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7일, 예멘 알카에다와 연계된 쿠아시 형제가 풍자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를 습격했다. 내가 읽은 대부분의 칼럼은 〈샤를리 에브도〉의 풍자가 약자를 향한 폭력이라고 말한다. 프랑스 안의 무슬림이 약자인 것은 맞지만, 그 사건은 한 나라에서 계획된 일국(一國)의 범죄가 아니었다. 반미주의자들이 ‘미국은 강하다’고 말하는 반면, 미국의 주류 사상가들은 ‘미국은 약해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슬람이 약자인가, 아닌가’도 상대적이다.

상식이 모자란 사람만 모를 뿐, 하나의 문명권이나 지역의 흥망성쇠를 다룰 때 인구는 반드시 고려되는 상수다. 현재는 이슬람권의 인구가 그들을 강자로 환산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지 않지만, 인구는 언젠가 그들을 강자로 만들어줄 잠재력이다. 서구로 유입되는 무슬림의 증가가 이슬라모포비아(Islamophobia·이슬람 공포증)를 부르고 그것이 유럽의 극우주의로 되먹임되고 있는 게 현실이 아닌가.

우리는 한 사회나 문명이 가진 힘의 총량을 하드 파워(hard power)로만 계산하는 습관에 익숙하지만, 어떤 사회나 문명에서는 소프트 파워(soft power)가 더 위력을 발휘한다. 이슬람은 서구만 한 군사적 하드 파워는 없지만, 강력한 소프트 파워(종교)가 있다. 우리가 무신론을 주장할 수는 있지만, 누구도 한 사회에서 종교가 지니는 규정력을 부인하지는 못한다. 유물론자를 자처하면서 종교를 허구나 마취제 정도로 치부하는 사람을 가리켜 슬라보예 지젝은 관념론자라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21세기의 전쟁이 비대칭 전쟁(Asymmetric warfare)인 것도 중요하다. 9·11 직후에 일으킨 두 개의 전쟁에서 미국은 정복과는 거리가 먼 일시적인 승리를 거두었을 뿐, 탈레반도 알카에다도 뿌리 뽑지 못했다.
 

ⓒ이지영 그림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 직후, ‘관용’이 만병통치약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정작 이런 시대일수록 관용을 의심하면서, 관용의 타락된 사용법을 물리쳐야 한다. 나는 2011년 10월 〈시사IN〉 제216호에서 관용의 타락한 사용법을 두 가지로 정리했다(“명박산성 앞에서 우린 뭘 했던가” 기사 참조). 첫째, 상대방을 아이로 취급하면서 상대방의 환상을 깨지 않으려는 태도. 둘째, 어떤 진리든 진리를 주장하는 것은 모두 폭력이라는 발상에 근거한 조바심. 이런 태도와 발상에서 출발한 타락한 관용은 비판이 꼭 필요한 근본적 차이를 문화적 차이와 생활 방식의 차이로 변질시키고, 스스로를 자기 검열하면서 표현의 올바름에만 신경을 쓴다. 미소 띤 얼굴로 서로 듣기 좋은 덕담만 하는 게 관용이라면, 그 아무도 자신의 신념이나 현상을 바꿀 필요가 없어진다.

관용의 엄격한 사용이 상대를 ‘어른’ 취급하는 것이라면, 관용의 타락된 사용법은 상대를 ‘아이’ 취급하는 것이다. 상대를 아이 취급하지 않고 어른 취급하는 일이나 스스로를 아이가 아닌 어른이라고 생각하는 일에서 찾을 수 있는 윤리적 이점은, 서로에 대한 존중과 자기 책임의식의 배양이다. 내가 당신을 어른 취급할 때, 비로소 나는 당신을 존중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스스로를 어른이라고 생각해야 자신에 대한 책임의식이 생긴다. 이슬람을 아이로 취급하는 서구의 인식론적 폭력이나 이슬람 스스로가

〈관용〉웬디 브라운 지음이승철 옮김갈무리 펴냄

자신을 약자로 자처하는 기만행위 속에서는 그 어떤 존중이나 책임의식도 싹트지 않는다. 이슬람을 약자로 간주하려는 사람은 이슬람에 대한 존중을 내버린 사람이며, 이슬람을 향해 자기 책임의식 따위는 내팽개치라고 선동하는 것이다. 그것은 정치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우리 모두가 타락하는 길이다.

