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기업이 한꺼번에 동종 상품을 만들어 출시하면 그 가격이 폭락한다. 공급 과잉에 따른 가격 하락이다. 이런 현상을 막기 위해 경영자들이 몰래 만나 가격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묶어버리거나, 상품의 공급량을 통제하기로 약속하기도 한다. 이른바 ‘담합행위’로, 공정거래위원회의 단속 대상이다. 그런데 국가들이 공공연히 담합하는 경우도 있다. 지난 4월16~17일 카타르 수도 도하에서는 산유국의 에너지 관련 장관들이 모여 공공연하게 ‘담합’을 모색했다.

이 ‘도하 회의’의 의제는 ‘원유 공급량 동결’이었다. 지난 몇 년 동안 원유 가격이 바닥을 모르는 듯 떨어졌기 때문이다.

ⓒ시사IN 자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가가 가장 높았던 시기는 세계 금융위기 직전인 2008년 6월이었다. 배럴당 150달러를 넘어섰다(이하 유가는 서부텍사스유(WTI) 기준). 세계 금융위기가 터지자 배럴당 50달러 이하로 떨어지기도 했으나 2011년 들어 다시 100달러를 돌파했다. 그러나 세계적 불황 조짐이 뚜렷해지던 2014년 6월 배럴당 107.26달러를 정점으로 줄곧 떨어져 도하 회의 직전인 4월8일에는 39.27달러를 기록했다(〈블룸버그 마켓〉). 유가 하락으로 가장 크게 타격을 받은 나라는 산유국들이다. 걸프만을 중심으로 한 중동 국가들과 러시아, 베네수엘라 등은 노동자 임금을 깎는 것은 물론 각종 복지급여까지 크게 삭감했다.

결국 지난 2월 이후 산유국들 사이에서 ‘석유 공급을 통제해서 유가 하락을 막자’는 컨센서스가 이루어졌다. 다만 통제 방법은 생산량 ‘감축’이 아니라 ‘동결’에 머물렀다. 도하 회의의 초안에 따르면, ‘오는 10월까지 석유 공급량을 지난 1월 수준으로 동결하자’는 것이 핵심 의제였다.

산유국 장관들은 세계가 주시하는 가운데 도하에서 10시간 이상 장기 토론을 벌였다. 결과는 ‘결렬’이었다. 4월17일 〈블룸버그〉가 러시아 에너지 장관 알렉산드르 노바크의 발언을 인용해 보도한 바에 따르면, 사우디아라비아가 “이란이 공급량 동결에 참여하지 않으면 어떤 합의도 거부하겠다”라고 선언해버렸기 때문이다.

이슬람권에서 각각 수니파와 시아파의 맹주인 사우디와 이란은 역사적 앙숙으로 지난 1월2일 사우디가 자국 내의 반정부 시아파 유력 인사들을 테러 혐의로 처형하면서 양국 간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다. 처형에 대한 복수로 이란 시위대가 사우디 대사관을 공격하자, 이란 정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단교를 선언했다. 더욱이 이란은 원유 공급량을 동결할 만한 상황이 아니다. 이란은 지난 1월 유엔의 경제제재에서 풀려난 뒤 거의 10년 만에(유엔은 2006년 12월 핵개발 의혹으로 이란에 대한 경제제재 결의안을 채택한 바 있다) 원유 수출을 재개했다. 그래서 제재 이전의 생산능력을 회복하기 전에는 동결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란 대표는 도하 회의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사우디의 실권자인 무하마드 빈 살만 부왕세자는 “이런 식이면 사우디가 하루 100만 배럴을 더 공급할지도 모른다”라며 약을 올리기까지 했다. 사우디는 경제적 이익보다 이란을 압박해서 지정학적 패권을 강화하기를 선호하는 셈이다. 사우디는 하루 1250만 배럴(세계 총 원유 공급량이 하루 8000만 배럴 정도)을 생산하는 세계 최대의 산유국이다.

이렇게 세계가 주시했던 도하 회의는 결렬되고 말았다. 그러나 충격은 의외로 크지 않은 듯하다. 서부텍사스유의 경우, 4월15일에 배럴당 40.36달러였던 것이 시장이 열린 4월18일에는 39.78달러로 58센트 떨어졌다. 그러나 이튿날엔 다시 41.08달러로 상승했다.

