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이 출범했다. 민변 창립 멤버인 김선수 변호사는 노동·인권·공안 사건 등 현대사의 중요한 장면마다 법정에서 변론을 해왔다. 〈시사IN〉은 김 변호사의 ‘법정에서 본 현대사’를  격주로 연재한다.
첫 번째 편은 형사소송절차를 한 걸음 진보시킨 대법원 판결을 이끌어낸 ‘민미련 간첩 조작 사건’이다. 간첩죄의 법정형은 사형 또는 무기징역이다. 조작 사건임을 알고도 재판부는 무죄를 선고하지 못했다. 그래서 유죄를 인정하며 선고할 수 있는 최저형인 7년을 선고하곤 했다. 이를 뒤집은 대법원 판결이 1990년에 있었다.

1989년 결성된 민미련은 ‘민족해방운동사’라는 대형 걸개그림을 제작해 전국은 물론 평양에도 전시했다. 위 그림은 민족해방운동사 중 광주민중항쟁 부분.

1987년 6월항쟁과 7~8월의 노동자대투쟁 때 나는 사법연수원생이었다. 1988년 3월 변호사 업무를 시작했다. 그해 5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이 출범했고, 나는 창립 멤버 51명에 이름을 올렸다. 1989년 신참 변호사였던 나는 민족화가들과 인연을 맺었다. 젊은 화가들이 ‘민족민중미술운동전국연합 건설준비위원회’(약칭 ‘민미련 건준위’)를 만들었다. 이들은 ‘민족해방운동사’라는 대형 걸개그림 11쪽을 제작해 전국 순회 전시를 했고 슬라이드를 제작해 평양에서 개최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약칭 ‘평양축전’)에 보내 전시했다. 공안 당국은 민미련 건준위를 이적단체로 보고 수사에 나섰다.  

그해 8월 초 차일환씨가 최익균씨(필명 최열·미술평론가)와 함께 사무실로 찾아왔다. 화가 홍성담씨가 7월31일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소속 수사관들에게 연행되어 안기부에서 수사를 받고 있는데 변론을 맡아달라고 했다. 8월4일 차일환씨마저 안기부에 연행되었다. 그는 집에서 연행되었는데, 연행되면서 부인(남규선씨)에게 바로 나에게 연락하라고 했다.

공안정국 한복판이었다. 1989년 6월30일 대학생 임수경씨가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약칭 ‘전대협’) 대표 자격으로 평양축전에 참가한 뒤 정국 분위기는 험악할 대로 험악해졌다. 안기부는 불법 연행과 불법 구금, 고문과 가혹행위, 심지어는 변호인 접견 거부까지 수사 과정에서 불법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행했다. 먼저 남산에 있는 안기부로 가서 본인들을 접견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1989년 8월12일 가족들과 함께 홍성담씨와 차일환씨를 접견하러 안기부로 갔다. 안기부에는 변호인 접견실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안기부 정문에 있는 주자파출소에 가서 접견 신청을 하고 기다리면, 담당 수사관이 피의자를 데리고 나와 주자파출소에서 접견을 하게 해주든가 아니면 접견 불가를 일방적으로 통고하고 들어가 버리기 일쑤였다. 홍성담씨에 대해서는 접견을 허락할 수 없고, 차일환씨에 대해서는 차후에 날짜를 잡아 연락할 테니까 그때 접견을 하라고 했다. 가족들로 하여금 변호인 접견이 거부되는 상황에 대한 사실확인서를 작성하도록 하여 그다음 날 바로 접견 거부 처분에 대한 준항고장을 서울형사지방법원에 제출했다.

1989년 8월17일 오전 11시30분쯤 차일환씨를 부인 남규선씨와 차씨 부모와 함께 중부경찰서에서 접견했다. 안기부 수사관 3명이 접견 장소에 동석해 감시했다. 수사관이 변호사의 접견 장소에 동석해 접견 내용을 듣거나 기재하는 것은 변호인 접견의 비밀을 침해하는 것으로서 위법이다(후에 조용환 변호사가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제기하여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침해하는 것으로서 위헌”이라는 결정을 받았다).

