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11월13일 근로기준법을 지키라고 절규하며 스스로 불꽃이 된 전태일은 사실 웬만큼 바닥 인생을 끝냈던 재단사였어. 실력과 성실성을 겸비해서 자기 한 몸 먹고살기엔 어려움이 없는 처지였지. 전태일은 자신도 한번 사업을 해봐야겠다고 꿈꾸게 돼. 그러나 공장 키워서 잘 먹고 잘살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 “정당한 세금을 내고, 기계와 다른 인간적인 배움의 적령기에 있는 소년 소녀들에게 합당한 대우를 하고도 사업이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 경제인, 특히 평화시장 사업주들에게 인식시키기 위함이다.”

전태일은 꽤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사업자금만 준비되면 일의 80% 이상을 행한 거나 다름없다”라고 자신할 만큼. 하지만 그에게 사업자금이란 꿈속의 진수성찬 같은 거였다. 그를 믿고 투자해야 할 전주들은 전태일과 완전히 다른 세계 사람이었지. 은행에 담보 잡힐 만한 물건 따위도 가져본 적이 없었고. 여기서 전태일은 이런 결심을 토로해.

“나의 가진 것 중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 즉 한쪽 눈을 사회에 봉사할 것이다. 눈을 사회에 봉사하고 나는 사회의 자금주를 소개받을 것이다.” 세금 정당하게 내고 어린 노동자들에게 인간적이고 정당한 대우를 해주면서도 사업을 성공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자신의 한쪽 눈을 기꺼이 내주겠다고 했던 거야. 그 각오를 칭찬하기에 앞서 아빠는 전태일의 눈에 담겼을 당시의 풍경이 얼마나 참혹했을까를 상상해봐. 사람이 다른 사람의 몸과 인생을 한낱 수익을 올리기 위한 불쏘시개로 다룰 뿐인 모습들이 얼마나 아프게 그의 눈을 찔렀으면 ‘내 눈 한쪽이라도 내겠소’ 하고 토로했던 것일까?

ⓒ전태일재단전태일(뒷줄 가운데)은 어린 노동자들의 비참함을 가장 아파했다. 평화시장에서 시다로 갓 취직했을 당시 동료 노동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

전태일을 가장 아프게 한 것은 ‘소년 소녀들’의 비참함이었다.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들이 돈벌이를 위한 공기알이 돼서 던져지고 치워지고 팽개쳐지는 모습들이 보기에 힘겨웠던 거다. 대통령에게 “공무원의 평균 근무시간 1주 45시간에 비해 15세의 어린 시다공들은 1주 98시간의 고된 작업에 시달립니다”라고 호소했던 편지는 이렇게 끝난다. “절대로 무리한 요구가 아님을 맹세합니다.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요구입니다. 기업주 측에서도 충분히 지킬 수 있는 사항입니다.” 그는 자신의 눈을 팔아서라도 보여주고 싶었던 거야. 기업주가 사람을 조금만 더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당대의 참혹한 현실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전태일이 불꽃으로 지상을 밝히고 사라진 해에 태어난 아빠는 1988년에 대학생이 됐다. 요즘은 대학 진학률이 거의 80%에 달하지만 아빠의 신입생 시절만 해도 대학 진학률은 36.4%에 불과했어. 대학은커녕, 고등학교 진학을 못한 사람도 남녀 각각 10%를 넘었어. 그들은 대개 돈을 벌기 위해 공장으로, 가게로 나가야 했지.

그 가운데엔 1988년 당시 15세 소년 문송면(1973년생)도 있었다. 그의 일기를 잠깐 볼까. “집안이 어려워 고등학교에 갈 수 없다. 하지만 친구들처럼 나도 공부하고 싶다. 산골에서 농사지으며 뼈 빠지게 고생만 하시는 부모님. 자식 공부 못 시키는 부모님 맘이 오죽할까. 서울에는 고등학교 공부시켜주는 공장이 있다는데….”(1987년 문송면의 일기 중)

문송면은 기숙사가 있어서 낮에 일하고 밤엔 공부할 수 있다는 온도계 제조 회사를 택했지. 날이 차면 ‘수은주가 내려갔다’는 표현을 쓰지? 온도계에는 수은이 주요한 재료로 쓰여. 문송면은 온도계에 수은을 주입하는 일을 했고, 기숙사 텃세 때문에 5평 남짓한 작업장에서 잠을 잤다고 해. 수은이 널려 있고 겨울이라 문까지 꼭꼭 닫혀 환기도 되지 않는 작업장에서 말이야. 또래에 비해 키가 크고 건장했던 문송면은 취직한 지 두 달도 안 돼서 이상을 호소하기 시작한다. 두통과 가려움증, 불면 등을 호소했고 몸에 좋다는 한약도 먹었지만 점점 상태는 악화됐지. 1988년 설날, 고향에 내려온 문송면은 눈이 뒤집힌 채 경기를 일으켜.

