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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 브래드버리는 SF소설 〈화씨 451〉에서 책과 지식이 사라진 미래사회에 대해 묘사한 바 있다. 화씨 451도는 종이로 된 책이 불타오르기 시작하는 온도를 의미한다.

나는 책을 읽고, 책을 만들고, 책에 대한 책을 쓰고, 책 문화에 관한 강의를 하며 살아가고 있다. 청춘의 어느 시기에는 국가가 금지한 책을 읽거나 소유한 것만으로 처벌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권력이 금지한 책이 독자의 손을 떠났던 시대는 인류 역사상 한번도 없었다. 하지만 인쇄에 의한 책, 그것이 배태했던 장구한 책의 문화가 과학과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인해 급속한 변화를 맞이하고, 한편에선 구텐베르크 은하계의 종말을 예언한다. 그런 시대에 생태운동가이자 위대한 문명비판가였던 이반 일리치의 책 〈텍스트의 포도밭〉을 읽는다.

오늘날 너무나 당연하여 자연스럽기까지 한 ‘책(Book)’의 형태와 독서 문화는 생각의 탄생, 문자의 발명, 파피루스와 점토판, 양피지와 종이, 두루마리에서 코덱스, 필사본에서 인쇄본에 이르는 인류 지식의 발전사와 더불어 매우 서서히 때로는 급속한 속도로 진화해온 것들이다.

이반 일리치는, 12세기를 살았던 신비주의 수도사이자 스콜라 철학자였던 성 빅토르의 후고(1096~1141)가 그의 동료와 제자들에게 바람직한 ‘읽기 기술(ars legendi)’ ‘성스러운 독서(lectio divina)’를 위해 남긴 가르침 〈디다스칼리콘(Didascalicon)〉에 기대어 자신의 사유를 진지하게 풀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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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이반 일리치(위)의 〈텍스트의 포도밭〉은 지혜 대신 지식만 구하는 독서의 폐해를 지적한다.
독서가 음독(音讀)에서 묵독(默讀)으로, 진리를 추구했던 전례(典禮)로서의 성스러운 독서에서 세속적인 독서로, 개인의 지적 탐구를 위한 독서(studium legendi)로 변모해가던 시대, 후고는 자신의 책머리에 “탐구되어야 할 모든 것 중에서 그 최초의 것은 지혜”라고 적었다. 물론 이때의 지혜란 그리스도의 빛을 의미하는 말이지만, 독서하는 사람이 궁구해야 할 것이 처방전적 지식이 아니라 지혜라는 의미에서 그의 말은 여전히 빛을 발한다. 후고는 지식을 개인의 지적 탐욕이나 출세를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독서이자 전례로서 소리 내어 읽기를 권했고, 문자를 쫓아가며 읽기보다 책을 암기하여 자신의 내부에서 새롭게 기억의 궁전을 짓도록 권했다.

‘쓰인 것’에만 의존했을 때 놓치는 것들

후고는 어째서 이렇게 이야기했을까? 일단 그가 살았던 시대는 아직 인쇄술을 발명하기 전이어서 책이 귀한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지식과 지혜의 차이를 명확하게 구분했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중기 대화편 중 〈파이드로스(Phaidros)〉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주사위·숫자·문자·기하학·천문학’ 등을 발명한 신 토트(Thoth)가 이집트의 파라오를 방문해 자신이 발명한 문자의 장점을 열거한다. 토트가 “문자는 사람들의 기억을 향상시켜줄 배움의 한 종류로 내 발명은 기억과 지혜 모두에게 유익한 비결이다”라고 주장하자, 파라오는 “사람들이 그걸 배운다면 그들의 영혼에 망각할 수 없는 무언가를 심는 결과가 되어 사람들이 앞으로는 쓰인 것에만 의존하려 들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기억 속에 무언가를 담아 찾아내려 하지 않고, 눈에 드러난 기호에만 의존할 것이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지혜가 아니라 지혜의 유사품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아는 것도 아니면서 말만으로 많은 것을 아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 것이기 때문에 결국엔 짐만 될 것이다”라며 반론을 제기한다.

인터넷을 열면 온갖 정보가 차고 넘친다. 하지만 그것도 찾아서 읽고 사유하여 녹여내지 못한다면, 결국 서가에 먼지와 함께 꽂혀 있는 책과 같다. 그것이 무엇이든 ‘나’라는 존재를 경유하지 않고서는 지식도 지혜도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의 물성(物性)이 무엇이든, 어떤 정보(information)든 ‘나’를 통해 변환(transformation)하는 과정이야말로 진정한 독서이자 공부이다.

기자명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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