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에는 요리책이 가득하다. 틈나는 대로 온라인 서점에 들어가 새로운 콘셉트의 요리책이 나왔는지 살펴본다. 유튜브 구독 목록에는 감각적으로 편집된 각종 요리 영상이 가득하다. 각 방송사에서 방영하는 음식 소개 프로그램을 열심히 살펴본다.

어느 채널을 돌려도 맛집을 소개하느라 바쁘고, 출연자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볼이 미어져라 맛있는 음식들을 먹고 있다. 그런데 저런 프로그램이 정말 ‘음식’을 좋아하는 걸까? 앵글은 종종 음식보다는 그것을 먹는 사람을 비춘다. 쩍 벌린 입, 송글송글 땀이 맺힌 이마, 쩝쩝거리는 소리…. 맛있는 음식을 먹고 황홀해하는 모습을 클로즈업할 때는 공중파 채널에서 포르노를 보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심지어 어느 채널에서는 소녀들에게 음식을 먹이면서 누가 더 맛있게 먹는가를 대결시키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쯤 되면 가학적 포르노라 불러야 한다.

나 역시 음식도 요리도 맛집도 좋아한다. 하지만 나를 흥분시키는 것은 ‘음식을 먹는 행위’ 자체가 아니다. 그러니까, 먹는 행위만을 좋아하는 게 아니다. 맛집을 찾아다니는 것과도 다르다. 요리를 해서 내 입에 넣는 것이 중요하지도 않다. 물론 기본적으로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요리하는 것도 좋아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나를 충만하게 하는 것은 음식의 형상 그 자체, 그 조형적으로 아름다운 존재로서의 요리 그 자체이다. 만드는 사람, 먹는 사람은 없어도 좋다. 아니, 전면에 등장하지 않을수록 더욱 좋다.

일본 최고의 푸드 스타일리스트로 꼽히는 이이지마 나미가 참여한 영화 <남극의 셰프>(왼쪽)와 <심야식당>에는 음식 조리 과정이 잘 묘사되어 있다.

선명한 색상의 채소와 탄력이 느껴지는 고기, 탱글탱글한 해산물 등 재료를 손질하고 다듬는 모습, 달궈진 팬에서 버터가 녹아내리는 모습, 재료가 들어가는 순간 “싸아” 하는 소리, 윤기 나는 소스가 눅진하게 흘러내리는 모습, 그 모든 것들이 아름답게 담긴 접시, 그 우주.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완벽한 서사다.

이 덕질의 시작은 다섯 살 즈음이었을 것이다. 엄마가 결혼할 때 가져온 흰색 하드커버의 양식 요리책이 있었다. ‘수프’가 아니라 ‘수우프’, ‘야채 보트’가 아니라 ‘야채 보우트’ 등이 적혀 있던 그 책은, 지금 생각하면 일본 요리책을 번역한 것이었던 듯하다. 나는 그 요리책을 몇 년간, 몇백 번이고 몇천 번이고 읽었다. 요리 사진의 화려한 색감이며, 생경하고 이국적인,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단어들은 초등학생인 나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머랭그’라는 것이 들어간 ‘에그노그’라는 음료는 무슨 맛일까? ‘비이프 커틀릿’은 ‘비후까스’랑 같은 건가? 누군가에게 묻거나 알아볼 필요는 없었다. 그 책 안의 음식이나 음료는 아름다운 암호였고, 미지의 맛이어도 좋았다. 요리책은 내 안에서 비밀스럽고 황홀한 세계를 구축했다.

ⓒ꿀키 유튜브 갈무리 유튜버 ‘꿀키’의 요리 영상 속 장면들. 요리 과정에서 나오는 소리를 잘 살려냈다.

요리책과 더불어 내 세계를 풍성하게 한 것은 명작 동화였다. 부모가 거액을 지출하며 책을 사주셨을 때 바랐던 것과는 아주 다른 방향으로, 그 책들은 내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비밀의 화원> <소공녀> <빨간 머리 앤> <말괄량이 삐삐>는 그 자체로도 재미있는 이야기였지만, 책을 다 읽고 나서 머릿속에 남는 건 아이들이 벌인 다과회였다. 내 또래의 소년 소녀들이 한껏 차려입고는 밀크와 각설탕을 탄 홍차를 홀짝이며 오이 샌드위치나 스콘 같은 티푸드(차에 곁들이는 음식)를 먹는 이미지를 생각만 해도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딱딱한 검은 빵만 먹던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가 클라라와 함께 보드라운 흰 빵을 먹는 장면은 몇 번이고 집요하게 읽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올리버 트위스트>나 <위대한 유산>에서 나오던 가난한 아이들이 먹는 ‘꿀꿀이죽’ 역시 궁금했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은 말할 것도 없이 책 전체가 만화경이었다. 새로운 책을 읽을 때마다 새로운 음식이며 향신료는 힘들이지 않아도 아주 자연스럽게 외워졌다.

