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황이라고는 누려본 적 없는 한국 출판 시장에서도 매년 1종 이상의 밀리언셀러는 배출되어왔다. 하지만 올해 초 출판계는 이번만은 100만 부 판매가 요원할 거라는 말로 최악의 시장 상황을 암시했다. 그런데 웬걸! 윤태호 작가의 만화 〈미생〉이 다시금 한국 출판계의 불가사의(?)를 계승하고야 말았다. 2013년 10월, 전 9권으로 완간된 〈미생〉은 지난 10월26일 올해 최초이자 아마도 마지막일 밀리언셀러 고지를 밟았다. 더 재미있는 것은 이로부터 겨우 한 달여 후 200만 부를 돌파했다는 사실이다. 2012년 포털 사이트 미디어다음에 연재될 때도 〈미생〉의 인기는 독보적이었다. 단행본으로 출간됐을 때도 늘 완만한 상승곡선을 그리며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고작 한 달 만에, 그것도 지난 2년여간의 판매량을 훌쩍 웃돌며 다시금 100만 부가 판매됐다는 것은 확실히 이례적이다. 이유는 너무나도 분명하다. tvN 드라마 〈미생〉 때문이다.

연재 당시에도 〈미생〉은 기존 만화 팬뿐 아니라 평소 만화를 보지 않던 새로운 독자까지 끌어들이며 폭넓은 팬 층을 다진 작품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에 비할 바가 아니다. 원작 만화의 급격한 판매량 증가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현재 상황은 한마디로 ‘신드롬’이라 일컬을 만하다.

만화의 영상화는 낯선 풍경이 아니다. 각양각색 슈퍼 히어로들이 지구촌 방방곡곡을 누비는 블록버스터 시리즈만 하더라도 모두 만화를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한국의 상황 역시 마찬가지. 웹툰 위주로 재구성된 한국의 만화판은 어느덧 소설을 밀어내고 영화의 가장 중요한 소스로 자리 잡았다. 만화의 판권이 팔리는 것은 예사가 되었고, 인기 만화가 영상화되는 것 역시 더 이상 특별한 일이 아니다.

ⓒtvN 제공드라마 <미생>(위)은 ‘원 소스 멀티 유즈’의 좋은 예를 보여준다. 원작 만화의 급격한 판매량 증가는 원작을 제대로 이해한 드라마의 영향이 컸다.
그럼에도 〈미생〉과 같은 선순환 구조를 이룬 경우는 극히 드물다. 〈미생〉 원작이 특별히 좋은 작품인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동안 영상화된 작품들은 원작이 ‘후져서’ 실패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런 경우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다. 애초에 좋은 원작을 영상화한다는 것 자체가 양날의 검이다. 검증받은 좋은 원자재를 비교적 손쉽게 확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대중적 인지도까지 안고 시작한다는 것은 창작자나 제작자 처지에서는 무척 매력적인 요인이다. 이 때문에 반대편 날의 존재는 간과하는 듯하다. 좋은 원작이란 일종의 공고한 ‘권위’와도 같다. 늘 그렇듯 권위에 기대거나 혹은 도전하는 행위는 결코 녹록한 일이 아니다.

오래전 허영만 원작의 만화 〈타짜〉를 영화로 만들어 흥행에 성공한 최동훈 감독과 인터뷰한 적이 있다. 당시 그는 “관객들로부터 ‘(원작) 만화를 저렇게 각색하다니…’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기분이 좋았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원작을 철저히 배신하기도 하고 원작을 충실히 따르기도 한다. 그것의 차이와 여파는 무엇일까?”라는 말로 각색의 ‘자세’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말에 만화 원작을 영화화할 때 어떤 방식을 취할 것이냐에 대한 고민이 압축되어 있다. 원작을 충실히 재현하거나 혹은 변형하거나. 여기서부터 작품의 뼈대가 잡힌다.

