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은 비닐 팩에 담겨 있었다.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회색 줄무늬 내의, 청바지, 남색 남방, 검정 바람막이가 마구잡이로 절개돼 있었다. 응급실에서 옷을 벗기지 않고 잘라서 제거한 탓이다.

백도라지씨(34)는 돌려받은 남색 남방을 알아봤다. 지난해 10월, 도라지씨가 아버지에게 준 생신 선물이었다. 등산화는 어버이날 준 선물이었다. 파란색 나일론 조끼에는 ‘가자! 11월14일 서울로! 밥쌀용 쌀 수입 반대-보성군농민회’라고 적혀 있었다. 물대포를 맞은 옷에서는 캡사이신과 최루액이 섞인 지독한 냄새가 났다. 나중에 경찰과 검찰 조사 때 증거로 내기 위해, 도라지씨는 옷을 세탁하지 않았다. 베란다에 걸어놓고 말렸다.

ⓒ시사IN 이명익옷은 비닐 팩에 담겨 있었다.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회색 줄무늬 내의, 청바지, 남색 남방, 검정 바람막이가 마구잡이로 절개돼 있었다.

주머니를 뒤지니 꼬깃꼬깃 접힌 1만원권 두 장과 묵주가 나왔다. 천주교 신자인 백남기씨가 항상 지니고 다니던 묵주였다. 도라지씨는 냄새를 없애기 위해 묵주를 여러 번 비눗물에 닦아냈다. 이 묵주는 동생 민주화씨(30) 손에 채워졌다. 민주화씨가 네덜란드로 돌아가며 묵주를 차고 갔다. 민주화씨에게 묵주는 아버지의 분신이다. 민주화씨는 아버지의 묵주를 쥐고 기도한다.

민중총궐기에 참석했다가 물대포에 맞아 쓰러진 백남기씨가 80일째(1월25일 기준) 의식불명 상태다. 뇌파가 잡혀 뇌사 상태는 아니지만 뇌뿌리와 대뇌 절반 이상이 손상됐다. 인공호흡기 등 의료기기의 도움 없이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의료진은 남은 시간을 6개월에서 1년 정도로 예상했다.

그날 이후 도라지씨의 삶도 바뀌었다. 6년간 다니던 회사를 휴직했다. 오전 9시와 저녁 6시, 출퇴근 시간에 맞춰졌던 일상은 오전 10시30분과 저녁 8시, 중환자실 면회 시간 기준으로 돌아간다. 30분간 짧은 면회 시간에 그는 아버지에게 수다를 떤다. “빨리 일어나, 이렇게 누워 있으면 허리 아파서라도 일어나겠다.” 반응이 있는지 보려고 허리춤도 꼬집어본다. 그러나 “세상에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내 큰딸”이라고 도라지씨를 불렀던 아버지는 답이 없다.

80일 동안…아무도 사과하지 않았다

백남기씨는 공약을 지키라고 요구하기 위해 민중총궐기에 참가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 당시 한 가마니(80㎏)에 17만원인 쌀값을 21만원으로 올리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쌀 한 가마니 값은 오히려 15만원으로 떨어졌다. 백씨는 겨우내 자라는 밀을 심어두고 보성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시사IN 이명익지난해 12월19일 3차 민중총궐기에 참여한 시민들에게 도라지씨(왼쪽)와 민주화씨가 인사하고 있다.

사건 당일 제일 먼저 병원에 도착한 사람은 서울에 사는 도라지씨와 남편이었다. 도라지씨는 “물대포에 맞았으니 많이 젖었겠구나 생각했지, 의식 없이 사경을 해맬 줄은 상상도 못했다”라고 당시를 떠올렸다. 아버지를 도와 농사를 짓던 아들 두산씨(32)는 어머니와 밤새 고속버스를 타고 보성에서 올라왔다. 민주화씨는 아들 지오와 남편, 네덜란드인 시부모와 한국에 들어왔다. 지난해 12월, 손자 지오는 중환자실에 있는 할아버지를 만나지 못하고 한국을 떠났다. 얼마 뒤 민주화씨도 어린 아들이 있는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세 살 지오와 백남기씨는 ‘절친’이었다. 지난해 6월, 1년 만에 한국을 찾은 손자를 깜짝 놀라게 해주기 위해 백씨는 새끼손톱에 파란색 네일아트를 받았다. 백씨는 이제 막 뛰어다니기 시작한 손자와 장구를 두드리고 베개로 장난을 쳤다. 할아버지의 작은 장난에도 지오는 까르르 웃어댔다. 백씨는 손자가 다녀간 뒤로 매일 자신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네덜란드로 돌아간 지오는 레고에서 머리카락 색이 하얀 인형을 찾아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민주화씨는 자기 전 “할아버지가 보고 싶다”라고 말하는 지오를 보며 바닥에 엎드려 소리 없이 울었다. 민주화씨는 1월27일(현지 시각)부터 1인 시위를 시작했다. 로테르담 국제영화제 기간을 맞아 관광객으로 붐비는 로테르담 중앙역에서 오후 4시부터 7시까지 직접 만든 팻말을 들고 시위를 한다. 물대포에 맞아 쓰러진 백남기씨 사진 밑에는 ‘아버지가 경찰의 물대포에 의해 쓰러진 후 여전히 의식이 없다. 정부의 사과도 전혀 없었다.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은 반드시 사과해야 한다’는 영어 문구를 썼다. 지나가던 시민들은 한국에서 일어난 일이 맞느냐며 놀라워했다. 1인 시위를 지켜보던 네덜란드 경찰은 “같은 경찰로서 정말 미안하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백남기씨(오른쪽)와 손자 지오는 ‘절친’이었다. 그러나 지오는 중환자실에 있는 할아버지를 보지 못하고 네덜란드로 돌아가야 했다.