남규선씨가 차일환씨 바로 옆에 앉아서 아이를 사이에 두고 수사관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고 또 차일환씨의 팔쪽 옷을 들추어보고 하는 것이 보였다. 남규선씨가 남편이 고문을 당하지 않았나 하는 것을 묻고 그것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수사관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자 수사관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했다.

남규선씨는 차일환씨와의 대화를 통해 차일환씨가 ‘민미련 건준위에서 주체사상을 학습했고 주체사상의 신봉자라는 사실, 또 북한으로부터 자금과 지령을 받아 ‘민족해방운동사’를 작성했다는 사실’을 자백하라는 강요를 받으면서 무수한 구타와 잠 안 재우기 등 고문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차일환씨는 고문 수사관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안기부 수사관 김군성·이일회 등이 8월4일 “홍성담으로부터 자금을 받았다”라고 허위 진술할 것을 강요하면서 두 주먹으로 얼굴과 머리를 무수히 구타해 코피까지 흘렸다고 한다. 안기부 수사관 김군성은 8월16일 “네 사상이 뭐냐”고 하면서 수도로 차씨의 목을 무수히 쳤다.

ⓒ연합뉴스평양축전에 참가했던 임수경씨(가운데)가 1989년 8월15일 판문점을 통해 돌아왔다.

남규선씨는 이 내용을 언론사에 알렸고, 다음 날인 1989년 8월18일 〈한겨레신문〉에 위 사실이 보도되었다(남규선씨는 이 사건을 계기로 민가협 활동을 시작해 민가협의 중추 구실을 수행하다가 국가인권위원회 일꾼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진짜 고문 맛을 보여주겠다”

8월18일자 〈한겨레신문〉에 차일환씨 고문 사실이 보도되자, 안기부 수사관들은 “어차피 고문 수사로 낙인찍혔으니 진짜 고문 맛을 보여주겠다”라면서 고문을 자행했다. 차일환씨에게 두 발을 침대 위에 올려놓고 머리를 땅바닥에 박고 두 손을 등 뒤로 얹는 자세를 취하게 한 뒤 5분간 주먹과 발로 양 옆구리를 30여 회 차고 때려 차씨의 온몸은 멍이 들었다.

외부와의 연락이 완전히 차단된 홍성담씨는 차일환씨보다 훨씬 심한 고문을 당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안기부의 수사가 끝나 검찰로 송치되고 이틀 후에야 홍성담씨에 대한 접견 거부에 대해 취소 결정이 났다. 홍성담씨를 서울구치소에서 접견했다. 안기부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문을 당했고, 북한에 가서 간첩교육을 받았다고 자백하기도 했다는 말을 들었다. 안기부는 검찰로 송치하면서 의견서를 10여 통 이상 작성해 여기저기에 보내고 수사검사는 안기부로부터 받은 의견서를 가위로 오려가면서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했다고 한다.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에서 일반적으로 발생하는 사태가 그대로 재현되었다.

<한겨레신문>에 차일환씨 고문이 보도되자 수사관들이 보복했다(오른쪽·8월26일자). 왼쪽은 홍성담씨가 그린 고문 수사관들의 몽타주(11월9일자).

당시 안기부의 수사 방식은 수사관 2명이 한 팀을 이루어 24시간 맞교대로 두세 팀이 고문 수사를 하는 식이었다. 홍성담씨는 고문을 또렷이 기억했다. 안기부 수사관들은 ‘북한을 방문했다’고 자백할 것을 강요하면서 옷을 모두 벗기고 무릎을 꿇린 후 구둣발로 무릎과 정강이를 수십 회 차고 주먹으로 얼굴과 머리를 무수히 때렸다. 8월13일 아침 10시께는 군용 야전침대목으로 손바닥을 30여 회, 머리를 10여 회 때렸다. 손이 새파랗게 멍들었다. 8월18일 밤 8시께 안기부 수사관들은 ‘북한 공작원을 만났다’고 자백하라면서 주먹으로 얼굴을 때리고 양손으로 양쪽 귀를 비틀고 잡아당겼다. 홍씨의 왼쪽 귀가 찢어졌다.

