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중앙지방법원 총무과 사회복무요원(옛 공익근무요원) 이태석씨(가명·23)의 6월1일은 아찔했다. 상관인 김 아무개 비상계획담당관이 그를 불러 “너, 내 사진을 인터넷에 올렸어?”라고 물었다. 김 비상계획담당관은 군 출신 인사로 이씨를 비롯한 사회복무요원들을 관리했다.

사실 이틀 전 이태석씨는 국민권익위원회에서 운영하는 ‘국민신문고’에 민원을 신청했다. 공무원 신분인 김 담당관이 태만히 근무하고 있다는 요지였다. 이씨는 민원에 법원 중회의실에서 큰대(大)자로 누워 있는 상관의 사진을 첨부했다. 민원을 낸 때는 5월30일 오후 10시였다. 그런데 이틀 뒤인 오전 10시, 민원 접수 36시간 만에 이씨는 ‘피민원인’인 직속상관에게 붙들려 총무과장 앞에 서게 됐다.

총무과장은 이씨에게 국민신문고 접수 서류를 내밀며 “이거 네가 쓴 거야?”라고 물었다. 서류에는 이씨의 휴대전화 번호, 이메일, 자택 주소 따위 신상 정보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이태석씨는 또다시 “제가 쓴 게 아닙니다”라고 부인했다.

ⓒ시사IN 윤무영국민권익위원회는 2008년부터 국민신문고 업무를 맡아왔다. 하루 평균 5200명이 국민신문고를 두드린다.

이태석씨에 대한 감사계의 두 차례 조사는 ‘누가 썼는지’에 초점이 맞춰졌다. 감사계 조사관들은 이씨에게 수차례 “(국민신문고 민원 사항을) 본인이 쓴 것인가?”라고 물었다. 이씨가 “답변을 거부하겠다”라고 답하자, “답변을 거부해서 불이익을 받아도 그 책임은 당신한테 있다” “답변을 거부한다는 건 ‘썼다’는 말과 동의어일 수 있다”라는 추궁이 돌아왔다. “IP 주소를 보면 썼는지 알 수 있다”라고도 했다.

1시간 넘게 이어진 ‘진실 게임’을 끝낸 것은 유도심문이었다. “우리 형법에 이런 게(무고죄) 있다. 징계처분을 받게 할 목적으로 허위 사실을 신고한 것은 아닌가?” 조사관의 물음에 이씨는 “허위의 사실이 아니다”라고 답했다. 조사관은 “본인이 쓰지 않았다고 하면서 허위의 사실이 아니라니, 본인이 쓴 게 맞다. 답은 나왔다”라고 말했다. 이날 조사는 이 문답을 끝으로 마무리됐다. 6월16일 감사계 조사관은 이씨를 다시 불러 “비상계획담당관의 근무 중 취침을 증명할 추가 자료가 있는가?”라고 물었다. 그날 상황을 목격한 증인이 있다는 말에 조사관은 “증인은 부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6월16일 조사는 10분 만에 끝났다.

이씨의 신상 정보가 어떻게 직속상관인 피민원인에게까지 들어가게 됐을까? 국민신문고와 민원 처리기관 관계자들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상황은 이렇다. 국민신문고는 이씨의 민원을 서울지방법원의 상급 기관인 대법원 종합민원과로 전달했다. 대법원은 민원 내용을 직접 처리하지 않고, 피민원인이 근무하는 서울중앙지방법원 감사계로 ‘하달’했다. 감사계는 김 담당관의 상급자인 총무과장에게 보고했고, 총무과장은 김 담당관을 호출해 “이태석이라는 사람이 국민신문고에 민원을 올렸다”라고 말했다. 결국 이씨는 국민신문고 민원에 적은 개인정보 때문에 ‘고초’를 겪게 됐다.

국민신문고는 정부가 운영하는 온라인 민원 플랫폼이다. 중앙행정기관과 지방자치단체, 감사원, 법원행정처 등 900여 개 기관이 국민신문고 민원업무 범위다. 옛 국민고충처리위원회에서 2005년 시범 운영을 시작한 국민신문고 업무는, 2008년부터 국민고충처리위원회·국가청렴위원회·국무총리행정심판위원회를 통합한 기구인 국민권익위원회(권익위)가 넘겨받았다. 2015년 한 해에만 권익위에 들어온 국민신문고 민원은 약 190만 건이다. 하루 평균 5200여 명이 국민신문고를 두드리는 셈이다.

