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8월6일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에서는 원폭 투하 평화기념식이 열린다. 마쓰이 가즈미 히로시마 시장은 작년에 이어 올해도 ‘평화선언’의 첫머리에 원자폭탄으로 목숨을 잃은 한반도와 중국, 동남아시아 그리고 미군 포로들을 언급했다.

필자는 매년 일본의 대학에서 원폭에 관한 수업을 한다. 그때마다 학생들에게 “일본인만이 피폭 민족인가”라는 물음부터 던진다. 대부분은 “몰랐다. 피해의 역사만 배운 것이 부끄럽다”라고 반응한다. 많은 일본인들은 자국인 외 피폭자들에 대해서 잘 모른다.

그런데 지난해부터 히로시마 평화선언에 일본인 외 피폭자들이 언급되기 시작했다. 이들의 존재를 기억할 수 있도록 애써온 사람들 덕분이다. 1960년대 후반부터 한국인 피폭자의 존재와 실상을 알리려고 노력해온 한국인 원폭 피해 생존자들과 이들을 지원해온 일본인들이 있었다.

시인 이시카와 이쓰코도 그중 한 명이다. 8월6일 오후 이시카와 시인은 도쿄 신오쿠보의 고려박물관에서 ‘재한 피폭자의 수기를 엮으며’라는 강연을 했다. 고려박물관은 재일 조선인과 일본인이 만든 곳이다. 이곳 회원들은 수차례 한국의 합천,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방문해 조선인 피폭자의 실정에 대해 배워왔다. 그러다가 올해 처음으로 <피폭 71년 한국·조선인과 일본>이라는 기획 전시를 열었다. 당시 원폭으로 사망한 사람 6명 중 1명꼴로 조선인이라는 사실,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강제 연행의 역사, 아직도 일본 정부가 방치하고 있는 한국과 북한의 피폭자와 피폭 2세의 문제, 그리고 지금도 진행 중인 핵발전소의 내부 피폭 문제 등을 전시했다.

ⓒ고려박물관 제공 <피폭 71년 한국·조선인과 일본> 기획 전시에서 이시카와 이쓰코 시인이 강연을 하고 있다.

이시카와 시인은 이 전시에서 기념 강연을 했다. 시인은 차분한 목소리로 지난 수십 년간 자신이 만난 한국인 피폭자를 이야기했다. 그중 한 명인 이순옥씨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이순옥씨는 1932년 일본에서 태어났다. 열네 살 때 오사카 공습으로 집이 불타 히로시마로 피란을 갔다가 원폭으로 집이 내려앉았다. 어머니는 즉사하고 이씨는 오른쪽 다리를 크게 다쳤다. 아버지는 행방불명됐다. 여동생도 피폭당했다. 친척을 따라 여동생과 함께 한국으로 건너왔다. 결혼을 했지만 ‘애도 못 낳는 원폭병자, 장애자’라는 구박을 못 견뎌 가출했다. 이후 식모살이, 청소부 등 안 해본 일이 없었지만 힘겨운 노동이 벅차 금방 해고당했다. 여동생은 결혼 후 불임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이혼당한 뒤 자살했다. 본인도 몇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다리를 치료할 방법을 찾다가 신문에서 ‘한국원폭피해자후원협회’를 보고 방문했다. 같은 처지의 피폭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처음으로 고독감에서 해방됐다. 1978년 한국원폭피해자후원협회와 일본 시민들의 노력으로 히로시마의 가와무라 병원에서 두 달간 무료 치료를 받았다. ‘한국 원폭피해자를 구원하는 모임 히로시마 지부’의 도요나가 게이자부로 씨가 1981년부터 ‘이순옥씨를 지원하는 모임’을 결성했다.

2시간 열띤 강연 내내 이시카와 시인은 이순옥씨 외에도 많은 한국인 피폭자의 삶을 얘기했다. 그리고 일본인으로서 잊지 말아야 할 가해 책임을 강조했다. 이순옥씨가 시인에게 보낸 편지에는 “일본 국민과 정부는 평화가 찾아왔다고 생각하고 문화생활을 즐기고 있겠지만, 세계의 전쟁 피해자들에 대한 뒤처리가 완전히 끝나지 않는 한 일본에 평화는 없습니다. 평화, 평화라고 떠들지만 평화는 찾아오지 않았다고 나는 생각합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이시카와 시인은 죽어서 말할 수 없는 피해자를 대신한 자신의 시를 읽어 내려갔다.