백씨가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80일 동안, 경찰과 정부의 사과는 없었다. 진상조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구은수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은 사건 하루 뒤인 11월16일 “경찰 살수차 운용은 전반적으로 문제가 없었다”라고 말했다. 지난해 11월23일 강신명 경찰청장은 국회 현안보고에서 “결과가 중한 것만 가지고 무엇이 잘못됐다, 잘됐다고 말하는 건 이성적이지 못하다”라고 말했다.

백남기씨 가족은 전국농민회총연맹, 가톨릭농민회 등 농민단체와 함께 지난해 11월18일 경찰 관계자들을 살인미수(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고발했다. 피고발인은 강신명 경찰청장, 구은수 전 서울지방경찰청장 등 총 7명이다. 고발 이후 두 달이 지났지만 검찰은 기소 여부도 결정하지 못했다. 도라지씨는 “만약 교통사고였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이미 사고 낸 사람은 처벌을 받고 보험사를 통해서 보상도 다 이뤄졌을 거다”라고 말했다. 가족 고발을 대리한 박주민 변호사는 “사안의 중대성과 통상적인 수사 진행 속도를 고려했을 때 기소 결정이 굉장히 늦어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사이 집회·시위를 현장에서 관리했던 서울경찰청 담당자들은 지난해 12월 정기 인사에서 대거 승진했다.

도라지씨는 1월11일에 충남 홍성지원에서 살수차 블랙박스 영상을 확인했다. 물대포 상단에 설치된 카메라로 찍은 영상이다. 살수 조작 요원은 내부에 설치된 모니터로 이 영상을 보며 물대포를 조종한다. 경찰은 백남기씨가 넘어진 것을 보지 못했다며 시위대를 해산하기 위한 목적으로 살수를 했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도라지씨는 “아빠를 쏘고 잠시 이동했다가 다시 아빠 쪽으로 왔을 때 아빠가 바닥에 누워 있고 다른 분들이 구조하러 오는 모습이 보인다. 분명히 조준했다”라고 말했다. 반면 경찰 측 참관인으로 나온 서울지방경찰청 박창환 경비3계장은 “충분히 보인다는 것은 가치 판단의 문제”라며 확답을 회피했다.

ⓒ백민주화씨 페이스북네덜란드로 돌아간 둘째 딸 민주화씨가 1월27일부터 로테르담 중앙역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백씨가 손꼽아 기다리던 ‘칠순 여행’

백씨가 입원한 서울대병원에는 그를 기억하는 이들이 함께하고 있다. “같이 올라왔으니 같이 내려가야 한다”라며 보성군 이웃과 가톨릭농민회 회원들이 천막 농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매일 오후 4시에는 이곳에서 ‘백남기 임마누엘 쾌유 기원 미사’가 열린다. 도라지씨는 “아무 연고도 없는데 병실로 찾아와 울고 가시는 분들이 있다. 이런 분들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라고 말했다.

1990년대 초, 농활로 마을을 찾았던 서울대 의대 졸업생들도 중환자실 앞을 찾았다. 이제는 모두 의사나 교수가 된 이들은 중환자실에 들러 백남기 ‘이장님’의 안부를 묻기도 했다. 한 의사는 농활 갔을 때 찍은 사진을 도라지씨에게 전해줬다. 사진에는 젊은 백남기씨와 어린 삼남매가 찍혀 있다. 전남 보성군 웅치면 마을 주민들은 백씨네 몫까지 김장김치를 담갔다. 보성역 앞에도 천막 농성장이 차려져 쾌유를 기원하는 촛불집회가 이어지고 있다.

백남기씨는 중환자실에서 해를 넘겼다. 백씨는 올해 우리 나이로 일흔, 10월 칠순을 맞아 네덜란드 여행 계획을 세웠다. 둘째 딸 민주화씨네를 처음 찾아가는, 백씨로서는 손꼽아 기다린 여행이었다. 그 여행은 이제 기약이 없다.

기자명 김연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u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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