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교육 수준의 경우, 조사 대상자 본인들의 할아버지 세대와 아버지 세대의 ‘상관계수’가 0.656으로 나타났다. 상관계수는 양측(예컨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상관관계를 나타내는 수량적 지표인데, 1에 가까울수록 양측이 비슷한 행태를 보였다고 생각하면 된다. 교육 수준에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상관계수가 1에 가까웠다’는 것은 조사 대상자들의 할아버지가 고학력(저학력)이면 아버지도 고학력(저학력)인 경우가 많았다는 얘기이므로 ‘학력의 대물림’이 강하게 나타났다는 의미다. 이 ‘학력 대물림’의 상관관계는 아버지와 조사 대상자 본인 사이에서는 0.165로 급격히 낮아졌다가 ‘본인과 아들’ 간에는 다시 급격히 높아져 0.398을 기록한다. 한마디로 ‘학력 대물림’이, 할아버지-아버지-본인-아들로 이어지는 세월 동안, 상당히 높은 수준에서 크게 완화되었다가 다시 강해지는 ‘U’자형 곡선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세대 간 계층 이동의 중단’ 혹은 ‘닫힌 사회’는 한국 사회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불평등의 대가〉에서 미국 사회 역시 계층 이동이 불가능한 사회가 되어버렸다고 평가한다. 하위 계층의 자녀들은 성장해서도 대부분 하위 계층에 머물고, 상위 계층의 자녀들 역시 압도적인 확률로 같은 지위를 유지한다는 이야기다. “학업성취도가 높은 빈곤층 자녀는, 학업성취도가 낮은 부유층 자녀보다 대학을 졸업할 확률이 낮다. 전자가 설사 대학을 졸업한다 해도 후자보다 훨씬 가난하게 사는 수가 많다.”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21세기 자본〉에서, 향후 사회적 불평등이 증가하면서 ‘세습 자산’의 역할이 커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불평등이 세대를 내려가며 더욱 강화되어, 자본주의를 점차 세대 간 계층 이동이 불가능한 ‘닫힌 사회’로 퇴행시킨다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결정하는 사회다. 한국에는 프랑스를 굉장히 멋진 나라라고 생각하는 지식인들이 많지만, 실제로 이 나라의 부(富)에서는 상속 자산 비중이 3분의 2에 이른다. 당대의 시민들이 땀 흘려 일해서 새롭게 창출한 ‘부’는 전체의 3분의 1에 불과하다. 피케티는 이 같은 불평등이 지속된다면 2050년쯤 프랑스에서 상속 자산이 전체 부(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90%에 도달하리라고 예측한다. 한마디로 상속을 많이 받은 사람만이 잘사는 사회다. 선진 민주주의 국가의 상징으로 간주되는 프랑스 같은 나라마저 점차 ‘19세기의 귀족사회’로 퇴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세습사회의 기미가 갈수록 뚜렷해지고 있는 현대 자본주의에서 ‘교육’의 의미는 무엇일까? 고도성장기의 한국에서 교육은 ‘계층 이동의 사다리’였다. 전후의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두 나라 모두에서 노동자 계급과 빈곤층의 자녀들이 대학까지 진학해서 중산층으로 성장했다. 드물지만 상류층으로 진입하기도 했다. 교육은 사회 계층 간에 드리워진 장벽을 깨뜨리는 수단이었다.
중산층 자녀들이 ‘능력주의 신화’에 빠지는 이유
그러나 세습사회에서 교육의 역할은 180° 바뀌고 만다. 상위 중산층과 부유층 등 상속할 자산을 가진 ‘잘사는 사람’들만이 자녀들에게 질 높은 교육을 제공할 수 있다. 자녀 세대에 ‘교육’을 세습함으로써 더 좋은 직장과 더 많은 노동소득을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하버드 대학 재학생 부모의 평균소득은 43만 달러(약 4억7000만원)다. 피케티에 따르면, 교육은 계층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이 아니라 ‘중산층 세습 수단’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앞에 나온 KDI 자료는 이제 대중도 그와 같은 현실을 자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교육’은 이미 계층 이동의 수단이 아니다. ‘부의 세습 수단’이라 부르는 것이 오히려 정당한 어법일 터이다. 이 냉정한 현실을 인정할 때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실질적인 길도 모색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