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 검색창에 ‘아줌마’라고 쳤다. 헐벗은 여자 사진이 떴다. 아줌마를 지우고 주부라고 썼다. 좀 나았다. 평범한 중년 여성의 사진이 여러 장 나왔다. 한 장을 모니터에 띄우고 쓱쓱 펜질을 했다. 몇 번의 선에, 사진 속 아주머니가 만화 속으로 장소를 옮겼다. 앞으로 그려야 할 아주머니가 많다. 대형 마트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묘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파업 장면 묘사도 앞두고 있다. 최규석 작가의 손이 빨라졌다.

지난 연말부터 연재를 시작한 최규석 작가의 웹툰 〈송곳〉은 노동 이야기를 다룬다. ‘어쨌든 나는 세상 모든 곳에서 누군가의 걸림돌이었다’는 주인공 이수인과 구고신 노동상담소장이 중심 인물이다. 프랑스계 대형 마트의 중간관리자 이수인이 비정규직 직원을 해고하라는 회사의 지시에 맞서 노조를 조직해 대응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습지생태 보고서〉 〈대한민국 원주민〉 〈100℃〉 등 주로 출판 만화를 그려온 최규석 작가의 웹툰 데뷔작이다.

〈송곳〉 시즌1의 2부가 끝났다. 매회 댓글이 1000~2000개 달렸다. 대한민국 노동 현실에 대한 탄식도 있고, 본인들의 이야기를 다뤄달라는 사업장의 사연도 있었다. 주요 등장인물을 중심으로 2차 창작 BL(Boys Love·남자 동성애)물도 나왔다. 일부 독자는 〈송곳〉에 참고가 된 사건의 논문을 찾아서 공부 중이다. ‘공짜로 보기 미안한’ 대표적인 웹툰이 되었다. 4부 연재 전, 잠시 연재를 쉬는 최규석 작가를 경기도 부천에 있는 그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전업 작가를 결심한 서른 살부터 줄곧 부천에서 산 그의 작업실은 한국만화영상진흥원 2층에 있다. 작업실 이름은 ‘삼단변신’. 작가로서 이름을 알리게 된 작품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의 포스터가 작업실 한쪽을 차지하고 있다.

ⓒ시사IN 윤무영최규석 작가는 2013년 12월부터 웹툰 <송곳>을 연재하고 있다. 시즌1의 4부는 연말쯤 재개된다.
노동 문제에 대한 관심은 줄곧 있었다.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대학장과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의 책을 읽다 보면 그야말로 ‘드라마’가 많았다. 8년 전쯤 6월 항쟁을 다룬 〈100℃〉를 그릴 때 노동자 대투쟁 이야기까지 담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았다. 그즈음, 일면식만 있는 손문상 화백이 새벽에 전화해 비정규직 이야기를 그려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해서 의아했다. 활동가를 만나서 인터뷰하고 투쟁 현장에 나가 앉아 있다 오기도 했다.

웹툰 <송곳>의 장면들. 2007년 이랜드홈에버 파업을 토대로 작가의 경험과 상상력을 보탰다.
대형 마트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 2007년 한국까르푸-이랜드홈에버 파업이 연상된다. 당시 회사 측은 법적 정규직 전환 시점을 앞두고 비정규직 해고를 감행했다. 노조의 500여 일 장기 투쟁 끝에 해고가 철회되었지만 회사는 노조위원장을 비롯해 간부 9명을 해고했다. 〈송곳〉은 실제 인물과 실화를 토대로 했다. 작가 개인의 경험과 상상력도 보태졌다. 구고신은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대학장에게서 영감을 받았지만 ‘젠틀한’ 실제 인물과 달리 거침없는 성격이다.

〈송곳〉은 네이버에 연재 중이다. 왜 다음이 아니라 네이버인지 질문이 많았다. “가서 윤태호·강풀(만화가)만큼 엄청나게 히트하지 않는 이상 네이버에서 중위권 정도 하는 게 보는 사람 숫자는 더 많을 거라는 생각이 있었다. 특히 청소년은 다음 만화도 네이버에서 검색해 보고 들어온다. 오다가다 얻어걸리길 바라는 마음에서 선택했다.” 관심만큼 욕도 많이 듣는다. 극중에는 의경이 회사 측에서 고용한 용역 간부의 명령을 듣는 장면이 나온다. 의경 출신의 반발이 컸다. “말이 안 되는 걸 나도 안다. 그런데 일어나지 않는 일은 아니다. 흔하지는 않지만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는 일어난다. 모든 군부대에서 자살 사건이 벌어지는 건 아니니까. 자기가 본 게 다는 아니다.”