홍성담씨는 고문한 수사관들 몽타주를 그릴 수 있다고 했다. 그는 구치소에서 안기부 수사관 2명의 몽타주를 그렸고, 나는 접견실에서 이를 넘겨받았다. 나는 홍성담씨가 그린 몽타주를 보고 그 섬세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천생 화가였다. 1989년 11월 초 재판을 시작하기 전에 몽타주를 첨부해 고문한 수사관들과 안기부의 수사 발표자를 고소했다.

조영래·윤종현 변호사와 상의하고 김근태씨 고문사건에서 변호인들이 제출했던 증거보전 청구 자료들을 검토한 뒤 증거보전 청구서를 서울형사지방법원에 제출했다. 뜻밖에도 서울형사지방법원 임채균 판사가 증거보전 청구를 받아들였다. 감정 결과 홍성담씨 오른쪽 무릎과 정강이 그리고 왼쪽 귀에 손상이 남아 있는데, 이는 2주 내지 6주 전에 생긴 손상으로 오른쪽 무릎이나 정강이의 손상은 홍성담씨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구둣발로 차이거나 둔기로 맞아 생길 수 있는 손상이고, 왼쪽 귀 손상 역시 홍성담씨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손으로 귀를 잡아 비틀면서 손톱에 의해 생길 수 있다는 것이었다. 홍성담씨가 고문을 받았다는 주장이 진실이라는 것을 뒷받침했다.

안기부 대공수사국장 정형근(후에 국회의원을 지냄)은 1989년 9월8일 9시30분 정부종합청사 대회의실에서 임수경씨 방북사건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안기부는 홍성담씨를 북한의 대남공작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의 해외공작 전위조직인 재유럽민족민주운동협의회(약칭 ‘유럽민협’)의 국제부장 성낙영에 의해 포섭된 간첩이라고 했다. 언론에는 홍성담씨를 성낙영씨 밑에 ‘간첩’이라고 표시한 체계도가 게재되었다. 재판을 받아보기도 전에 이미 간첩으로 낙인찍힌 것이다. 안기부의 수사 발표는 공판 청구 전 피의사실 공표로, 형법 제126조에 위반되는 범죄행위였다.

ⓒ연합뉴스정형근(위) 당시 안기부 대공수사국장은 후에 한나라당 소속 국회의원을 지냈다.

재판 준비를 하면서 초점을 맞춘 것은 과연 홍성담씨와 접촉한 성낙영씨가 북한 공작원인가, 또 성낙영씨의 소개로 독일에서 북한 공작원 김평원을 만난 사실이 있는가, 그리고 귀국 후 성낙영씨로부터 활동자금 명목으로 돈을 받았는가, 또 성낙영씨에게 국내 정세에 관한 책을 보내준 것이 간첩행위에 해당되는가 하는 점이었다. 성낙영씨가 항소심 재판 과정 중 미국에서 공증해 보내준 진술서에 따르면, 성씨는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에서 성서신학을 공부했다. 1981년 11월27일 미국으로 유학해 신학 공부를 계속했고, 신학의 본고장인 독일에서 박사과정을 밟기 위하여 1984년 7월25일 서독으로 유학을 갔다. 서독 괴팅겐 대학 신학부에서 1989년 3월 말까지 신학을 공부했으며, 북한을 방문하거나 북한 사람을 만나본 사실조차 없었다. 성씨는 자신을 북한의 공작원이라고 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날조라고 주장했다.

홍성담씨는 안기부에서 고문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북한 공작원 김평원을 가공으로 만들어 진술했다. 김평원이라는 이름은 홍성담씨가 우리나라의 가장 흔한 성씨인 ‘김’과 독일의 ‘평원’지대에 인상을 받아 지었다고 한다.

나는 검찰의 제1회 피의자신문조서의 증거능력을 부인하고자 수사 과정에서의 불법을 집중 지적했다. 변호인 접견 거부에 대한 준항고 기록과 홍성담씨의 상처에 대한 증거보전 청구기록에 대해 서증조사를 신청해 그 기록을 모두 재판부에 제출했다. 홍씨를 수사한 안기부 수사관 2명을 증인으로 신청했으나, 이들은 끝내 출석하지 않았다.

