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코파이와 맥모골(맥심 모카골드).’ 개성공단에서 인기가 많았던 간식이다. 단 음식을 좋아하는 북한 노동자들은 초코파이를 더 달게 먹는 노하우를 개발했다. 초코파이를 컵에 넣고 뜨거운 물에 녹여 음료수처럼 호호 불어가면서 마신다. 묘하게 더 달단다.

개성공단에서 근무했던 김 아무개씨는 요즘 낯설었던 ‘그 맛’이 자꾸 떠오른다. 그는 지난 2월10일 개성공단이 폐쇄된 바로 다음 날 사직서를 써야 했다. 최근에는 북한 개성공단 대신 서울 상암동에 있는 개성공단근로자협의회 사무실에 나간다. 정부의 개성공단 폐쇄 방침에 따라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개성공단에서 다시 일하길 바란다.

남한 노동자 800여 명과 북한 노동자 5만4000여 명이 개성공단이라는 일터를 빼앗긴 지 100일이 넘었다. 개성공단이라는 역사적 실험이 이대로 남북한 사회에서 증발해도 되는 걸까? 이런 질문을 가지고 5월16일 김진향 전 카이스트 미래전략대학원 교수(47)를 만났다. 그는 지난해 개성공단 노동자를 처음으로 인터뷰한 책 〈개성공단 사람들〉을 펴냈다. 그는 참여정부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처에서 한반도평화체제 담당관, 대통령비서실 통일외교안보정책실 남북관계국장 등을 역임했다. 5년 동안 익힌 남북관계 실무 경험과 개성공단에서 직접 4년간 근무했던 자신의 경험도 책에 담았다. 개성공단에서 남북 노동자가 부딪치면서 배우고 이해하는 과정을 기록했다.

ⓒ시사IN 이명익

김 전 교수는 남북 상호 인정을 강조한다. 책의 부제도 ‘날마다 작은 통일이 이루어지는 기적의 공간’이라고 달았다. 책에서는 남한과 북한을 남측과 북측이라 썼다. 2000년 6·15 정상회담 이후 남한 기자협회·PD협회 등이 남북을 중립적으로 부르기 위해 쓰기 시작한 용어다. 김 전 교수는 “북한이라는 용어는, 북측이 우리를 ‘남조선’이라고 부를 때 우리가 느끼는 것처럼 어색해하고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인터뷰 내내 그의 입에서는 북측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반복되었다.  


처음 개성공단에서 일하게 된 계기는?
자원했다. 참여정부 인수위원회부터 5년 동안 청와대에 있으면서 남북정책을 맡았다. 다양한 협상을 지켜보고 실무를 했다. 일하면서 가장 많이 느낀 점은 ‘우리가 북한에 대해 잘 모른다’였다. 남북 고위급 회담장이 아닌, 일상 속에서 북측을 보고 싶었다. 남북이 체제와 제도가 다르다는데, 그것이 가치관이나 생활양식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 알고 싶었다. 그러려면 직접 북측에 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개성공단이 떠올랐다. 2007년 말 청와대 생활을 마무리하면서, 이재정 통일부 장관에게 부탁했다. 그렇게 해서 개성공업지구 관리위원회 기업지원부장 자리를 맡았다.

청와대에서 남북관계를 담당했는데도 북측에 대해 잘 몰랐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청와대에 있으면 뭔가 알 거 같은데, 정말 모른다. 청와대에 있으면서 이것이 가장 괴로웠다. ‘우리가 이 정도인가?’ 싶었다. 가장 기본적인 팩트도 확인하기 어려웠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 가계에 대해 조사해서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국정원·통일부·외교부·국방부 등 관련 부서에서 자료를 모아서 보고했다. 그 보고서에 우리는 김정은 이름도 제대로 못 썼다. ‘김정운’이라고 결과적으로 틀린 이름을 보고했다. 김여정도 ‘김예정’이라고 보고했다. 지금도 팩트가 엇갈리기는 마찬가지다. 김정일 일가를 오래 연구해온 정성장 박사(세종연구소 통일전략연구실장)는 2013년 김정은의 친모가 ‘고영희’가 아니라 ‘고용희’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단적인 예에 불과하지만, 이 정도였다. 북한을 제대로 모르는 ‘북맹’은 우리 사회에 흔하다. 그래서 북한 사람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에 가겠다고 한 것이다. 개성에서 근무해도 직제가 나눠져 있어 작업 현장에 있는 북측 근로자는 접촉하기 어렵다. 나는 별일 없는지 살피겠다는 명목으로 매일 현장을 돌아다녔다. 하루 종일 북측 근로자들과 떠들고, 옆방의 북측 관계자를 만났다.  