마트라는 일상의 공간, 만화 속으로 들어오다

회자되는 명대사도 많다. 세상일이 간단치 않다는 암시를 주는 대사들이다. 비정규직을 해고하라는 지시를 받은 회사 동료들은 이수인에게 말한다. “나이 먹고 순수한 거, 그거 범죄야 범죄.” 구고신 소장은 노동상담소에 온 이들을 향해 말한다. “노동운동 10년 해도 사장 되면 노조 깰 생각부터 하게 되는 게 인간이란 말이오. 당신들은 안 그럴 거라고 장담하지 마. 서는 데가 달라지면 풍경도 달라지는 거야.”

파업은 언제 시작될까. 모티브가 된 사건을 아는 이들이 묻는다. 이제 노조를 조직하는 단계다. 일단 사람을 더 모아야 한단다. 그 과정에서의 설득력이 중요하다. “작업하면서 힘든 점 중 하나는 그렇게 말이 안 되는 사업장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수인 같은 캐릭터의 인물이 아니었다면 노조가 커지기 힘든 사업장이다. 깜짝 놀랄 만큼 이상한 짓을 하지는 않는다. 10년 전만 해도 회사 측 대응이 어설펐다. 폭력 사태가 없던 건 아니지만 어설펐던 거다.” 지금은 노조를 대하는 기업의 방식이 전반적으로 세련되어졌다. 노동법을 잘 알고 법으로 해결한다. 눈에 보이는 폭력을 행사한 건 아닌데 노동자들이 자살을 한다. “(기업 입장에서) 합리적으로 변한 거다.”

마트는 특히 친숙한 공간이다. 만화를 보는 이들이 나와 상관없는, 특별한 공간으로 여기지 않길 바랐다. 몸담던 조직이라 해도 기사화되거나 극화되면 낯설게 보인다. 군대가 대표적이다. “지금 군대에서 일어나는 일 보며 분노하는데 한국 성인 남자 대부분이 그런 일 일어나는 걸 알고 있고, 자기 주변에서 일어날 때도 ‘어, 그래’ 하고 지나쳐왔다. 기사화될 때 놀랄 뿐이다. 사는 게 이런 거지, 세상이 이런 거지 하는 그 순간이 실은 말이 안 되는 순간이라는 걸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

마트에서 사진을 찍다가 여러 번 제지당했다. 아무래도 눈에 띄었다. 지금은 20개월 된 아들을 안고 가기도 한다. 취재할 때는 질문보다 이야기를 듣는 편이다. 주인공을 활동가로 했다가 노조 간부로 바꿨다. 활동가는 사건 중심으로 의미를 설명하지만 노조원은 인물 캐릭터를 앞세워 개인사적인 이야기를 쏟아냈다. 더 디테일했다. 이해하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 부산 지역 활동가를 취재할 때 그가 간과 신장 이식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되자 수백명이 병원으로 몰려왔다. 이식이 가능한지 저마다 검사를 받았다. “납득이 안 되더라. 인간관계에서 가능한 건가. 다른 분한테 여쭤봤다. ‘소장님 죽게 생겼다. 그럼 이식해줄 수 있냐’고. ‘죽어도 해줄 수 있다. 왜냐. 저 사람이 세상에서 더 중요하니까.’ 이 정도의 인간관계라고 하는 건 종교적인 영역이지 합리적 판단이 아닌 것 같다.” 그 장면도 넣고 싶었지만 납득을 못 시킬 것 같았다.