가본 적 없는 세계 각국은 특정 음식으로 기억되었다. 일본은 달짝지근한 유부조림으로, 인도는 커리(특히 ‘카르다몸’), 영국은 밀크티와 티푸드, 그리고 아프리카는 고소한 버터 냄새였다(아프리카 동화집에서 <버터가 된 호랑이>를 읽었다). <봄봄>에서 점순이가 내밀던 봄감자, <운수 좋은 날>의 김 첨지가 달랑달랑 들고 오던 설렁탕, 백석이 묘사한 설 전날의 잔치 음식 냄새 역시 행복했다. 하지만 고백하건대 고려가요 <정석가>에 나온 군밤 닷 되의 구수한 향기가 코끝을 스치고, 이상의 <날개>에서 주인공이 먹었던 아달린 알약의 맛이 얼마나 쌉쌀했을지 혀끝의 느낌을 상상하는 정도에 이르렀을 때는 내가 좀 미친 게 아닌가 잠시 고민하기도 했다.

포털 웹툰에도 다양한 음식 만화가 있다

달착지근한 소설을 쓰는 일본 작가들 역시 탐미적으로 음식을 그려냈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키친>을 읽고는 돈가스 덮밥을 먹었고, 에쿠니 가오리의 <반짝반짝 빛나는>을 읽고는 생양배추를 안주로 와작와작 씹어 먹었다. 무라카미 류의 <달콤한 악마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는 그 자체로 섹시한 음식 소설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경우, 그의 책에 나오는 음식 레시피만을 모은 요리책(<내 부엌으로 하루키가 걸어 들어왔다> <하루키 레시피>)이 나올 정도이다. 정은지씨가 펴낸 <내 식탁 위의 책들>이 출판되어 팔리는 것을 보면, 이런 사람들이 나 혼자만은 아닌 게 분명하다.

활자만으로 부족하다면 만화로 범위를 넓힐 수 있다. 요리 만화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지닌 장르니까. <맛의 달인> <미스터 초밥왕> <라면요리왕> 등 ‘요리 전문인’ 혹은 ‘미식가’의 이야기 장르부터 <어제 뭐 먹었어?> <아빠는 요리사> 등의 가정 요리, 더 나아가 기차 도시락이며 주문배달 요리까지 온갖 분야의 요리 만화가 나와 있다. 대형 만화 포털 웹툰에도 음식 만화는 다양하다. 조경규 작가의 <오무라이스 잼잼> <차이니즈 봉봉 클럽>, 얌이 작가의 <코알랄라!>, 오묘 작가의 <밥 먹고 갈래요?>, 들개이빨 작가의 <먹는 존재>, 첨지 작가의 <보글보글 > 등이 각자의 방식으로 음식을 그려내고 있다.

지면으로 만족할 수 없다면, 그래서 더욱 직관적이고 아름다운 요리를 보고 듣고 싶다면 요리 영상이 있다. EBS <최고의 요리비결>이나 올리브채널 등의 국내 요리 방송은 물론이고 요리를 다룬 영화, 그리고 유튜브까지 챙겨보기 시작하면 심심할 새가 없다.

검색엔진에서 ‘음식 영화’로 검색하면 <담뽀뽀>부터 시작해 아주 긴 추천목록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국내에 요리책도 여러 권 출판한 이이지마 나미가 참여한 요리 영화 <카모메 식당> <남극의 셰프>, 드라마 <심야식당> 등은 이미 너무 유명해 더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일본 영화뿐 아니라 <음식남녀> 같은 중국 영화, <아메리칸 셰프> <줄리 앤 줄리아> 같은 미국 영화 등등 다양하게 찾을 수 있다. 좀 더 긴 시리즈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일본 요리 드라마를 찾아보면 하루가 짧게 느껴질 것이다.

길고 긴 요리 영상을 보기가 번거롭고 지루하다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1분 남짓한 시간에 재료와 레시피, ‘한입 샷’까지 감각적으로 보여주는 유튜브 계정 ‘테이스티(tasty)’를 추천한다. 테이스티의 대성공 이후 비슷한 콘셉트의 유튜브 계정이 많이 늘어나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다음 영상만 따라가면 된다. 테이스티보다는 좀 더 길기는 하지만, 유튜버 ‘꿀키’의 요리 영상도 추천하고 싶다. 인스타그램 스타일의 말간 화면에 재료를 써는 소리, 레인지를 켜는 소리, 보글보글 끓는 소리를 가만히 듣다 보면 모든 잡생각이 사라지는 선(禪)의 순간에 도달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화면 속 요리는 아름답게 완결된다. 재료 손질에서 완성작이 나오는 순간까지, 어떤 거짓도 배신도 없다. 다치는 사람도 상처받는 사람도 없이 아름답고 고요하고 정결하다. 행복한 세상이다.

기자명 중림동 새우젓 (팀명)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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