개성공단 근무로 북에 대해 더 알게 되었나?
20년 이상 북한 연구를 하고 정책도 만들었다. 그런데 그때 배운 것과 이후에 배운 것을 따져보면 49:51이다. 개성공단에 4년 정도 근무했지만, 그때의 지적 충격과 체험이 학자로서 연구하고 청와대 5년 근무하며 받았던 그것을 넘어섰다. 우리는 자본주의, 거기는 사회주의다. 효율성 개념도 다르게 본다. 개념도 분단되어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북측은 고도의 집단주의 체제다. 이것이 그 사회 가치규범이다. 둘 이상 같이 다니는 게 자연스럽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감시라고 생각한다. 무지는 폭력이 된다. 그런 걸 매일 체험하고 만나고 확인했다. 때론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새로 깨닫고 배웠다.

ⓒ시사IN 이명익정부가 개성공단 중단을 선언하자 북한은 남측 인원 전원 추방을 통보했다. 2월11일 밤 차량이 개성공단을 빠져나와 파주 통일대교를 넘어오고 있다.

문자로만 배운 지식과 현장 지식 간에 차이가 있었다?
그렇다. 북측은 사회주의 경제라 서비스 개념이 없다. 개성공업지구 관리위원회에서도 북측 직원을 고용해 세탁소를 운영했다. 엄청 바쁜 토요일이었는데, 세탁물을 빨리 찾고 출경해야 했다. 시간을 어기면 못 나가거나 벌금 50달러를 내야 했다. 마음이 급해 5달러짜리를 꺼내 맡겨놓은 와이셔츠 두 벌을 달라고 했다. “부장 선생님이 (환전하러) 갔다 오시라요.” 직원이 둘이나 있는데도 태연하게 옆 편의점에서 잔돈을 바꿔오라고 하더라. 순간 ‘나를 무시하나’ 싶었다. 환전하고 차를 탄 뒤에야 깨달았다. ‘나도 잘 이해를 못하고 있구나. 여기는 고용·피고용 개념이 없어 서비스 개념 자체가 없는데….’

개성공단만으로 남북 만남의 노하우가 10여 년간 쌓인 것인데?
그렇다. 남측 기업의 사장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고용주니까 내 말을 들어라’는 태도로 북측 근로자에게 접근하면 백전백패했다. ‘같이 회사를 잘 돌아가게 해야 한다’는 공동체 가치로 접근할 때 서로 말이 통했다. 처음에는 서로 다르니까 당연히 불편했다. 북측은 1970~1980년대 남측에도 있었던 공동체 문화가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다. 사람들의 행태나 사고방식이 굉장히 투박했다. 우리 시각에서는 혀를 끌끌 찰 만한 모습도 보았다. 예를 들어 차 안에 여자 50~60명이 탔는데, 기사가 담배를 그냥 피웠다. 내가 담배를 끄라고 뭐라 했다(웃음). 남과 북이 다르다는 걸 알아야 스트레스를 적게 받는다. 모르면 무시당하는 거 같지만, 알면 웃는다. 그렇게 시간이 쌓이고 서로를 이해하면서 개성공단이 돌아갔다. 처음에 남측 주재원 30명이 한 일을 지금은 5명이 한다. 차이를 잘 활용하면 에너지가 된다.

개성공단은 북측에 어떤 변화를 주었나?
북측에서도 처음에 남한 사람을 신기해했다. 남측 주재원이 개성공단에서 만든 청바지를 홍보할 겸 일부러 입고 근무한 적이 있다. 찢어진 청바지를 입었는데, 북측 근로자가 “첫 대면에 거지처럼 찢어진 청바지 입고 계시면 어떡합니까?”라고 말했다. 우리가 예전에 반공교육을 받은 것처럼, 그들도 우리 머리에 뿔이 나 있는 줄 알았다고 하더라. 그런데 만나보니까 아닌 것이다. 그쪽도 남측 영향을 받아서 겉모습, 생활양식도 조금씩 바뀌는 것 같다. 만나면 한쪽만 바뀌지 않는다. 서로 바뀐다. 남북 최고지도자급의 4대 합의(1972년 7·4, 1991년 남북기본합의, 2000년 6·15, 2007년 10·4)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상호 인정이다. 서로 인정하면 통일이 시작된다. 문제는 상호 인정의 경험을 전파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직접 겪어봐야 아는데 경험한 이가 소수이기 때문이다. 개성공단을 드나든 사람들이 공통으로 겪는 일인데,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이야기하면 북측에 대한 시각차가 뚜렷하게 난다. 나중에 ‘빨갱이’라는 욕까지 먹다 보니, 개성공단을 경험한 사람끼리만 어울리기도 하더라.

