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유럽연합(EU)이 추진해온 ‘범대서양무역투자동반자협정(TTIP)’에 제동이 걸렸다. EU의 핵심 국가 중 하나인 프랑스가 협상 중단을 요청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TTIP 협상이 타결되면, 미국과 유럽 대륙을 아우르는 세계 최대 규모의 자유무역지대가 탄생할 예정이었다.

TTIP 협상을 주도해온 마티아스 페클 프랑스 무역장관은 지난 8월30일 언론 인터뷰에서 “현재의 협상은 명백하고 최종적으로 종결되어야 한다”라며 미국에 그 책임을 돌렸다. “미국인들은 조금도 양보하지 않는다. 동맹국과 협상하는 태도라고 볼 수 없다.” 페클 장관은 이번 달에 슬로바키아에서 열리는 EU 무역장관 회의에서 협상 중단을 공식 제안할 것이라고 밝혔다. 같은 날,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 역시 자국 외교관들에게 한 연설에서 “협상은 연내에 타결될 수 없다. (EU) 각국 견해가 미국으로부터 존중받지 못하는 불균형한 상황이다”라고 말했다. 하루 앞서, 독일의 지그마어 가브리엘 부총리 겸 경제장관(사회민주당 대표)도 “미국은 최소한의 EU 규범도 거부했다. 미국이 현재의 태도를 유지하는 한 타결은 불가능하다”라고 밝혔다.

미국과 EU 간 TTIP 협상은 2013년 7월에 개시되었다. 지난 7월 중순에는 14차 협상이 진행되었다. 양측 협상단은 연내 혹은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퇴임하는 내년 1월 이전에 TTIP가 타결될 것이라는 ‘희망’을 수차례 밝혀왔다.

ⓒFlickr2015년 5월 프랑스 시민들이 ‘TTIP가 유럽인의 건강과 환경 규범을 해칠 것’이라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그러나 정작 EU 내에서는 TTIP에 대한 회의적 여론이 적지 않았다. TTIP는 단지 관세를 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EU(와 회원국)의 각종 규제 제도를 바꾸는 협정이기 때문이다. 영국 유력 언론 〈가디언〉 8월3일자 ‘왜 시민들은 TTIP에 격분하는가’ 기사에 따르면, 특히 EU의 소비자 보호 및 환경 관련 공공정책이 TTIP로 무력화될 수 있다는 공포감이 유럽인들을 에워싸고 있다.

EU 시민들이 TTIP에 격분하는 이유

예컨대 EU에서는 미국과 달리 화장품 등 상품 개발에 필요한 동물실험이 엄격히 규제되고 있다. 성장호르몬을 가축에 투여할 수도 없다. 미국 축산업에서 사용하는 82종의 살충제(예를 들어 닭의 경우 염소 세제가 사용된다) 역시 금지되어 있다. 또한 EU는 회원국들이 GMO(유전자재조합식품)를 규제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프랑스의 경우, GMO 재배 농가를 적발하기 위한 순찰대까지 설치하고 있을 정도다. 한편 EU와 미국은 식품 안전성 관련 제도에서도 크게 다르다. 미국에서는 식품 관련 논란에 대해 ‘과학적 근거로 확실히 입증된 이후’에야 규제할 수 있다. 그러나 EU에서는 논란 자체가 규제의 이유로 충분하다. ‘어느 쪽이 옳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제도의 차이가 만만치 않은 것이다.

미국식 자유무역협정(FTA)의 핵심 장치인 ISDS(Investor State Dispute Settle ment:투자자 국가 분쟁 해결)에 대해서도 EU에서는 반감이 크다. 미국 담배회사인 필립 모리스가 금연 정책을 이유로 우루과이와 오스트레일리아 정부에 ISDS 절차를 요구한 사례가 현지 언론에 연거푸 소개되고 있다. ISDS는, 외국에 투자한 기업이 해당 국가의 공공정책으로 손해를 봤다고 느낄 때 그 나라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요구할 수 있는 제도다. 국제 중재법정에서 비공개로 심리된다. 이에 따라 EU 측에서는 ‘ISDS를 협상 의제에서 제외할 때까지 TIPP 협상을 중단하자’라든지 ‘중재법정을 공개 포럼으로 전환하자’는 등의 요구가 산발적으로 제기되기도 했다.