사법연수원 교수들이 뽑은 10대 판결

1990년 1월30일 선고된 1심 판결은 간첩 부분을 포함해 대부분의 공소사실을 유죄로 인정하고 7년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법조계에 전해져 내려오는 말에 “7년짜리 간첩은 조작된 간첩이다”라는 말이 있다. 진짜로 간첩이 조작되지 않고 유죄라고 한다면 중죄를 선고하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조작 사건의 경우 재판부도 심리 과정을 통해 조작되었다는 것을 알지만 감히 무죄선고를 하지는 못해 유죄를 인정하고 선고할 수 있는 최저형인 7년을 선고한다는 것이다. 간첩죄의 법정형은 사형 또는 무기징역이나, 무기징역에 대하여 작량감경(정상참작)을 하면 최저 7년까지 선고할 수 있다.

항소심 판결(서울고등법원 1990년 6월1일 선고 90노1022호) 역시 구속 만기를 꽉 채우고 선고되었다. 결과는 쌍방 항소기각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대법원의 판단밖에 없었다. 전망은 비관적이었다. 대법원에 가서 결과를 바꾼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는 변호사인 나뿐만 아니라 홍성담씨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거의 체념 상태에서 상고를 하게 되었다. 검찰도 관성에 따라 상고를 제기했다.

상고심 판결(1990년 9월25일 선고 90도1586 판결)도 구속만기가 거의 다 되었을 때 선고되었다. 주심은 이회창 대법관이었다. 자포자기 상태에서 주심 대법관을 보고 혹시나 하는 가느다란 기대를 완전히 끊지 않고 조마조마 선고 결과를 기다렸다. 천만 뜻밖에도 독일 방문 과정과 성낙영씨와 관련된 모든 부분에 대해 파기환송 판결이 선고되었다.

대법원 판결의 취지는 “성낙영이 피고인의 면전에서 가끔 김일성을 주석으로 호칭하거나 북한의 음악을 찬양하는 언동을 했다고 하여 이것만으로 곧 성낙영을 북한의 지령을 받아 활동하는 자로 인식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것이다. 검사 상고와 관련하여 대법원은 변호인의 접견권이 제한된 상태에서 얻어진 피의자신문조서의 증거능력에 대해 중요한 판단을 했다. 대법원은 “변호인의 접견교통권 제한은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으로서 그러한 위법한 상태에서 얻어진 피의자의 자백은 그 증거능력을 부인하여 유죄의 증거에서 배제하여야 하며, 이러한 위법 증거의 배제는 실질적이고 완전하게 증거에서 제외함을 뜻하는 것이다”라며 제1회 피의자신문조서의 증거능력을 부인했다. 이 같은 판시 내용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당시 대공수사부나 안기부 또는 기무사 등 대공수사기관들이 변호인의 접견조차 대담하게 거부한 데 대해 경종을 울렸다.   

‘홍성담 사건’과 관련한 대법원 판결은 형사소송 절차를 한 걸음 진보시킨 것으로 평가받는다. 당시 주심은 이회창 대법관(오른쪽에서 두 번째)이었다.

대법원 판결로 홍성담씨는 간첩 부분 등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때 기쁨은 이루 표현할 수 없었다. 도저히 불가능한 일로만 여겨지던 일이 현실이 된 것이다. 그런데도 파기환송 재판장은 이러저러한 이유를 장황하게 열거하면서 홍성담씨에게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검사가 상고했으나, 1991년 5월24일 상고기각 판결(대법원 91도738호)이 선고됨으로써 홍성담씨에 대한 모든 재판이 종료되었다. 1989년 7월 말에 연행되어 1년10개월여에 걸친 재판의 긴 장정을 마친 것이다. 그 후 홍성담씨는 나머지 기간을 복역한 후 만기 출소했다.

사법연수생 자치회에서 발행하는 회지 〈사법연수〉 제19호(1996년 8월 발행)에는 사법연수원 교수들이 뽑은 10대 판결이 게재되어 있는데, 그중에 홍성담씨 사건의 대법원 판결이 포함되어 있다. 선정 이유는 “변호인의 접견교통권을 헌법상의 권리 차원으로 격상시키고 위법수집증거 배제 법칙의 채택 가능성을 시사하는 등 우리 형사소송 절차를 한 걸음 진보시킨 판결”이라는 것이다.

기자명 김선수 (법무법인 시민·변호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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