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은 인도 사회 수구 집단의 논리와 사고방식이 가장 야만적으로 드러나는 영역이다. 성폭력을 저지르는 가해자들의 행위와 태도뿐 아니라 성폭력 문제에 대응하는 방식을 통해서도 그렇다.

2012년 12월 인도 수도 델리에서 23세 여대생이 남성 6명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하고 병원 치료 13일 만에 사망한 사건이 일어났다.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 알려진 이 사건으로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는 인도 사회의 고질적 문제가 다시 한번 논란의 대상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논란은 이어지고 있다. 아무리 충격적인 사건이 터져도 이내 잠잠해지고 낡은 관행 속으로 되돌아가던 과거와는 분명히 다른 상황이다. 하지만 전망이 낙관적이지만도 않다.

국제 인권단체인 휴먼라이트워치(Human Rights Watch)에 따르면, 인도에서 신고되는 강간 사건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피해자를 오히려 비난하는 낙인 효과 때문이다. 더욱이 성폭행 사건의 피해자에게 ‘가족이나 촌락의 명예를 더럽혔다’며 더 큰 고통을 가하는 경우도 잦다. 성폭행 사건을 신고해봤자 경찰이나 병원에서는 이를 무시하고 그냥 돌려보내는 경우도 허다하다. 더욱이 성범죄 사건의 경우, 몇 년이 지나도 종결되지 않을 만큼 경찰의 해결 의지가 낮다. 그래서 피해자에게 가해자와의 결혼을 강요하는 것이 흔한 대안이 되기도 한다. 심지어 가족이나 촌락에서 피해자를 ‘명예살인’하기도 한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EPA〈/font〉〈/div〉2013년 1월2일 수천명이 뉴델리에서 벌어진 여대생 집단 성폭행 사건을 신속히 처리하라며 시위를 벌였다.
ⓒEPA 2013년 1월2일 수천명이 뉴델리에서 벌어진 여대생 집단 성폭행 사건을 신속히 처리하라며 시위를 벌였다.
델리 사건은, 수천명이 신속한 처리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기 때문에 그나마 빠르게 처리가 가능했던, 매우 이례적인 경우다. 경찰은 사건 발생 직후 용의자 6명을 곧바로 체포했고 이들은 살인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와 관련된 법률 개정도 이루어져 인도 형사소송법 역사상 40년 만에 가장 큰 변화로 평가되고 있다. 그런데 정치권이 이처럼 신속하게 대응한 것은 지난 5월의 총선 덕분이었다. 델리 사건에 대한 국내외 여론이 심상치 않은 것을 눈치 챈 정치인들이 갑자기 ‘반(反)성폭력’ 활동가처럼 행세했던 것이다.

하지만 성폭력 문제에 대한 인도 정치인 및 고위 관료들의 언행은 그들의 여성비하적 인식 수준을 잘 보여준다. 인도 최고 수사기관인 중앙수사국(CBI) 국장은 다음과 같은 황당한 발언으로 비난을 자초하기도 했다. “도박을 금지하기 힘들면 도박을 합법화해서 수입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성폭력을 막을 수 없다면 즐길 수도 있다.” 인도 지배권력 측의 보수적 시각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그는 인도 성폭력 사건 중 97%는 가해자의 주거지에서 발생하는 데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 아는 사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성폭력 사건의 해결책으로 “여성들이 가해자의 집이나 침실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 성폭력 사건에 대한 경찰 책임을 회피하고 피해자의 이른바 부주의한 처신을 강조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여성에 대한 보호를 강화하는 한편 인도의 전통적 가치들을 부활시켜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이들에 따르면, 성폭력 사건이 느는 원인은 여성의 지위 향상 및 사회활동 증가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들을 다시 ‘전통적인 여성(이들의 표현으로는 ‘진짜 여성’)’으로 되돌리면 성폭력을 줄일 수 있다는 논리다. 이는 여성을 보호받아야 할 약자로 대상화하면서, 성폭력 문제를 사회 보수화의 명분으로 악용하는 태도다. 주로 힌두 우파들이 이런 주장을 편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AP Photo〈/font〉〈/div〉‘2012년 여대생 성폭행 사건’의 피의자들이 법원에 출두했다.
ⓒAP Photo ‘2012년 여대생 성폭행 사건’의 피의자들이 법원에 출두했다.
얼핏 보기엔 과학적이고 진보적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반동적인 주장도 있다. 이들은 여아 낙태 등 인도의 전통적 남녀 차별 문화에서 비롯된 성비 불균형(남성에 비해 여성이 적다)을 성폭력의 주된 원인으로 간주한다. 이로 인해 결혼하지 못한 가난한 남성들이 교육받은 상류층 여성들에게 성폭력이라는 방식으로 복수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논리는, 가해자를 피해자로 만들거나 혹은 가난한 남성을 악마화하는 결론으로 치닫는다.

피해자 90%가 ‘달리트’, 이 중 85%가 미성년

그러나 성폭력 피해 여성들의 계급과 연령을 짚어보면, 의외로 명확하게 인도 성폭력 사건의 본질을 알 수 있다. 성폭력 사건을 유형별로 분석한 인도 시민단체의 보고서에 따르면, “피해자의 90%가 달리트(인도 카스트에서 천민)였고, 이 중 85%는 미성년 소녀들이었다”. 나이 많은 남성들이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이용해서 가난하고 낮은 신분의 어린 여성들에게 성폭력을 자행해온 것이다.

인도 성폭력의 또 다른 특징은, 카스트나 촌락 등 공동체의 관습과 전통적 가치관에 따라 저질러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심지어 공동체 내의 관습적인 회의나 재판을 통해 ‘합법적으로(해당 공동체 내에서는)’ 여성을 성폭행하기도 한다. 최근 웨스트벵골의 어느 촌락에서는, 외부 남성과 성관계를 가진 여성에 대해 집단 성폭행이 명령된 사건이 있었다. 촌장의 공식적 지시였다. 같은 촌락 남성들에게 수년간 성폭행을 당하다가 딸을 낳은 여성에게 부도덕한 관계를 지속해왔다는 이유로 추방을 판결한 사례도 있다. 피해  여성이 이 ‘판결’에 항의하자, 촌장은 기상천외한 대안을 내놓았다. 경매를 통해 그녀와 딸을 ‘판매’하기로 한 것이다. 결국 두 사람은 6루피(약 100원)에 팔려나갔다.

대규모 성폭력이 조직적으로 자행되는 경우에도 주목해야 한다. 잠무카슈미르 분쟁 등 종교 갈등과 관련된 폭동이 일어날 때마다 상대편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 조직적으로 기획된다.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들은 성폭력을 ‘인종청소’ 전쟁의 수단으로 사용해왔다. 인권단체들의 보고에 따르면, 인도군 역시 국내 부족민 사이의 무력 분쟁에 개입하면서 성폭력을 무기화한 바 있다.

결국 인도 성폭력 문제의 대안은 권력관계와 사회구조, 문화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밖에 없다. 2012년 델리 성폭행 사건은 인도 사회 전체를 시험대에 올려놓았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나서야 한다. 그러나 현재 인도 여성의 조직적 역량을 감안하면, 앞길은 결코 밝지 않다.

기자명 한형식 (당인리대안정책발전소 부소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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