이수인은 보통의 주인공과 좀 다르다. 관계 맺기에 익숙지 않다. 세상에 순응하고 싶지만 타고난 기질이 ‘융통성 없음’이다. 정의감보다는 원칙을 존중한다. 촌지를 바라는 교사, 부정선거를 지시하는 육사 장교, 군납품 비리를 저지르는 사관을 모른 척하고 싶지만 자신도 모르게 손이 들려 있다. 최 작가가 그런 캐릭터를 좋아하고 본인과도 비슷한 점이 있다. 노동운동 하면 대개 끈끈함이 연상된다. 지금까지 그려진 종류의 끈끈함을 그리기는 싫었다. “사람이 차갑다고 해서 인간에 대한 애정이 없는 건 아닐 것이고 사람이 따뜻하다고 해서 잔인함을 가지지 않은 건 아니다. 조폭도 자기들끼리는 얼마나 끈끈한가. 다른 종류의 휴머니즘을 보여주고 싶었다. 개인은 싫어하지만 인간은 지키고자 하는 것처럼.” 노동당 당원인 그는 ‘세상의 진보’에 대한 생각도 뚜렷하다. “내가 착해지기 싫어서 구조를 착하게 만드는 게 낫다는 생각이다. 돈 1000원을 일일이 주는 것보다 세금을 거둬서 뿌리는 게 낫다.”

이번 추석, 최규석 작가는 창원 부모님 댁에 내려갔다. 누이들은 특히 그의 만화 순위를 눈여겨본다. 동생이 빨리 돈을 벌어서 행복하게 잘살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부모님 댁에는 인터넷이 없다. 스마트폰도 없어서 아들이 작품을 하고 있다는 정도만 안다. 최규석 작가는 상명대 만화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처음엔 아무도 ‘깃발을 꽂지 않은’ 만화이론 분야로 나가려고 했다. 실기 준비는 고3 때 학원에 다니며 배운 10개월이 전부였다. 집안 형편 때문에 몇 차례 그림을 포기했다. 국문학과에 가려고 했다. 친구의 권유로 미술학원에 놀러 갔다. 한번 경험하고 나니 쉽사리 접히지 않았다. 거기 있는 아이들보다 훨씬 잘할 것 같았다. 군대 있을 때 출품한 작품이 만화잡지에 당선됐다. 하지만 잡지는 폐간됐다. 서울에서 1년 정도 버티다가 미술학원 강사를 하려고 내려갔다. 전업 작가는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대학 때 예술대 학생회에서 일했지만 운동권과는 거리가 멀었다. ‘으쌰으쌰’ 하는 분위기를 체질적으로 기피한다. 구호 아래 모이는 이들 중에는 외치는 구호보다 못한 자도 많았다. “뭐라고 해야 하나. 클린트 이스트우드? 사막에 혼자 있는 늑대, 구도자 같은 느낌이 강했다. 누가 뭐라건 상관없이.” 짧으면서도 사태를 파악하는 방식이 명료한 김규항의 글을 즐겨 읽었다. 자신이 그저 그런 인간 중 하나라는 건 군대에서 깨달았다. 학교에서는 주변의 모두와 적이면서도 자기주장을 관철시킬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군대에서는 영창에 가니까 그럴 수 없었다. 많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냉소적이다.

ⓒ시사IN 윤무영대형 마트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묘사하다 보니 그려야 할 사람이 많다. 인물 스케치 중인 최규석 작가.
그가 술 마시면서 콘티를 짜는 이유

“사람들이 내 만화를 보며 담담하다고 표현하는데 나로선 그게 최대한이다. 술 마시면서 콘티를 짜기도 한다. 조금이라도 더 감정적인 표현이 가능해지니까.” 최 작가와 대화가 계속될수록 작중 이수인의 캐릭터와 겹쳐 보였다. ‘송곳’의 의미와도 닿아 있었다. 2부 마지막 편 대사에 나오는 말이다. ‘분명 하나쯤 뚫고 나온다. 가장 앞에서 가장 날카롭다가, 가장 먼저 부서져버리고 마는 그런 송곳 같은 인간이.’

3부 연재가 임박했다. 시즌1의 최종 마감은 내년 상반기로 잡고 있다. 최규석 작가는 연재할 때 작업실을 잘 떠나지 못한다. 휴재 중이라도 마찬가지다. 작품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있다. 경제적으로도 이 시기가 가장 쪼들린다. 강연 등 외부 활동을 못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송곳〉의 영화 판권을 계약했다. 그는 〈송곳〉이 학습 만화라고 생각한다. 독자들이 노동에 대한 상식이 적기 때문에 설명하면서 얘기를 진행해야 한다. 이해 안 되는 부분이 있으면 전체 흐름에서 해가 되지 않는 한 설명을 한다는 게 원칙이다. 그가 작업실을 떠나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독자들의 스크롤 내리는 기쁨은 커질 것 같다. 가장 최근작이 대표작이 되는 작가를 지켜보는 일 또한 마찬가지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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