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만들어졌다. 8월6일 전역 병사나 부모, 시민단체 관계자가 포함된 ‘민·관·군 병영문화혁신위원회’가 첫 회의를 열었다. 위원회 산하에 복무제도, 병영문화와 환경, 장병교육과 윤리 등 3개 분과위를 만들어, 오는 12월 ‘병영문화 혁신안’을 마련할 계획이다. 위원회는 지난 6월 GOP(일반전초) 총기난사 사건 발생 한 달 뒤 국방부가 내놓은 대책이었다. 윤 일병 사건의 파장이 커지자 위원을 보강했다.

그러나 벌써부터 ‘땜질 위원회’라는 비판이 나온다. 군에서 사건만 발생하면, ‘위원회 설립→대책 제안→국방부의 미온적 채택’이라는 전철을 밟아왔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비슷한 경로를 밟을 것이라는 예상이 많다.

폭력적인 병영문화를 개선하겠다며 팔소매를 걷어붙인 것은 김대중 정부가 처음이다. 이전의 병영문화는 ‘기강 확립’이 목표였다. 김대중 대통령이 인권 대통령을 표방하면서 1999년 6월 국방부는 ‘신(新)병영문화 창달 종합추진계획 시안’을 발표했다. 국방부는 ‘자기계발 프로그램’을 보급해 컴퓨터·생활영어 등 사회에서도 쓸 수 있는 특기를 장병들이 배우게 하겠다고 밝혔다. 또 표준 내무생활 프로그램도 개발해, 소대(40여 명) 단위로 움직이던 기존 내무생활을 분대(10명)별로 바꿈으로써 개인 시간을 보장하는 새로운 병영문화를 만들겠다고 선포했다. 국방부는 “전투력도 높이고 동시에 민주 시민을 양성하는 것이 신병영 문화의 목표”라며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연합뉴스8월5일 박근혜 대통령이 한민구 국방장관(오른쪽)이 참석한 국무회의에서 ‘윤 일병 사건’과 관련해 ‘일벌백계 책임론’을 말했다. 국방부는 다음 날 민·관·군 병영문화혁신위원회 첫 회의를 열었다.

국방부의 홍보와 달리 현장에서는 폭력적인 병영문화가 쉽게 개선되지 않았다. 2001년 4월 해병 2사단에서 이 아무개 일병이 분신자살을 기도했다. 원인은 고참들의 상습 폭행이었다. 그런데도 해병대는 이번 윤 일병 사건과 똑같이 사건을 덮기에 급급했다. 군대에서 분신자살을 시도한 것 자체가 처음인지라 파문이 커질 것을 우려한 해병대사령부가 국방부에 보고조차 하지 않았다.

인권을 앞세워 본격적으로 병영문화 개선에 나선 것은 참여정부였다. 참여정부 첫해인 2003년 8월 육군은 ‘사고 예방 종합대책’을 마련했다. 하지만 2005년 1월 훈련소 인분 사건이 터졌다. 논산훈련소 이 아무개 대위가 화장실 위생이 불량하다며 정신교육을 받던 훈련병 192명을 집합시킨 후 인분을 손가락으로 찍어 동시에 입에 넣으라고 강요한 것이다. 윤광웅 국방부 장관이 사과했지만, 5개월 뒤 GP (감시초소) 총기사고라는 초대형 사고가 터졌다. 경기도 연천군 전방부대에서 김 아무개 일병이 내무반에 수류탄을 터뜨리고 총을 난사해 병사 8명이 숨졌다. 김 일병은 상관들에게 언어폭력 등 괴롭힘을 당했다고 진술했다.

이를 계기로 국방부는 민·관·군 합동으로 ‘병영문화 개선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번 윤 일병 사건 뒤 만들어진 병영문화 혁신위원회와 구성과 형식이 유사하다. 민간 위원 9명, 국방부 위원 9명으로 만들어진 당시 위원회는, 윤 일병 사고 이후 대안으로 거론되는 군 인권법 제정이나 독일식 군 옴부즈맨 제도, 군 사법체계 개혁 등을 심도 있게 논의했다.

