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기자의 글발에 변호사가 반했다. 그에게 동업을 제안하려 했다. 변호사는 기자를 자신의 사무실로 초대해 “육·해·공 중에 뭐가 먹고 싶나?”라고 물었다. 기자는 “해”라고 답했다. 변호사가 맛있는 회를 사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그를 맞은 변호사는 사무실 한구석에서 말라비틀어진 고등어를 굽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기자는 생각했다. ‘똥 밟았구나.’ ‘스토리펀딩 스타’ 박준영 변호사와 박상규 프리랜서 기자가 밝힌, 모든 일의 시작이다.

지난해 1월부터 박준영 변호사와 박상규 기자는 ‘다음 스토리펀딩’에 ‘재심 3부작’ 기사를 잇달아 연재했다. 김신혜 친부 살해사건, 익산 약촌오거리 살인사건, 삼례 3인조 강도치사 사건을 다뤘다. 세 사건은 모두 십수 년 전에 대법원 확정판결이 났다. 범인으로 지목된 사람들은 복역을 마쳤거나, 아직 교도소에 있다. 그런데 박준영 변호사와 박상규 기자는 확정판결에 오류가 있다고 봤다. 이들이 진범이 아니라는 것이다. 두 사람은 그 이유를 밝혔다. 수사와 재판 과정을 다시 살피고, 관련자들을 찾아다니며 직접 인터뷰했다. 살인범으로 몰린 사법 피해자들 대부분이 못 배우고 가난했으며, 더러는 장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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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이명익박준영 변호사는 국선 변호사 시절부터 발로 뛴 ‘팩트 체크’로 승소를 잘 이끌어냈다.
그들의 인생 이야기에 여론이 큰 관심을 보였다. 대법원은 지난해 12월 익산과 삼례 사건에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다. 김신혜 사건은 아직 심의 중이다. 시국사건이 아닌 일반 형사사건의 재심은 대단히 드물다.

스토리펀딩은 독자들의 자발적 후원으로 운영된다. ‘재심 3부작’은 후원금을 많이 모았다. 연재 3건을 합쳐 약 1억4000만원이 모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두 사람의 형편은 ‘고등어구이’를 나눠먹을 때보다 더 나빠졌다. 전업으로 했다시피 한 일에서, 버는 돈보다 나가는 돈이 더 많았다. 전국을 오가며 사건 관련자들을 취재하다 보니 교통비와 숙박비, 식비 부담이 컸다. 더 큰 ‘비용’도 들었다. “펀딩 금액을 사법 피해자, 사건 유가족들과 함께 나눴다. (박준영) 변호사님은 ‘피해자한테 제일 많이 주자’고 했다(박상규 기자).” 펀딩 분배금 이외에도 박준영 변호사는 수시로 피해자들에게 생활비를 주었다. 생계를 위해 두 사람은 카드빚을 쓰고 적금을 깼다.

심리적 압박도 컸다. 두 사람의 취재에 따르면 세 사건 모두 ‘진짜 살인범’이 따로 있다. 진범들에게 원한을 살 수도 있었다. 그래서 지난해 4월 박준영 변호사가 익산 약촌오거리 사건의 진범을 스토리펀딩에 공개하자고 제안했을 때, 박상규 기자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시 분위기상 진범을 공개하지 않는 이상 재심 결정은 절대 나지 않을 것 같았다. 결국 지난해 4월29일 스토리펀딩 첫 연재에서 이들은 ‘1981년생 김’을 진범으로 지목해 공개했다. 이후 박준영 변호사는 SNS에서 가족사진을 모두 내렸다. 지리산 아래에서 혼자 살고 있는 박상규 기자는 한동안 머리맡에 몽둥이를 두고 잤다.