영화 <이끼> <패션왕>, 드라마 <닥터 프로스트>(맨 위부터)는 원작의 묘미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작품성도 훌륭한데 흥행까지 뒷받침된 영화라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것이다. 흥행의 요인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게 없다. 모든 흥행 요인은 결과론일 따름이니까. 다만 좋은 작품일수록 흥행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높다. 바로 〈미생〉처럼 말이다. 원작 만화 〈미생〉은 종합상사 원인터내셔널 샐러리맨들의 일과 삶, 애환을 담아낸 작품으로, 그 시작부터 특별했다. 국내 만화계에서 취재 문화는 아직까지도 꽤 낯선 편이다. 허영만 화백이 〈식객〉으로 좋은 선례를 남기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허영만이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일 만큼 여전히 그 비중은 크지 않다. 그 와중에 고개를 내민 〈미생〉은 철저한 취재를 근거로 만들어진 보기 드문 작품이었다. 〈미생〉은 발로 뛴 취재를 바탕으로 종합상사의 시스템을 핍진하게 그려냈다. 작품 내 갈등 구조 또한 이 시스템을 통해 만들어진다. 그러다 보니 오직 단점을 부각하는 데 여념 없던 수직적 관료제 또한 〈미생〉에서는 납득할 만한 이유로 이야기에 참신함을 더한다. 그렇게 별세계 사람들의 이야기로 흥미를 끌면서도 결국 이 모든 것이 누구나 영유하고 있는 ‘사람 사이의 일’이라는 공감을 길어내는 것, 이것이 바로 만화 〈미생〉의 장점이다.

드라마 〈미생〉은 이런 원작에 대한 충분한 이해에서 시작한다. 그렇기에 능수능란한 변주도 가능했다. 드라마 제1화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 신입사원 안영이는 만화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섹시한 여성으로 등장한다. 원작을 읽은 독자라면 순간 이렇게 생각했을 법하다. ‘한국 드라마가 그럼 그렇지.’ 하지만 도입부에서 보여준 안영이의 모습은 사실 이런 의구심을 효과적으로 전복한 절묘한 포석이었다. 한 방 먹고 시작한 시청자들은 이후 새로운 모습을 덧댄 장백기나 한석률 같은 캐릭터에 다시금 매혹당했다. 장백기의 고민은 좀 더 입체적으로 그려졌으며, 한석률 역시 능글능글함에 수다스러움을 더해 매력적인 캐릭터로 거듭났다. 주인공 장그래의 상사 오상식 차장 역시 늘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며 때때로 얄미운 놈을 대신 골려주기도 하는 등 호방함이라는 새로운 옷을 입었다. 어느 하나 어색함 없이 적절한 장식을 더한 것처럼 보인다.

한국 드라마 <내일은 칸타빌레>(왼쪽)와 일본 드라마 <노다메 칸타빌레>(오른쪽)는 같은 만화를 원작으로 했지만 흥행 성적표는 달랐다.
흥행에는 성공했지만 평단 의견이 갈리기도

이에 비해 영상화에 실패한 콘텐츠들은 원작의 묘미가 무엇인지 전혀 파악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윤태호 작가의 동명 원작을 영화화한 〈이끼〉는 흥행에는 성공했지만 평단의 의견은 양분되었다. 〈이끼〉의 시발점은 주인공 류해국이 가진 괴상한 집착에 있다. 그는 뭔가 이상한 점이 있으면 그대로 넘기지 못하고 물고 늘어지기 일쑤다. 그런 그가 아버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내려온 시골 마을에서 뭔가 불온한 기운을 느끼고 마을에 정착하기로 한다. 이상하게 오늘 처음 보는 마을 사람들이 자신을 싫어하는 “더러운 기분”이 못내 껄끄러웠기 때문이다. 그 기분을 떨어내기 위해 해국은 마을 사람들이 감추고 있는 악의 원천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이것이 만화 〈이끼〉의 골자다. 그렇다면 영화는? 우습게도 영화는 이 마을의 성립 과정, 즉 악의 원천을 처음부터 하나하나 상세하게 풀어놓는다. 원작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자 스릴러의 정수를 도입부에서부터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관객들은 가장 궁금해야 할 불온한 기운의 정체를 초반부터 알아챈 채 영화를 따라간다. 굉장히 우스운 여정이다.