특히 옴부즈맨 제도는 징병제를 시행하던 독일을 벤치마킹했다. ‘제복 입은 시민’을 지향하는 독일군은 독일 연방의회에 국방감독관(옴부즈맨)을 두었다. 군대에 대한 의회의 통제를 제도화한 국방감독관법에 따르면, 군인은 국방감독관에게 의견을 제출할 권리가 있고, 국방감독관은 국방장관으로부터도 정보 요구권이나 문서 열람권을 보장받았다. 국방부에서 독립적으로 활동하며 국방감독관은 독일군의 인권 지킴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래서 노무현 정부 당시 병영문화 개선대책위원회도 이 옴부즈맨 제도의 장점을 눈여겨보았다. 하지만 군의 조직적인 반발을 넘어서지 못했다. 공동위원장을 맡았던 정상모 평화민족문화연구원 이사장은 “군대문화를 개혁하겠다는 의지가 강한 노무현 정부였는데도, 옴부즈맨을 국회 산하에 두는 것을 두고는 군 고위 인사들의 반대가 심했다”라고 말했다. 정 이사장은 “군 최고 인사들은 기강 확립을 위해서는 폭력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인식을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었다”라고 덧붙였다.

ⓒ연합뉴스8월4일 국회 긴급 현안질의에서 김흥석 국방부 법무실장(위)이 ‘윤 일병 사건’과 관련해 가해자에게 살인죄를 적용하는 것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결국 군의 반발로, 국회 산하가 아닌 국민고충처리위원회(현재 국민권익위원회)에 옴부즈맨이 설치되었다. 하지만 위상은 물론이고 조사나 자료 요구를 강제할 권한도 대폭 축소되면서 옴부즈맨 제도는 시작부터 탈색되었다. 정 이사장은 “옴부즈맨이라 부르기도 부끄러울 정도로 쪼그라들어 설치되었다”라고 평가했다.

당시 위원회가 내놓은 군인복무기본법(군 인권법)도 빛을 보지 못했다. 병사들의 기본권을 보장한 군인복무기본법은 2007년 입법 예고까지 되었지만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흐지부지되었고, 2008년 5월 17대 국회 임기 만료로 자동 폐기되었다.

병영문화 개혁 손 놓으면 ‘군 폭력 지수’ 높아져

병영문화 개선은 이명박 정부 들어 매우 축소되었다. 이명박 정부 이후 국방부는 ‘군 재조형’ ‘전투형 군대 육성’을 국방 개혁 기치로 내걸었다. 이명박 정부에서 첫 국방부 장관을 맡은 이상희 장관은 ‘나사 풀린 군의 기강을 잡아 군대다운 군대를 만들겠다’라면서 군의 재조형(Reshaping)을 추진했다. 이를 위해 병영문화 개선보다는 간부와 병사의 안보의식을 높이는 데 집중하면서 국방부의 인권시계는 거꾸로 가기 시작했다. 게다가 2010년 터진 천안함 사건도 국방 개혁에 찬물을 끼얹었다. 천안함 사건 이후에는 전투형 군대 육성이 국방정책의 핵심 화두가 되었다. 결국 2011년 7월 해병대 김 아무개 상병의 총기난사 사고가 터졌다. 김 상병 사건은 선임병들의 가혹 행위와 ‘해병대의 기수 열외’가 원인으로 꼽혔다. 이때도 국가인권위원회가 군 인권법 제정을 권고했지만 정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가인권위원회에 접수된 군 관련 진정사건의 추이만 보아도, 병영문화 개혁에서 손을 놓으면 ‘군 폭력 지수’가 높아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 접수된 사례는 80건 이하였다. 2003년 73건, 2004년 61건, 2005년 65건, 2007년 80건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들어 2008년 89건, 2009년 96건, 2010년 117건으로 점점 늘더니, 전투형 군대 양성이 본격화된 2011년에는 무려 135건이나 접수되었다. 군에서 구타(폭행사고)로 형사 입건된 사건만 봐도 2009년 1237건, 2010년 1177건에서 2011년에는 1526건으로 크게 증가했다.

윤 일병 사건을 계기로 만들어진 ‘민·관·군 병영문화혁신위원회’에서는 옴부즈맨 제도나 군 인권법이 다시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이미 9년 전에 같은 대안을 내놓았던 정상모 이사장은 “근본 대책은 다 나와 있는데 실천하지 않는 게 문제다. 실행하지 않으면 사고는 또 터진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고제규 기자 다른기사 보기 unjus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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