미국의 원유 생산 증가가 가져온 변화

산유국들이 공급을 통제하지 않기로 했는데도 오히려 시장이 안정된 듯한 분위기를 풍기는 까닭은 무엇일까?

단기적으로는, 도하 회의가 종료된 4월17일 개시된 쿠웨이트 석유 부문 노동자들의 파업 때문이다. 파업은 쿠웨이트 정부가 노동자들의 임금 및 복지급여를 대폭 삭감하면서 촉발됐다. 이로 인해 하루 300만 배럴에 달하던 쿠웨이트의 원유 생산량이 절반 이하로 뚝 떨어졌다. 시티그룹의 글로벌 원자재 연구팀장인 에드 모스는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도하 회의의 결렬에도 불구하고 유가가 폭락하지 않은 것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다른 큰 사건(파업)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쿠웨이트의 공급 차질이 시장에서 160만 배럴을 제거해버렸다. 도하 회의에서 합의될 수 있었던 동결량보다 더 큰 규모다.” 사실 도하 회의에서 동결이 합의되었다 해도 이로 인해 줄어드는 원유 공급량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동결 기준이었던 지난 1월의 생산량은 역사적으로 봐도 아주 높은 수준이었다.

그런데 훨씬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이미 도하 회의 이전부터 글로벌 원유 공급량 감소가 전망되었던 것이다. 시장은 사우디 등 중동 국가들이 석유 생산을 통제하지 않는다 해도 글로벌 석유 공급량의 감소라는 큰 추세는 변화하지 않으리라고 판단했다. 전적으로 미국의 생산능력 때문이다.

지난 몇 년 동안 원유 가격이 지속적으로 하락한 것은, 불황으로 원유 수요가 줄어드는 반면 공급은 오히려 늘어났기 때문이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에 따르면, 글로벌 원유 공급량은 2011년 하루 7471만 배럴에서 2015년 8007만 배럴로 7% 증가했다. 같은 기간에 사우디 등 걸프만 주변 국가들의 공급량 증가분은 6%였다. 그렇다면 어디서 원유 공급량이 늘어난 것일까? 미국이다. 2011년 하루 563만 배럴에서 2015년엔 943만 배럴로 67%나 증가했다. 즉, 미국의 생산 증가가 글로벌 시장을 원유 공급 과잉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미국 업체들의 ‘셰일 기술혁명’에 따라, 예전엔 시추관을 내릴 수 없었던 지하 3~4㎞ 지점에서 원유를 추출할 수 있게 된 덕분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미국 업체 측의 생산 비용이 중동 산유국보다 큰 편이다. 저유가 상황을 견디는 데는 미국 측이 중동, 특히 사우디에 비해 불리하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사우디는 지난 2014년부터 ‘석유 가격을 그냥 시장에 맡기자’는 쪽으로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정책을 유도해왔다. 최대 산유국인 자국의 시장점유율을 유지하면서 셰일오일 같은 ‘비싼 에너지’를 시장에서 밀어내기 위한 전략이었다. 이 정책이 통했다.

실제로 미국의 경우, 2015년을 정점으로 생산량이 줄어들고 있다. EIA에 따르면, 미국의 원유 생산은 4월 첫째 주에 하루 897만7000배럴로 떨어졌다. 2014년 10월 이후 18개월 만에 처음으로 900만 배럴 이하로 하락한 것이다. EIA는 올해 미국의 하루 평균 원유 생산량을 860만 배럴로 예측하고 있다. 앞으로 더욱 줄어든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미국의 생산량이 매우 큰 규모로 줄고 있었기 때문에, 글로벌 유가는 이미 오를 조짐이 보였다. 서부텍사스유는 2월11일 배럴당 26.21달러를 바닥으로 해 서서히 상승해왔다. 여기에다 도하 회의에서 생산량 동결이 합의될 것이라는 기대감까지 조성되면서 최근 40달러대로 진입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유가는 서서히 오를 가능성이 크다. 미국 유력 방송사인 CNBC에 따르면, 상당수 애널리스트가 대체로 오는 3분기에는 원유 가격이 40~45달러, 연말에는 50달러대 초반에 도달하리라 내다보고 있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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