11월 초에 개봉한 〈패션왕〉 역시 비슷하다. 원작은 분명 코미디 작품이지만 일반적인 ‘시추에이션 코미디’와는 전혀 다르다. 개개의 상황이 정확히 들어맞으며 만들어내는 코미디가 아니라, 최소한의 논리는커녕 앞뒤도 안 맞고 그저 생뚱맞은 캐릭터와 상황이 연이어지는, 시쳇말로 ‘병맛 만화’에 가까운 작품인 것이다. 이런 개그가 만화만큼 영화에서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많은 가공이 필요하다. 원작의 장면을 그대로 재현해봤자 실소나 고소(苦笑)만 남길 뿐이니까. 결과적으로 〈패션왕〉은 실소와 고소의 반복이었다. 영화로 만들어진다고 했을 때 작중 패션왕을 뽑는 리얼리티 쇼의 존재가 크게 부각될 것은 예상 가능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원작에 대한 몰이해는 여기에 왕따 문제와 같은 불필요한 스토리를 더했다. 웃다 울리는, 결말다운 결말을 만들어야겠다는 강박 또한 자충수가 되었다. 결국 원작이 지닌 매력은 모조리 휘발된 채 도식적인 코미디 영화 한 편만 덩그러니 남았다. 과거 〈다세포 소녀〉의 전철을 고스란히 밟은 셈이다.

최근 OCN에서 방영하기 시작한 드라마 〈닥터 프로스트〉는 극적인 분위기를 더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함인지 범죄 드라마로 재구성되었다. 그로 인해 심리 상담을 통해 심리학의 매력에 집중하던 원작의 색채는 상당 부분 희석됐다. 일본 만화 〈노다메 칸타빌레〉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 〈내일은 칸타빌레〉는, 일본에서는 드라마로도 성공했지만 한국에서의 흥행 성적은 저조하다. 한국에서도 볼 만한 사람들은 다 봤다지만 관객 확장에는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는 처음부터 하지 말았어야 할 ‘모험’이라고 해야 옳다. 영화 〈더 파이브〉의 경우 만화의 원작자가 직접 메가폰을 잡았음에도 흥행은 물론 영화적 완성도 면에서도 의문을 남겼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원작이 그렇게 뛰어난 만화가 아니었던 데다 그나마 중요했던 원작의 몇몇 대목을 간과한 탓이 커 보인다. 〈은밀하게 위대하게〉는 성공작이지만, 원작 만화보다는 배우의 힘이 더 크게 작용한 작품이었다. 한결같이 뭔가 아쉬움이 남는다.

미국 ‘슈퍼 히어로’ 영화의 성공 배경

만화 강국 일본에서 만화 원작이 차지하는 비중은 막강하다.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지는 게 당연한 순서가 되었고,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지는 경우도 상당하다. 물론 시도가 많은 만큼 무수한 실패 또한 뒤따랐다. 표본 수가 엄청나게 차이 나기는 하지만, 대부분 그리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는 면에서는 우리와 많이 다르지 않다.

반면 성공한 작품들의 특징은 한결같다. 드라마 〈노다메 칸타빌레〉나 〈호타루의 빛〉처럼 원작의 핵심을 적절히 이해했기에 가능한, 아주 특별한 작품들이었다. 현실의 인물들이 움직인다고 하기에는 다소 낯설고 황당한 면도 있었지만, 그 자체를 드라마만의 독특한 분위기로 전환해내곤 했다.

콘텐츠 강국 미국은 아예 거대 자본과 인력을 동원해 만화를 영화로 변형하는 공고한 시스템을 확립했다. 내로라하는 각색가들이 머리를 맞댄 결과, 오늘날 대다수 만화 원작 영화는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모든 콘텐츠 생산자들의 꿈이라 할 수 있는 원 소스 멀티 유즈(OSMU·One Source Multi Use)는 말 그대로 꿈이다. 누군가는 꿈을 이루고 누군가는 꿈을 스스로 저버린다. 원작을 영화나 드라마로 만드는 과정이 애초에 상당 부분 기획자와 제작진에 의해 성패가 갈린다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좋은 만화 원작은 언제나 매력적이다. 하지만 좋은 원작이 모든 것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핵심은 작품을 선점하는 능력이 아니라 좋은 작품을 찾아내는 눈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원작에 대한 철저한 이해다. 이것이 새로운 살을 붙이고 불필요한 살을 떼어내는 영화적 가공 이전에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일이다. 오직 이것만이 다시금 원작의 권위를 넘어 성공에 다다르는 유일한 길이다.

기자명 강상준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