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 백남기씨(69)가 즐겨 부르던 노래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이 방송차에서 흘러나왔다. 도보순례단은 백씨의 애창곡을 따라 부르며 1번 국도 천안 구간을 걸었다. 누런 논밭과 회색빛 아스팔트를 배경으로 초록색 조끼 행렬이 도드라졌다. 방송차 뒤에 걸린 사진 속에서 백씨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백씨의 미소가 순례단을 이끌었다.

지난해 11월14일 민중총궐기에 참석하기 위해 전남 보성을 떠나 서울로 올라간 백씨는 100일이 넘도록 귀가하지 못하고 있다. 물대포에 맞아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백씨를 대신해 후배 농민과 시민들이 길을 나섰다. 2월11일 전남 보성을 출발한 도보순례단은 백씨가 갔던 길을 따라 2월27일 4차 민중총궐기가 열리는 서울로 향했다. 16박17일간 400㎞, 천 리 길을 걷는 여정이다. 〈시사IN〉은 2월22일부터 24일까지 2박3일간 도보순례단과 함께 걸었다.

ⓒ시사IN 조남진농민 백남기씨의 혼수상태가 103일째로 접어든 2월24일 도보순례단이 경기도 평택을 출발해 서울로 향하고 있다.

전국농민총연맹(전농)·가톨릭농민회·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이 주축이 된 백남기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는 1월부터 백남기 국가폭력 규탄 도보순례를 준비했다. 조병옥 전농 사무총장은 “절박한 심정”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사과도, 책임자 처벌도 외면하는 가운데 백남기씨는 점점 사람들 기억 속에서 잊혀가고 있다. 수사도 진전이 없다. 백씨의 딸 백도라지씨와 농민단체가 지난해 11월18일 강신명 경찰청장, 구은수 전 서울지방경찰청장 등 경찰 관계자 7명을 고발했지만 고발인 조사만 이루어졌을 뿐이다. 최석환 대책위 사무총장은 “정부가 초기에는 잘못을 부인하더니 이제는 아예 반응조차 보이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도보순례 12일째인 2월22일, 충남 공주를 떠난 순례단은 세종시를 거쳐 천안에 다다랐다. 백씨가 물대포에 맞아 쓰러진 지 101일째 되는 날이다. 오후 일정을 시작하는 세종시 소정면사무소에서 한살림 천안아산 회원들이 우엉차·감자차·삶은 달걀·홍삼차 등 간식을 준비해 순례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순례단이 지나는 지역마다 지역 농민회와 시민사회가 식사와 숙박을 책임져주고 있다. 서울로 향하는 길을 농심(農心)과 민심이 닦은 셈이다.

소정면사무소에서 천안고속터미널까지 12㎞를 걷는 오후 일정에 참가한 인원은 45명이었다. 대부분 충남 지역 농민회 회원들이다. 전국농민회·전국여성농민회·공주농민회·예산군농민회·천안농민회·부여군농민회 깃발이 선두에서 펄럭였다. 1차 민중총궐기에서 백남기씨를 겨누었던 경찰이 이번에는 길잡이가 됐다. 경찰 가이드를 따라 순례단은 1번 국도의 1개 차선을 따라 걸었다.

짧은 휴식 시간에 참가자들은 양말을 벗어 땀을 식혔다. 김순애 전국여성농민회 회장은 발이 퉁퉁 부었다. 엄지발톱 옆에는 피딱지가 앉았다. 발에 통증이 심해 잠시 빠져 있던 기간을 제외하고 김 회장은 전남 보성부터 내내 순례단과 걷고 있다. 목적지인 서울까지 함께할 예정이다.

ⓒ시사IN 조남진도보순례단의 선두에서 움직이는 방송차 뒤에 백남기씨가 환하게 웃는 사진이 걸려 있다.

가톨릭농민회 전국 부회장을 맡았던 백남기씨는 농민운동의 대부였다. 특히 ‘우리 밀 살리기’ 운동의 선구자였다. 손영준 가톨릭농민회 사무총장은 “백남기 회장은 사람 챙기는 게 일이라고 할 정도로 단체에서 사람농사를 제일 잘 짓는 분이셨다”라고 떠올렸다.

전북 정읍부터 함께 걷고 있는 농민 한명철씨(35)는 1차 민중총궐기에 참석했다. 2005년 경찰의 강경 진압으로 농민 전용철씨와 홍덕표씨가 죽음에 이르렀던 농민대회 현장에도 있었다. 한씨는 “10년 전과 달라진 게 없다. 농민이 생산한 농산물에 정당한 값을 보장해달라는 요구도 똑같다. 아니 더 나빠졌다. 그때는 대통령이 사과라도 했다”라고 말했다.

천안 시내에 들어오자 참가자들은 시민에게 직접 전단을 나누어주며 선전전을 펼쳤다. 반응이 호의적이지만은 않다. 전단을 받는 사람은 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순례단에게 욕을 하는 사람도 있다. 이날도 한 택시 기사가 “도로교통을 방해하고 시끄럽게 군다”라며 시비를 걸었다.