책을 보니, 개성공단에 근무한 남측 주재원들이 오히려 성급한 통일을 반대한다는 대목도 있던데.
‘이 체제를 들여다보니까 참으로 간단치 않다’는 의미다. 차이를 체감하니까 갑작스럽게 통일이 되면 안 된다는 뜻이다. 바로 흡수통일을 반대한다는 개념이다. 대다수 국민은 통일 하면 흡수통일을 떠올리는데, 그런 갑작스러운 흡수통일은 재앙이다. 개성공단 주재원들은 ‘개성공단을 10개 만들면 그것이 바로 통일’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말하는 통일은, 점진적이고 평화적인 통일이다. 통일이 어렵고 급작스러운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은 나쁜 사람이고 나쁜 지도자다.

ⓒ김진향 제공2008년 당시 김진향(오른쪽) 개성공업지구 관리위원회 기업지원부장이 북측 대표와 협상을 벌이고 있다.

개성공단이 다시 가동될 수 있을까?
폐쇄 조치는 사실 상상도 못했다. 우리보다 더 상상 못한 건 아마 북측이었을 것이다. 우리야 ‘정권이 바뀌었으니 애석하지만 어쩌겠나’ 정도인데, 북측은 김정일 국방위원장 혼자 정한 게 아니다. 당과 군이 관련되어 있고 집단주의 체제이기에 전 사회가 거기에 맞춰 돌아갔는데 하루아침에 바뀌니 경악스러운 것이다. 우리가 먼저 문을 닫은 터라 박근혜 대통령 임기가 끝나기 전까지는 재가동이 어렵다고 본다.

만일 개성공단이 재가동된다고 해도 기업이 선뜻 다시 입주를 할까?
들어갈 것이다. 왜냐하면 이윤이 남기 때문이다. 개성공단이 북측에 ‘퍼주기’라는 오해가 큰데 그렇지 않다. 우리가 몇 배로 더 ‘퍼온다’. 2013년 일시 폐쇄 이후 재개되었을 때도 거의 모든 기업이 다시 들어갔다. 이윤을 최고 목표로 삼는 기업이 남북관계를 위해 다시 들어갔을까? 북측 노동자 임금과 세금을 합쳐 1년에 약 1억 달러 정도가 북측에 들어가고, 우리는 그곳에서 최소 약 15억~30억 달러의 생산액을 올린다. 정부 발표는 공단 1년 생산액이 5억 달러라고 하지만, 이것만 봐서는 안 된다. OEM(주문자상표제작·단순임가공)이 주를 이루는 개성공단은 기업의 생산액을 임가공료(봉제비) 기준으로 산정한다. 이를 공장도가나 소비자가로 환산하면 차이가 최소 5~10배다(〈개성공단 사람들〉에서 남측 기업의 한 과장은 “우리나라 속옷의 70%, 의복 30%가 개성공단에서 나온다. 휴대전화 부품도 상당수 조립된다. 개성에서 생산된 제품이 엄청나게 싼 가격에 나와 ‘개성단가’라는 게 있다”라며 개성공단의 경제적 가치에 대해 증언한다).

개성공단 사태를 다룬 언론 보도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겠다.
우선 정부가 발표하지 않으면 언론은 알 수가 없다. 또 북측이 발표하지 않으면 정부도 모르고, 북측이 발표한 것 중에서도 우리 정부가 기자들에게 흘리는 건 몇 개 안 된다. 주로 정부 쪽 취재원을 활용하다 보니 프레임 자체가 왜곡될 수밖에 없다. 현 정부에서 남북 관계를 풀어보려고 내놓는 정보가 몇 개나 있을까? 나는 없다고 본다. 그러다 보니 김정은 위원장 등 권력자 동정 위주의 언론 보도가 많이 나올 수밖에 없다.

박근혜 정부 들어 ‘종북’ 프레임이 강화되고 있다.
나도 종북 딱지가 붙는 것을 각오하고 있다. 그런데 재미난 게 뭔지 아나? 북측 근로자도 ‘빨갱이’라는 말을 쓴다. 작업장에서 누가 “빨갱이 짓 하지 말라우” 하기에 “그런 말 좀 쓰지 마라”고 내가 그랬다. 북측은 이간질한다는 의미로 빨갱이라는 말을 쓴다. 그들이 남측에서 어떤 의미로 빨갱이란 말을 쓰는지 알면서 장난을 치는 것이다. 그런 농담을 편하게 주고받던 개성공단이 문을 닫은 것이다. 우리는 그 의미에 대해 너무 모른다. 적대적 분단체제에 익숙하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개성공단 이야기 2권도 준비 중이다. 이번에는 북측 근로자의 시각에서 바라본 개성공단 이야기를 쓰려고 한다. 역사의 기록을 남겨야 하니까.

기자명 김은지 기자 다른기사 보기 smi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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