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에 일찌감치 번역서가 나왔으나 몇 쇄를 찍고 자취가 사라졌던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의 〈성의 변증법〉(꾸리에, 2016)이 다시 출간됐다. 지은이는 스물다섯 살 때 완성한 이 책을 〈제2의 성〉 저자인 시몬 드 보부아르에게 헌정했다. 보부아르는 자신의 책에서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면서, 여성의 조건은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구성물임을 밝혔다. 이 공로로 〈제2의 성〉은 현대 페미니즘의 기초를 놓았다는 평가를 받으며 ‘페미니즘의 성서’로 추앙되었으나, 책이 출간되었던 1949년 바티칸은 서둘러 이 책을 금서 목록에 올렸다.

〈성의 변증법〉 142쪽에 나오는 옮긴이 주는 미국의 어느 정신과 의사가 젠더 개념을 창안했다고 한다. “로버트 스톨러는 1963년 스톡홀름에서 개최된 국제정신분석학대회에서 최초로 젠더를 생물학적 성(sex)과 구별하여 새로운 과학적 연구 대상으로 지목했다. 성은 호르몬·유전인자·신경계·성기 등 신체적 요소들과 관련된 것으로서 생물학적 연구 대상이고, 젠더(gender)는 문화와 관련된 것으로서 사회학과 심리학의 영역에 속한다. 한 개인은 주어진 생물학적 조건에 문화적 각인이 부과되어야 남성 혹은 여성으로서 성별화된 핵심 정체성, 즉 ‘젠더 정체성(gender identity)’을 획득한다. 생물학적으로 남자와 여자로 태어났더라도 남자의 역할과 여자의 역할을 규정하는 것은 후천적 문화적 조건과 상황으로 강제되고 학습되어졌다는 말이다.” 하지만 사빈 보지오 발리시와 미셸 장카리니 푸르넬이 함께 쓴 〈저속과 과속의 부조화, 페미니즘〉(부키, 2007)에 따르면 이 개념은 보부아르에 의해 처음 고찰된 다음 대서양을 건너갔다.

1967년 시카고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한 파이어스톤은 그 시대의 미국 청년들을 사로잡았던 민권운동과 반전운동에 투신했다. 하지만 좌파 운동가들이 밀집한 운동 현장에 여성은 없었다. 여성들은 사회변혁이라는 희망을 품고 진보운동에 참여했지만, 여자들을 차별하고 보조물 취급하기는 진보단체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현실에 분노한 파이어스톤은 여성 투표권 쟁취에 안주한 제1세대 페미니스트와 다른 급진 페미니스트 조직을 결성하고, 이때 남성 진보 운동가들과 벌였던 이론 투쟁의 결과물이 1970년에 나온 〈성의 변증법〉이다.

지은이는 마르크스·엥겔스의 역사적 유물론에 근거한 계급 분석이 제한적이고 심층적이지 못하다면서, 경제에서 직접 생겨나지 않은 “성적 계급”이야말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견고한 계급제도”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모든 계급제도를 근절하기 위해서 우리는 사회주의 혁명보다 훨씬 큰, 그것을 포함하는 성의 혁명이 필요한 것이다.” 이어서 비판되는 것은 프로이트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남성이 여성과 아이들 위에 군림하고 가족을 유지하게 해주는 남성 지배 이데올로기이며, 프로이트는 혁명 대신 적응(승화)을 가르침으로써 페미니스트 반란을 없애는 데 이용되었다. “우리가 보아온 대로, 가족은 사적인 피난처도 아니다. 가족은 개인이 더 이상 맞설 수 없는 더 큰 사회 병폐와 연결되어 있으며 그 원인이기까지 하다.”

사회주의 혁명의 최종 목적이 무산계급의 생산수단 점유이듯, 성적 피지배계급인 여성해방의 목표는 여성이 자신의 생식능력 자체를 완전히 장악(폐기)하는 것이다. “종족의 생식은 인공생식으로 대치”되어야 하고, 생명공학의 힘을 빌려 태어난 아이는 탁아소에서 공동으로 길러져야 한다. 여성의 출산 능력이 축복이 아니라 남녀 사이의 근본적인 불평등을 낳았다고 말하는 지은이의 문제 제기와, 이 문제의 해결책으로 제시된 생명공학은 이 책이 출간된 지 40여 년이 훨씬 넘는 오늘날 더욱 뜨거운 쟁점이 되었다.