 

15세 소년 머리카락에 수은이 듬뿍…

친지들은 문송면을 서울의 큰 병원으로 옮겼지만 병명조차 잡아내지 못했다. 순박한 가족들은 의사도 모른다는 괴질을 물리치기 위해 굿판까지 벌였지만 송면이의 병은 차도가 없었어. 결국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는 심경으로 서울대병원에 들렀을 때에야 병의 실체를 알 수 있었지. 수은 및 중금속 중독이었어. 서울대 병원 주치의가 온도계 공장에서 일했다는 말을 듣고 모발을 채취하여 검사한 결과 거기서 수은과 구리가 듬뿍 검출된 거야.

티 없이 건강하던 15세 소년이, 무당도 곡을 할 병에 걸려 시들고, 그 원인까지 과학적으로 규명되었지만, 노동부 서울남부지방 노동사무소는 산재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유는 관련 서류에 사업주의 날인이 없고 ‘서울대학교 병원’이 산재보험 미지정 의료기관이라는 것. 사업주는 “다 멀쩡한데 왜 걔만 수은중독이냐. 시골서 큰 녀석이니 농약 중독 아니냐”라는 식으로 대응했다.

ⓒ일과건강 제공1988년 온도계 공장에서 일하다가 수은중독으로 사망한 문송면(당시 15세)의 노동자장 장면.

 

신문에 나고 여론이 끓어오르는 우여곡절을 거친 뒤에야 직업병이 인정되고 치료도 받게 되지만, 1988년 7월2일 순박한 소년 송면이는 형이 깜박 잠든 사이, 아무도 모르게 외로이 숨을 거두고 말았어. 딱 지금 너랑 같은 또래였다. 공부하고 싶으나 공부할 수 없었고, 열심히 살려 했으나 그 열성이 결국 73년생 소띠 소년의 생을 갉아먹은 것이다. 영안실 바닥을 치며 통곡하던 문송면의 아버지도 끝내 가슴에 판 자식의 무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다음 해 세상을 뜨셨어. 그분이 남긴 말은 “우리 송면이 학교 가야지…”였다고 해.

문송면을 돕던 노동상담사 김은혜씨는 사건이 보도된 뒤 수은중독 증세를 호소하는 노동자들의 전화 폭탄을 받았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전화를 상대하는 와중에 ‘송면이가 죽었다’는 소식이 천둥처럼 끼어들었다는구나. 그만큼 많은 노동자들이 회사 측으로부터 위험성도 통보받지 못한 채로 수은을 다루는 일터에 투입돼왔던 거야.

그로부터 28년 뒤, 아빠는 놀라운 소식을 듣는다. 삼성전자에 휴대폰 부품을 납품하는 협력업체에서 일하던 20대 노동자들이 독성물질인 메틸알코올(메탄올)에 급성중독돼 실명 위기에 놓였다는 거야. 나이 20대라면 인생에서 가장 빛날 때고 또 세상이 가장 아름다워 보여야 할 때야. 그렇게 빛나야 할 이들이 가장 아름다워야 할 세상을 평생 눈에 담지 못할 수도 있는 비극이 21세기 대명천지에 벌어졌다. 대기업이 하청을 준 회사의 ‘파견직’이었으니 그들을 위한 안전시설 또한 미비했을 것이고, 하청업체 사장은 사정없이 단가를 후려치는 대기업 앞에서 안전한 작업환경 따위는 뒤로 제쳐뒀겠지. 결국 전태일이 목 놓아 외친 바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요구”와 “기업주 측에서도 충분히 지킬 수 있는 사항”이 또 한 번 무시되고 만 거란다. 반세기가 지났는데도 말이지.

노동자들의 건강을 지키며 사업할 수 있음을 보여줄 수 있으니 내 한쪽 눈을 가져가라던 전태일의 핏발 서린 눈매, 경기를 일으키며 허옇게 뒤집히던 문송면의 눈, 그리고 별처럼 초롱초롱 빛나다가 하루아침에 블랙홀에 삼켜져버린 나이 스무 살 노동자들의 눈동자 앞에서 대관절 우리는, 우리 사회는 무슨 위로를 할 수 있을까. 어떤 변명을 할 수 있을까.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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