세계화와 세속화에 직면해 앞으로 점점 증가하는 풍자와 조롱을 마주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슬람의 운명이다. 이슬람 율법이 횡행하는 나라에서 여성의 운전과 청바지가 금지되어 있다거나, 여성이 남자 의사의 진료를 꺼리다가 죽어가는 일, 강간을 당한 누이를 남자 형제들이 ‘명예살인’하는 따위의 야만은 충분히 이슬람을 풍자하고 조롱할 근거가 된다. 이슬람은 그때마다 테러로 응수할 텐가? 이슬람이 진정 유서 깊은 역사와 지혜를 간직하고 있다면, 이제껏 길러온 문화의 힘으로 풍자와 조롱에 맞서야 한다.

한국의 진보는 그 테러 사건에 어떻게 접근했나

진보라 일컫는 논객들은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의 총체적 접근에 관심이 없다. 그저 한국 내의 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에 외삽시키고,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을 한국 상황에 필요한 교훈이나 경고로 전유할 생각뿐이다. 그런 목적에서 쿠아시 형제의 테러는 프랑스 내국인 사이에 불거진 계급 문제로 축소되고, 그들의 배후인 이슬람 근본주의는 사건 관계도에서 지워졌다. 이들의 말이 맞는다면, 쿠아시 형제를 지도한 예멘 알카에다는 무려 전 세계의 계급투쟁을 위해 창설된 국제 노동자 연맹이고, 〈샤를리 에브도〉를 급습한 것도 심지어 계급 해방을 위한 거사다. 그렇다면 향후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그들의 승리 속에 무슬림이 아닌 서구 백인이나 아시아계 프롤레타리아트도 기입될 수 있다고 기대해도 좋은가? 그게 아니라면, 쿠아시 형제의 범죄는 인종차별에 맞선 또 다른 인종차별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의 진보 논객들이 참극을 맞은 〈샤를리 에브도〉를 한 번도 ‘표현의 자유’라는 가치로 옹호하지 않았던 진짜 이유는, 위에서 지적한 외삽과 전유가 매끈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샤를리 에브도〉가 절대 언론사가 되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진보 논객들에게 〈샤를리 에브도〉는 새누리당이고 재벌이고 10%여야만 했고, 쿠아시 형제는 비정규직 노동자이고 실업자며 90%를 뜻해야만 했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더니, 프랑스 파리에서 생긴 사건은 이렇게 해서 ‘월드 뉴스’가 아닌 ‘대한 늬우스’가 되었다.

웬디 브라운의 〈관용〉(갈무리, 2010)은 관용이 더 이상 수동적인 가치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린 이 시대의 필독서다. 서구가 주도하는 다문화 시대의 관용이란, ‘자신은 바꾸지 않으면서, 타자를 배제’하는 수단에 이용된다. 이때 포용과 배제를 정하는 관용의 기준은 서구의 지배적인 가치와 문화다. 또한 관용은 당면한 여러 정치·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가 자기 내부에서 분출하는 정치·사회적 적대를 ‘차이’의 문제로 치환하면서 근본적인 해결을 회피하는 전략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지금까지 이 주제의 막강한 고전이었던 볼테르의 〈관용론〉(한길사, 2001)이나 필리프 사시에의 〈왜 똘레랑스인가〉(상형문자, 2000)는 낡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해독(害毒)이 필요한 문서로 보인다. 우려되는 것은, 관용이 다문화 제국의 새로운 통치 전략이라는 이 책의 논지를 너무 잘 수용한 나머지 관용의 타락한 사용법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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