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에 가서 여섯 살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기로 했다. 무슨 책이 좋을까, 고르고 고르다가 〈꼴찌 강아지〉를 집어 든다. 눈물 한 방울 똑 떨어뜨리고 있는 강아지 그림이 아이들 주의를 끌겠지.

과연 그렇다. “강아지가 울어요!” “왜 울어요?” 떠들썩하다. 그러게, 왜 울까? 우리 한번 알아볼까? 천천히 책장을 넘기며 읽어준다. 아홉 강아지 중 마지막으로 태어난 꼴찌 강아지. 젖 먹을 때도 꼴찌, 눈 뜨는 것도 꼴찌, 우유 핥아먹는 법 배우기도 꼴찌, 놀다가 집으로 돌아올 때도 꼴찌다.

제법 큰 강아지 아홉 마리가 새 주인을 만나기 시작한다. 꼴찌 강아지는 이번에도 꼴찌일까 봐 무섭다. 나를 좀 데려가세요! 기를 쓰고 어필하지만, 번번이 역효과다. 너무 시끄럽게 굴고, 갑자기 달려들어 귀부인 엉덩방아를 찧게 하고, 반가워하다 아저씨 코를 앙 깨물고. 결국 꼴찌 강아지 혼자만 남는다. 강아지가 우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서 끝난다면 ‘꿈과 희망을 주는’ 어린이 책이라고 할 수 없다! 꼴찌 강아지는 드디어 어떤 아이의 품에 안긴다. 그 아이가 속삭이는 말. “너, 이거 아니? 넌 내 첫 번째 강아지야!”

<꼴찌 강아지> 프랭크 애시 글·그림, 김서정 옮김, 마루벌 펴냄
도화지에 온통 흘린 우유만 그린 아이

나는 이 그림책에 뭉클했다. 모든 경쟁에서 번번이 뒤처지는 꼴찌 강아지가 이 사회 ‘루저’들의 표상인 것 같았다. 겉보기에 잘나가는 것 같아도 마음속으로는 루저일 때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 빈번한 낙담과 소외감과 자괴감이 이 가엾은 강아지에게서 구현되고 있다. 거기서 벗어나려, 경쟁에서 처지지 않으려 안간힘 쓰지만 결국은 또 밀려나고 주저앉고 마는 인간 군상의 모습도 이 강아지에게서 보인다. 가슴이 미어진다.

하지만 아픈 가슴은 치유된다. 제 주인을 만나고, 그에게는 ‘첫 번째’가 되는 꼴찌 강아지. 강아지와 소년이 눈을 맞추며 미소를 나누는 마지막 장면.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리라는 성경 말씀만큼이나 위안이 된다. 이게 내가 이 책을 고른 이유이다.

그런데 아뿔싸! 여섯 살 아이들에게 나와 같은 감흥을 기대하다니, 나는 아직도 멀었다. 아이들은 ‘꼴찌’라는 말에 까르르 웃는다. 뒤처진 친구가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꼴찌래요~ 꼴찌래요~” 놀림 소리가 터져나온다. 아, 맥이 탁 풀린다.

그러나 잠깐! 아이들은 ‘내가 혼자 남겨졌을 때’에 열렬히 반응했다. 그 시간을 고발(!)하는 아이들의 열띤 목소리에는 홀로 있음에 대한 팽팽한 긴장 의식이 가득했다. 그런 시간이 아이들에게 좋은 약으로 작용하기를!

형제들이 바닥에 흘린 우유를 혼자 핥아먹는 꼴찌 강아지가 깊이 각인되었는지 도화지에 온통 흘린 우유만 그린 아이, ‘꼴찌 강아지’를 그려보랬더니 꼴찌 강아지가 첫째 강아지가 되었으니 이제 꼴찌 강아지는 없다고 주장하는 아이. 그들의 반응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폭넓고 깊었다. 이렇게 아이들은 어른의 스승 노릇을 한다.

기자명 김서정 (동화작가∙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