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기씨 일당이 전체 16개 금융기관에서 사기 대출받은 금액은 모두 1조8000억원이다. 이 중 무려 1조1000억원을 서정기씨 등에게 빌려준 은행은 바로 하나은행이다.

주범들은 약 5년 동안 수백 회에 걸쳐 하나은행에 수기로 작성한 허위 매출증권(물건을 팔고 돈을 받기로 약속한 계약을 기록한 증권. 앞으로 돈이 들어온다는 증거이므로 은행에 담보로 제출하고 대출받을 수 있다)을 제출하는 허술한 방식으로 거액을 빌렸다. 그런데도 은행 측에서는 이 정도의 돈을 대출하면서 현장 실사도 하지 않았다. 정상적인 은행 대출 심사 시스템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금융권에서는 평가한다. 사기범들의 또 다른 표적이었던 우리은행 등 다른 금융기관들은 서씨 등이 담보로 제출한 매출증권이 이상하다며 현장 실사를 예고한 바 있다. 그러자 주범들이 사기가 들통 날 것을 우려해 황급히 대출 신청을 철회하는 바람에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하나은행 측의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느슨한 대출 심사에 ‘혹시 은행 안팎의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시사IN포토서울 을지로1가에 있는 하나은행 빌딩. 하나은행은 1조1000억원을 대출 사기단에 빌려주었다.
금융권에서, 하나은행의 느슨한 대출 심사 시스템에 책임이 있는 것 아니냐고 거론되는 인물은 김승유 전 하나은행 회장과 김종준 하나은행장이다. 김승유 전 회장은 이명박 정부 시절 정권과 유착해 은행 부실을 일으켜 문제가 된 적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김 전 회장이 영업정지 직전의 미래저축은행에 145억원을 투자하도록 하나캐피탈(하나그룹 자회사)에 영향력을 행사한 사건이다. 당시 하나캐피탈의 대표가 바로 김종준 현 하나은행장이다. 김승유 전 회장은 이명박 전 대통령의 친형 이상득 전 의원과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을 통해 김찬경 미래저축은행 회장을 소개받은 뒤 이 같은 일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하나캐피탈은 미래저축은행이 영업정지되면서 60억원대의 손실을 안아야 했다. 지난해 4월 금감원은, 미래저축은행에 대한 하나캐피탈의 투자 결정 과정에서 서류를 조작했음은 물론이고 이사회 의결도 없었던 사실을 적발하고, 김승유 전 회장과 김종준 하나은행장을 징계한 바 있다.

한편 미래저축은행의 김찬경 전 회장은 2012년 영업정지 직전 고객 돈 수백억원을 빼내 중국 밀항을 시도하다가 체포되었다. 이때 김찬경 전 회장의 변론을 맡았던 이가 공교롭게도 박근혜 정부 초대 민정수석인 곽상도 변호사다. 곽 변호사는 서정기씨가 사기 대출한 돈으로 계약한 경기도 시흥시 ㈜신천지농장 대지에 근저당을 설정한 인물 중 하나이기도 하다.

하나은행은 이번 사기 대출로 1600억원을 회수하지 못하는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현장 실사도 없이 거액을 빌려준, 무모하기 짝이 없는 대출 심사에 대해 아직 책임도 묻지 않았다. 말 못할 사정이 없고서야 납득이 가지 않을 정도라고 금융권 관계자들은 말한다. 금융감독원 측은 “현재 하나은행에 대해 부실 대출 책임을 가리는 조사를 벌이고 있다. 결과가 나오는 대로 관련자들을 행정 징계 처분할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정희상 전문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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