척박한 상황에도 박준영 변호사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재심 3건을 모두 성공시켜 널리 알려지면, 이 사회가 나를 버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 반드시 도움을 주리라 여겼다.” 반면 박상규 기자는 비관적이었다. “박 변호사는 낭만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좋은 일을 하는데 굶어죽는 사람이 사회에 얼마나 많나? 그래서 꿈도 꾸지 마시라고 했다.” 박준영 변호사가 생각한 도움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 재력가의 후원이었다. 실제로 도와주겠다며 연락해온 사람들은 많았다. 하지만 그들은 박 변호사가 바랐던 독지가가 아니었다. 재력가들의 후원이 깨끗한 돈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최근에는 후원을 대가로 개인적 송사를 강요하다시피 떠맡기려는 사람도 있었다. 모두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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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이명익박상규 기자는 “아침부터 보고하고 매일 똑같은 거 쓰기 싫어서” 프리랜서 기자가 되었다.
고졸 변호사와 ‘노가다’ 출신 기자의 새로운 기획

‘최후의 보루’였던 아내 명의 적금까지 깨야 할 상황이 오자 박준영 변호사가 새 스토리펀딩을 제안했다. ‘돈독 올랐다’는 비판을 받을까 봐 걱정도 했다. 박상규 기자도 경제적으로 참담한 형편이었기에 8월11일 새로 연재를 시작했다. 이전에 진행한 ‘재심 3부작’과는 성격이 달랐다. 새 연재는 재심 사건들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박준영 변호사라는 인물을 전면에 내세웠다. 연재 프롤로그에 박 기자는 “이 기획은 ‘박준영 시민 변호사 만들기’ 프로젝트”라고 썼다. 반응은 이전 스토리펀딩보다 더 뜨거웠다. 첫날 5000만원이 모였고, 사흘 만에 목표 후원 금액인 1억원을 넘겼다. 8월25일 현재 약 2억9000만원이 모였다. 8월25일 기준 8768명이 후원에 나섰다. 200만원을 쾌척한 이도 있었지만, 대부분 3000원, 5000원, 1만원을 낸 평범한 시민들이다. 아직 79일이 더 남은 것을 감안하면 다음 스토리펀딩 역사상 최고 후원 액수를 기록할 가능성도 높다. 두 사람은 “이제 기사회생했다”라며 안도했다. 박준영 변호사는 “박상규 기자 글은 읽는 이가 공감할 수밖에 없다. 이전 연재 중 하나는 댓글에 ‘눈물을 흘렸다’는 내용뿐이었다. 지하철에서 울고, 화장실에서 울고, 아기 젖 먹이다가 울었다고들 썼다”라고 말했다. 박상규 기자는 “사람들은 박 변호사의 인생을 보고 돈을 내는 거지, 글을 보고 내는 게 아니다. 우리가 잃었던 정의라는 가치를 삶으로 구현해냈다”라고 말했다.

박준영 변호사와 박상규 기자는 법조계·언론계 ‘주류’와 거리가 있다. 박준영 변호사는 종합고등학교(일반계와 실업계를 함께 설치한 학교) 출신으로, 지방 국립대 전자공학과를 중퇴한 뒤 스물아홉 살에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대형 로펌과 대기업은 ‘고졸 변호사’를 받아주지 않았고, 수원에 사무실을 차렸다. 사건을 수임하기 힘들다 보니 국선 변호 일을 자주 했고, 2007년 수원 노숙자 소녀 살인사건을 변호했다. 국선 변호사였지만, 그는 현장답사 등 발로 뛴 ‘팩트 체크’로 검찰이 기소한 이들 전원에 대해 무죄판결을 이끌어냈다. 현재 재심 전문 변호사 박준영의 ‘예고편’이었다. 박 변호사는 “진경준·홍만표처럼 ‘삽질’하고 있는 주류 법조인들과 비교되어 내가 더 부각이 된 것 같다”라고 말했다.

박상규 기자는 ‘기자 공부’를 따로 한 적이 없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니 취업이 안 됐다. 비정규직으로 일하다가 그만둔 뒤, ‘노가다’도 했다. 후배의 권유로 〈오마이뉴스〉에 글을 쓰다가 공채 2기로 입사했다. 그러다 2015년 “아침부터 보고하고, 매일 똑같은 거 쓰기 싫어서” 프리랜서 기자가 되었다. 그는 “전형적 글쓰기 수업을 안 받아서 연재하는 기사가 기사보다 소설에 가깝다”라고 말했다. 기사의 이런 파격이 오히려 누리꾼들의 지갑을 열게 했다.

박준영 변호사와 박상규 기자는 새로운 기획을 준비 중이다. 1990년 부산에서 일어난 강간살인 사건이다. 9월부터 이 기획을 연재할 예정이었으나, 진행 중인 스토리펀딩 때문에 미뤘다. 박준영 변호사는 “공익 사건에 매진하는 사람들도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이상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prode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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