여성혐오가 개인의 탓이 아니라 구조적인 이유

임옥희의 〈젠더 감정 정치〉(여이연, 2016)는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으로 촉발된 여성혐오를 깊이 들여다보게 해준다. 남성들로 하여금 여성혐오를 하게 만드는 것은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여성보다 우월하고, 우월해야 한다’는 남성들의 무의식이다. 이런 남성 우월의식은 젠더 정치가 여성에게 부과한 ‘여성=보살피는 모성’이라는 공식과 짝을 이룬다. 부권적 국가는 젠더 정치를 통해 여성을 부차적 시민인 ‘집안의 천사’로 길들이고, 남성은 국민국가의 담당자로 떠받든다. 여성이 결혼을 필수가 아닌 선택으로 취급하고 아이 낳기에 등한하며 보살핌 노동을 거부한 채 남성과 똑같은 경쟁자가 되려고 할 때, 젠더 정치는 여성혐오를 부추기거나 방관한다. 여성혐오가 개인의 탓이 아닌 구조적인 이유다.

〈 성의 변증법〉슐라미스 파이어스톤 지음김민예숙·유숙열 옮김꾸리에 펴냄

지은이는 젠더 정치를 다소곳이 받아들이는 여성과 거기에 저항하는 여성을 비체(卑/非體·abject)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만든 비체는 그 자체로 더럽고 불결한 것이 아니라, 적절한 자리에 있지 못하기 때문에 불결해지는 무엇이다. 사회적으로 어떻게 배치되느냐에 따라서 비체는 순결한 것이 될 수도, 불결한 것이 될 수도 있다. 내 안에 있는 똥은 불결할 것이 없지만 내 몸 바깥으로 나오는 순간 불결한 것이 되고, 시리아인들은 시리아에 머물지 않고 지중해를 건너거나 터키 국경을 넘는 순간 비체가 된다. 여성의 경우 남성이 보호해주고 관용을 베푸는 가정 바깥으로 나오면 비체를 면치 못한다.

미국에서 출간된 〈성의 변증법〉을 처음 읽은 페미니스트 가운데는 공상과학 소설처럼 무서웠다고 말하는 독자도 있었다. 파이어스톤의 주장이 비현실적이고 이상주의적이라는 비판은 지금도 여전하지만, 그녀가 남긴 유산은 만만치 않다. 〈젠더 감정 정치〉 역시 “최종심급으로 간주되었던 계급보다 더 끈질긴 것이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여성해방은 계급해방 이후에도 남아 있는 최후의 해방이며 최종의 혁명이자 가장 장구한 혁명”이라고 말한다는 점에서, 또 로맨스 문화(사랑)와 결혼이 “여성 억압을 재생산하고 가부장제를 영속하는 데 공모”하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임옥희를 비롯한 현재의 페미니스트는 모두 파이어스톤의 상속자라고 할 수 있다.

사족이다. 〈성의 변증법〉은 이 분야의 고전이지만 여성주의 독해와 다른 읽기도 가능하다. 이 책은 원본능에 충실하면서 소망 충족의 직접적인 만족을 추구했던 히피이즘과 히피들의 과학기술 숭배가 절묘하게 혼합되어 있다. 예컨대 출산과 가족으로부터 남녀를 해방시켜주는 인공 생식은 하나의 젠더 정체성을 취득하고자 다른 성을 억압한 대가로 생긴 젠더 무의식을 해소하고, 인간 본래의 다형도착적 성(n개의 성)을 누릴 수 있게 해준다. 지은이의 히피 문화 접촉 여부와 상관없이, 히피이즘과 과학기술 숭배의 연관성을 찾아보려는 연구자라면 필독해야 한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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