 구체적 근거를 제시하지 않아도 정보를 공유하도록 했다. 타결되면 조세 피난 근절에 도움이 될 것이다. 국제사회가 영국 등 조세 피난처에 영향력이 있는 국가를 압박하는 것도 필요하다. 조세 피난 국가의 금융정보 수준을 끌어올려야만 자동협정도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중장기 대책 외에, 당장 벌어진 조세 피난은 어떻게 잡아내야 하나? 국세청이 페이퍼 컴퍼니 개설 당사자의 자금 흐름을 전체적으로 파악한 뒤, 아귀가 맞지 않는 부분을 추궁해 답을 받아내는 방법 정도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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