ⓒ연합뉴스 지난 8월5일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에서 열린 한국인 희생자 위령제에서 참가자들이 묵념하고 있다.

“이갑순/ 이것이 당신의 본명/ 그런데 대일본제국에 의해 ‘후지모토 도시코’가 되어버린/ 당신/ ‘황국의 안위’를 위해 ‘의용(義勇)봉사’를 해야 했던/ 당신이지만/ 지금은 외국인이어서 근로동원 학생이었지만/ 전몰자유족원호법에 따른/ 유족연금 지급 대상이 안 된다고 해요./ ‘밝고 마음씨 착하고 강했다’고 언니는 말했어요./ 죽기 전날까지 씩씩하게 쉬지 않고 일한 당신/ 독립만세!/ 라고 외쳐보지도 못하고 소녀의 마음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그날로부터 50년이나 지나버려/ 우리들이 볼 수 있는 것은/ 어둠 속에 혼자 죽음과 싸우고 있었던/ 13살의 자그마한 당신의 모습뿐/ 당신은 거기서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요.”(‘한 통의 학생 명부’ 중에서)

이시카와 시인의 시는 따뜻했다. 열세 살의 이갑순에게 따뜻한 눈길을 건네는 한 구절 한 구절을 듣다 보니 청중의 눈앞에 이갑순이 그려졌다. 시 속에 담긴 내용이 굉장히 사실적이어서 이갑순이 느꼈을 고통도 그대로 전해졌다. 그래서 시인이 엮은 한국인 피폭자들의 수기와 시는 숨을 고르지 않으면 다음 구절로 넘어가기가 힘들다. 듣기에도 그저 가슴이 먹먹해지는 내용을 시인은 묵묵히 여러 번 듣고 수기로 정리하고 시로 엮었다. 일본인으로서 매번 죄책감을 느꼈을 이 작업을 이시카와 시인은 30년이 넘도록 계속해왔다.

학생 103명이 희생당한 미도리마치 중학교

이시카와 시인이 히로시마의 참상을 처음 제대로 접한 것은 1976년이었다고 한다. 근무 중이던 도쿄의 중학교에서 히로시마로 수학여행을 가면서 직접 체험자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었다.

특히 미도리마치 중학교에서는 당시 공장 등으로 근로동원되기에는 아직 어려 학교에서 공동작업을 하던 중학생 103명이 희생당했다는 사실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1945년 중학교 1학년이던 시인은 만약 히로시마로 피란을 갔다면 자신도 그 학생들과 함께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이후 시인에게 원폭 문제는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었다. 이후 미도리마치 중학교와 교류하면서, 희생된 학생 중에 6명이 한국·조선 국적이라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시인이 한국인 피폭자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계기였다. 1989년 가을, 시인이 여섯 명 중 한 명인 이갑순의 유족(언니)을 찾아가 이야기를 듣고 지은 시가 ‘한 통의 학생 명부’다.

1982년 겨울, 교사직을 그만둔 이시카와 시인은 미니통신 계간 <히로시마·나가사키를 생각한다>를 창간했다. 시인이 수학여행에서 만난 피폭자와 유족들의 “전해달라”는 염원을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미니통신에는 매회 피폭자의 증언을 실었다. 평범한 한 사람 한 사람의 어눌한 말들이 원폭과 전쟁의 실상을 잘 드러낸다는 것을 시인 스스로 히로시마 만남에서 절감했기 때문이다.

1986년부터는 히로시마 가와무라 병원에 치료차 입원한 한국인 피폭자들을 찾아갔다. 이후 한국인 피폭자들과 인터뷰가 이어졌고, 1988년에는 도쿄의 시민단체 ‘재한피폭자문제시민회의’ 결성에 참가하며 한국인 피폭자들과 본격적인 교류를 시작했다. 미니통신이 100호(2011년 3월)까지 발간되는 동안 이시카와 시인이 만난 다양한 사람들은 시인의 시와 수기로 다시 태어났다. 이시카와 시인은 “그저 해야 한다는 뜨거운 마음에서 해온 것뿐이다”라고 말했다. 전쟁 속에서 살아남은 자의 부채감과 ‘무지의 부끄러움’을 원동력으로 삼아, 시인은 한국과 일본의 ‘역사’에는 없는 기억을 이어가고 있다.

기자명 도쿄∙이령경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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