ⓒAP Photo올랑드 프랑스 대통령도 8월30일 연설에서 TTIP 협상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다.
TTIP를 주도하고 있는 유럽집행위원회(European Commission)는, TTIP가 발효되면 오는 2027년까지 EU의 경제 규모가 0.5% 더 커진다고 주장해왔으나 큰 호응을 얻지 못하는 분위기다. 자유무역협정으로 상징되는 지구화(Globalization)로 부유해지기는커녕 일자리를 잃고 더욱 빈곤해졌다고 생각하는 시민이 많기 때문이다. 프랑스 국민전선 등 극우 정당이 노동자·서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각종 선거 때마다 ‘TTIP 반대’를 주요 공약으로 내걸었을 정도다.

그나마 유럽 시민들은 TTIP 협상에서 EU가 이 지역의 처지를 대표해왔을 것으로 짐작해왔다. 양측이 모두 공개적으로 ‘연내 타결’을 자신하고 있다면, 상반된 견해들이 어느 정도 타협 국면에 들어섰다는 방증이 아닐까? 그러나 지난 5월1일 〈가디언〉이 글로벌 환경운동단체 그린피스로부터 제보받은 TTIP 협상 내부 문건을 공개하면서 상황이 더욱 복잡해졌다.

문건에 따르면, EU 협상단 측마저 ‘미국이 EU의 환경보호나 보건 관련 규제를 무력화하는 요구를 하고 있다’라고 느껴왔다. 심지어 “EU와 미국의 견해는 화해 불가능한 상태다”라고 기록된 문건도 있다. 미국이 EU의 공공 보건 및 환경 규범을 뒤집으라고 요구하는 상황에서, EU 측 협상단은 감히 대들지도 못하고 ‘연내 타결’만을 부르짖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TTIP에 대한 반대 여론이 더욱 강력해지는 가운데 프랑스 정부가 사실상 공식적으로 협상 중단을 제기해버린 상황이다.

세계경제의 또 다른 악재 ‘미국-EU 갈등’

더욱이 지난 6월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국민투표에서, 미국 정부와 가장 가까운 동맹국인 영국이 TTIP 협상에서 사실상 제외되어버렸다. 미국 피터슨 연구소의 선임 연구원 게리 후프바우어는 로이터 통신과 인터뷰에서 “TTIP는 브렉시트 국민투표 이후 잠들거나 사망한 상태다”라고 말했다.

지난 8월 말 EU 집행위원회가 미국의 ‘테크 자이언트’ 애플을 대상으로 130억 유로 규모의 벌금 추징을 결정한 것도 대서양 양안 사이의 갈등을 심화시키고 있다. 애플은 조세 회피처인 아일랜드에 ‘유럽 본부’를 운영 중이다. 그러니 애플 유럽 본부의 기능은 연구개발이나 마케팅이 아니라 탈세다. 애플은 글로벌 차원에서 천문학적 규모의 돈을 벌어들이고 있지만, 그 돈을 본국(미국)으로 가져가지 않는다. 미국의 공식 법인세율이 35%에 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수익금을 미국 밖에 축적해둬야 하는데 그 장소로 선택된 나라가 바로 아일랜드다. 아일랜드의 법인세율은 OECD 최저인 12.5%다. 그러나 최저 법인세율 외에도 다양한 탈세 방법을 제공하기 때문에 조세 회피처로 불리는 것이다. 실제로 애플이 2014년에 아일랜드로 송금한 수익금에 적용된 법인세율은 고작 0.005%였다. EU 집행위원회는 설명서를 통해 “아일랜드가 애플에 수백억 달러의 이윤을 불법 탈세하도록 허용했다”라고 비판했다. EU 집행위원회 측의 결정은 3년에 걸친 조사에 따른 것이다.

애플과 아일랜드는 항소할 계획이다. 미국 재무부는 EU 측의 결정이 “미국과 EU 간의 경제적 파트너십 정신을 훼손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의 성명을 냈다. 격랑의 세계경제에서 미국과 유럽 간의 갈등이 또 다른 악재로 떠오르고 있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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