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필리핀으로 공정여행을 다녀왔다. ‘지역에 도움이 되고, 현지 문화를 존중하며, 환경을 지키고, 윤리적으로 소비한다’는 공정여행의 수칙을 지키기 위해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 앉은 지프니(Jeepny:필리핀의 대중교통)에 끼어 타고, 커버가 없는 변기 위에서 기마 자세로 볼일을 보고, 5분 만에 머리 감기를 포함한 샤워를 마치고, 재래시장을 찾아 바나나튀김 꼬치와 망고를 사먹던 일들. 공정여행은, 당시 여행을 진행했던 코디네이터가 말한 것처럼 ‘즐거운 불편’, 딱 그것이었다.

요즘 〈인간의 조건〉(개그맨 6명이 모여 살며 한 주일씩 무언가 하나 없이 살기를 체험하는 KBS 2TV 예능 프로그램)을 즐겨 보는데, 무언가가 하나 빠진 상태에서 사는 것이 첫날에는 굉장한 불편을 주지만, 날이 지날수록 그것 없이 사는 게 오히려 풍요로운 생활을 가져오지 않던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말이다. 공정여행이 딱 그랬다.
 

ⓒ이선희 제공바세코의 천진난만한 아이들. 공정여행자들을 안내하거나 접대하기도 한다.

내가 참가했던 공정여행팀은 여행 갈 때마다 바세코(Baseco:마닐라에 위치한 필리핀 최대 빈민지역)를 찾아 그곳의 주민 조직과 연계한 홈스테이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다.

바세코의 첫인상은 강렬했다. 곳곳에 고여 있는 녹색의 썩은 물웅덩이, 아무렇게나 버려진 쓰레기, 오물, 벌거벗은 아이들, 남루한 옷차림의 사람들, 허물어질 듯 위태로운 집들, 비쩍 마른 개들, 코를 찌르는 퀴퀴한 냄새와 뜨거운 햇볕…. 여기서 어떻게 하룻밤을 보내나? 하는 걱정과 함께 몸이 저절로 경직됐다.

나와 친구는 주민 조직의 일원인 다니 씨를 따라 우리가 묵을 집을 찾았다. 그곳은 그의 여동생 나야 씨가 사는 집이었다. 우리가 갔을 때 그녀는 아직 퇴근 전이었다. 집에는 아이들만 있었다. 다니 씨와 아이들은 우리에게 식사를 대접하기 위해 우왕좌왕했다. 옆집에서 프라이팬을 빌려와 소시지를 굽고, 달걀을 부치고.

곧 조촐한 식탁이 차려졌는데 나와 친구에게 식탁을 내어준 아이들은 가게 안의 평상에서 식사를 했다.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온 나야 씨가 우리를 보고 활짝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식탁에 차려진 음식을 보고 이내 인상을 찡그렸다. 다니 씨와 아이들이 차려낸 음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나야 씨는 큰딸의 방을 우리에게 내주었다. 가지런히 편 이부자리와 모기장, 그리고 오래된 선풍기 하나. 당연히 불편했다. 필리핀의 습한 날씨 때문에 이불은 눅눅했고, 모기장의 뚫린 구멍으로 모기가 들어와 밤새 물어뜯었다. 벽에 달라붙은 도마뱀과 서까래를 돌아다니는 쥐는 어찌나 신경 쓰이던지.

이튿날, 나야는 이른 아침 서둘러 출근했다. 우리에게 인사하는 그녀의 얼굴이 온통 땀범벅이었는데 아침 식탁을 보고 그 이유를 알았다. 접시 가득 구운 생선이 올라와 있었던 것이다. 독특한 향과 짠맛, 그리고 잔가시가 많아 먹기 불편한 그 생선을 나는 두 마리나 먹어치웠다. 내가 “마사랍뽀(맛있어요)”라고 하자, 다니 씨가 무척 흐뭇해했다.

그 후, 나는 특별한 행운으로 다시 한번 그 여행에 참가하게 되었다. 거의 똑같은 루트로 이동했기 때문에 첫 번째 여행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다시 만나는 기쁨을 누렸는데, 다니 씨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다시 만날 것을 기대하며 그와 그의 가족들에게 줄 선물과 지난 여행에서 찍은 사진을 준비해갔다. 정해진 일정 때문에 나야 씨와 다른 가족들은 만날 수 없었지만 다니 씨를 통해 선물을 전했다. 다음 날, 바세코를 떠날 준비를 하는데 다니 씨가 찾아왔다. 동생이 주는 선물이라며 내게 연두색 비닐봉투를 건넸다. 열어보니 구운 생선이 가득 들어 있었다. 나는 또다시 그 자리에서 두 마리를 먹어치웠다.

여행에서 우리가 누리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쾌적한 숙소와 편리한 교통, 맛있고 풍성한 먹을거리. 그런데 이미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넘치게 누리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여행에서 당연히 누려야 한다는 그 항목이 없이 여행을 해보자. 무엇이 될지 알 수 없지만 분명 다른 무언가가 그 자리를 꽉 채워줄 것이다.

기자명 이선희 (동화작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