국민신문고가 민원을 직접 해결하는 기관은 아니다. 민원인과 민원 처리기관을 매개하는 ‘전달자’에 더 가깝다. 그런데 권익위는 민원 서류에서 민원인의 이름과 주소, 연락처 등을 가리지 않은 채 처리기관에 전달한다.

내부고발자 보호를 위한 장치가 없지는 않다. 국민신문고 민원인은 민원 접수 과정에서 ‘처리기관’과 ‘기피기관’을 직접 선택할 수 있다. 이태석씨는 처리기관으로 ‘법원행정처(대법원)’를 선택했다. 복무 중인 서울중앙지방법원을 기피기관으로 지정하려 했으나 불가능했다. 추후 이씨는 권익위로부터 “사법부인 지방법원은 국민신문고 민원 처리·기피 기관에 속하지 않는다”라는 답변을 받았다. 이 말대로면 각 지방법원에 근무하는 공직자는 안전하게 ‘내부고발’을 할 방법이 없는 셈이다. 국민신문고 민원란과 달리 공익신고란은 신고자 비밀을 보호해주고 있다. 하지만 건강·안전·환경·소비자 이익·공정경쟁 등 제보 분야가 한정되어 있어, 이태석씨처럼 시민 대부분은 민원란을 통한 제보와 고발을 한다.

‘개인정보’ 파기하지 않는 국민권익위

〈시사IN〉은 이태석씨의 민원을 전달·처리한 주요 관계자들과 통화했다. 권익위 관계자는 “민원인 신상을 알아야 민원 해결이 가능하기에 민원인의 정보를 블라인드 처리 없이 처리기관에 넘겼다”라고 말했다. 국민신문고에서 민원을 전달받은 대법원 관계자는 “1차적으로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판단할 사항이라고 여겨져 하달했다. 대법원에서 민원 전부를 조사할 수는 없다”라고 말했다. 자기 기관의 민원을 되돌려받은 서울중앙지방법원 감사계 관계자는 “사안 조사를 위해 정당한 업무 수행을 한 것이다. (조사가) ‘고압적’이란 지적은 받아들이는 사람의 주관적 감정이다”라고 말했다. 민원을 감사계로부터 보고받은 총무과장은 “민원인이 우리 법원 소속인 줄 모르고 피민원인에게 말해줬다”라고 해명했다. 피민원인인 김 아무개 비상계획담당관은 “조사 중인 사안이라 할 말이 없다”라고 말했다.

이태석씨 사례 외에도 민원인 신원이 노출된 경우가 또 있다. 공무원 신분인 ㄱ씨는 상관의 부당한 업무지시를 받고 국민신문고에 민원을 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향 친구 ㄴ씨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의 이름과 연락처를 기입했다. 그런데 어떤 경위에선지 민원은 바로 그 해당 상관에게 전달되었다. 상관은 ㄱ씨를 불러 “민원인을 아느냐”라고 다그쳤다. ㄱ씨는 “어떻게 상관에게 민원 내용이 들어갔는지 의문이다”라고 말했다.

민원 처리가 끝나도 국민신문고 민원인은 안심할 수 없다. 권익위는 국민신문고 민원을 10년 동안 보관한다. 국민신문고 민원 신청란의 ‘개인정보 수집 및 이용안내’에 따르면, ‘민원이나 국민행복 제안·예산낭비 신고·공익 신고 등은 10년까지만 보관한다. 원칙적으로 개인정보 보존 기간이 경과하거나 처리 목적이 달성된 경우에는 지체 없이 개인정보를 파기한다’로 되어 있다. 그런데 〈시사IN〉 취재 결과 권익위는 10년이 넘어도 민원인 관련 정보를 폐기하지 않았다. 권익위 관계자는 “민원 기록을 이전하는 시스템이 없다. 그래서 2005년 이후 국민신문고로 접수된 민원을 전부 데이터베이스(DB)화하여 보관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민원인 IP주소를 수사기관에 넘기는 경우도 있다. 권익위 관계자는 “개인정보 도용 민원일 경우 (IP 주소를) 경찰에 제공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개인정보 도용 문제가 생길 때에만 IP 주소를 넘기는지 묻자, “무조건 어떻다 말할 수는 없고 사건에 따라 개별 판단한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이상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prode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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