도보순례 13일째인 2월23일은 수도권인 경기도 평택에 입성하는 날이었다. 천안농민회가 마련한 숙소에서 하룻밤을 묵은 순례단은 몸풀기 체조를 하며 24㎞ 강행군에 대비했다. 오전 9시에 출발한 참가자들이 지쳐갈 무렵 순례단 뒤쪽에서 타악기 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어린 오누이와 아버지가 우리 가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올해 6학년이 되는 임은하양이 꽹과리를, 동생 임동명군(9)이 북을, 아버지 임인출씨는 장구를 쳤다. 경기도 성남시에 사는 이들은 도보순례에 합류하기 위해 아침 7시부터 부산을 떨었다고 했다. 임은하양은 “아빠에게서 백남기 농민 이야기를 들었다. 나 혼자만 집에 편하게 있을 수 없어서 와야겠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오누이는 추위 탓에 빨갛게 언 손으로 연방 북과 장구를 치며 순례단에 에너지를 불어넣었다.

ⓒ시사IN 조남진2월23일 도보순례에 참석한 임인출씨(오른쪽) 가족이 북과 장구, 꽹과리를 치며 순례단에 에너지를 불어넣었다.

“책임자 처벌과 정부 사과 요구하는 도보순례”

최종대씨(80)는 출발부터 순례단의 앞머리를 지키고 있다. 서울에서 온 최씨는 순례단에서 최고령자다. 전남 보성에서부터 하루도 빠지지 않고 걷고 있는 참가자는 그가 유일하다. 최씨는 2월21일 길 위에서 80번째 생일을 맞았다. 곧 팔순인데 어디 가시냐는 딸과 며느리의 만류를 뒤로하고 도보순례에 참가했다. 최씨는 “나는 농민이 아니지만 잘못된 일을 바로잡는 데 힘을 보태야 한다”라고 말했다. 지난해에는 세월호 도보순례에도 참가했다.

미국인 소냐 씨도 이날 하루 순례단과 함께 걸었다. 소냐 씨는 고려대 세종캠퍼스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전남 순천에서 농사를 짓는 친구 이현준씨의 제안으로 순례단에 참가하게 됐다. ‘FARMERS LIFE, FARMERS LOVE’라고 쓰인 피켓을 들었다. 그녀는 “미국 경찰이 흑인을 총으로 쏴서 죽이는 범죄가 떠올랐다. 그런데도 책임을 지는 사람이 없다고 들었다. 농민들을 응원하기 위해, 더 많은 민주주의를 위해 이곳에 왔다”라고 말했다.

오후가 되자 맞바람이 몰아쳤다. 휴식 시간에 몸이 식자 추위가 뼛속을 파고들었다. 참가자들 사이에서 이럴 바엔 계속 걷는 게 낫겠다는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그때 김애자 경북 의성 여성농민회 수석부회장이 나섰다. 김 수석부회장은 이애란의 ‘100세 인생’에 맞춰 율동을 선보였다. 농민회 임원으로서 갈고 닦은 실력이었다. 다른 참가자들도 김 수석부회장의 율동을 따라 했다. 60세에서 시작한 노래가 150세에서 끝날 때까지 몸짓을 따라 하다 보니 어느새 온기가 돌아 한결 따뜻해졌다.

ⓒ시사IN 조남진도보순례단에 참여한 미국인 소냐 씨(위)가 ‘파머스 라이프’라고 쓰인 종이를 들고 있다.

평택에 마련된 숙소는 쌍용차 해고 노동자와 가족들을 위한 심리 치유 공간 ‘와락 센터’였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순례단은 평택 시민들과 간담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최석환 대책위 사무총장은 “공식적으로 ‘쾌유 기원’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기로 했다”라고 말했다. 의학적으로 백남기씨는 의식이 돌아오기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다. 대책위는 하늘에 비는 대신 정부에 요구하는 쪽을 택했다. 최 사무총장은 “도보순례는 쾌유 기원이 아니라 책임자 처벌과 정부의 사과를 요구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경기도 남양주에서 온 이화영씨(가명·59)는 길 위에서 나눈 대화를 들려줬다. “정부가 사과하는 것과 백남기 농민이 깨어나는 것 중에 어떤 게 기적일까,라고 누군가 묻자 ‘둘 다’라는 대답이 나왔다. 그 정도로 암담하다. 도보순례가 참 힘든데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걷는다.”

2월24일 도보순례 14일째 일정을 시작하는 평택역에는 120여 명이 모였다. 평소의 두 배가 넘는 인원이다. 충남농민회 깃발은 이제 경기도 지역 농민회 깃발로 바뀌었다. 평택 시내를 벗어난 순례단이 1번 국도에 들어섰다. 조끼 뒤판에 적힌 ‘민주주의 회복’이라는 문구가 길게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시사IN 조남진2월23일 오후 경기도 평택에 도착한 도보순례단이 평택역 광장에서 촛불문화제를 열었다.
기자명 김연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u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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