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자녀 이야기를 하지 않던 친구가 우연한 기회에 딸 이야기를 했다. 그동안 가슴속에 묻어둔 아픈 이야기였지만, 이제는 말하고 싶다고 했다. 친구 딸은 초등학교·중학교 시절 문제아였다. 초등학생 때부터 사고를 많이 쳐서 일주일이 멀다 하고 부모가 학교에 불려갔다. 중학생 때는 일진 중에서도 이른바 ‘짱’이었고, 2학년 때 가출을 경험했다. 아이는 ‘나는 집에서나 학교에서 쓸모없는 사람이니 가출하겠다’고 했단다.

그런데 이 아이가 고등학생이 되면서 변하기 시작했다. 담임이 “너도 쓸모 있고, 다른 아이들에 비해 우월한 것이 있다”라고 한 말에서 비롯되었다. ‘국어·영어·수학은 못해도 네가 가진 장점을 살린다면 한 사람으로서 삶을 꾸려가거나 사회에 의미 있는 기여를 할 수 있다’고 자신감을 심어준 것이다. 물론 담임의 한마디에 이 아이가 갑작스럽게 변한 것은 아니고 우여곡절이 있었다. 아무튼 짧은 기간에 그동안 바닥이던 성적이 쑥쑥 올랐고, 마침내 한 지방대학 수시전형에 합격했다. 면접을 본 교수들이 이 아이의 면접을 마치고는 다른 학생들보다 뛰어난 실력에 기립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김보경 그림
나는 친구 이야기를 듣고 나서 한 아이의 자존감을 살리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생각했다. 그러면서 ‘학교는 여러 빛깔의 아이들을 고루 담을 수 있는 넉넉한 그릇인가? 어쩌면 학교는 잘하는 아이와 못하는 아이를 분류하는 곳이 아닌가? 한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과연 몇 과목의 점수여야 하는가? 지금 국어·영어·수학 중심,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 중심의 학교 교육에서 소수의 성공을 위해 다수가 희생되는 건 아닐까?’를 고민했다. 친구 딸의 삶은 멋진 드라마였지만, 지금 우리 학교의 현실을 생각하며 가슴 아프게 곱씹어봤다. 입시 중심의 교육에서 ‘쓸모없는 사람’의 기준과 선별 방법은 주요 과목 성적과 시험을 통한 한 줄 세우기일 것이다. 많은 아이들이 점수에 따라 줄서기의 무한 경쟁을 하고 있다. 그 경쟁 속에서 많은 아이가 자존감을 잃어간다.  

“경쟁은 학생을 바보로 만든다.” 이 말을 두고 공부나 시험을 싫어하거나 비현실적인 사람들의 푸념으로 여길지 모르겠다. 사실 이 말은 핀란드 교장협의회 회장 피터 존슨이 지나친 경쟁 위주의 우리 대한민국 교육을 비판한 말이다. 경쟁이 아닌 협력을 통해서 세계 최고의 학력을 유지하는 핀란드 교육이니까 그 말에 충분한 근거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경쟁 없이 학력 향상이 어렵다고 말하는 우리 교육 현실에서는 너무 사치스러운 말로 들릴 것이다.

성적이 능력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피터 존슨은 “모든 학생은 서로 다른 능력을 갖고 있다. 학생의 능력에 맞춰 교육을 하는 게 교사의 일이다”라는 말도 했다. 여기서 ‘능력’을 교과 성적으로 좁혀서 생각하면 안 된다. 학교에서 다룰 수 없는, 개인마다 다른 삶의 능력까지도 포함하는 말이다. 너무나 당연한 교육 원리이고, 많은 교육학자들이 그렇게 주장하지만 우리 현실에서는 결국 시험 점수와 경쟁으로 획일화되고 만다.

미국 하버드 대학 입시 요강에는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우리는 SAT 만점을 받은 학생보다 만점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체험을 한 학생을 선호한다.’ 실제로 하버드 대학이나 버클리 대학의 경우 SAT 만점을 받은 학생들이 많이 떨어진다고 한다. 하버드 대학 등은 왜 만점자나 고득점자를 탈락시켰는지 알려주지는 않는다. 적어도 ‘능력’을 점수에 국한하지 않는 것 같다. 입학생 간의 SAT 성적이 무려 1000점이나 차이가 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우리는 숫자만을 보지 않는다”라는 버클리 대학 총장의 말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최근 교과부는 지필 평가를 지양하고 논술·수행 평가 중심으로 전환한다고 발표했다.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경쟁 구도가 존속하는 한 평가 방법의 차이일 뿐 저마다 다양한 빛깔을 가진 아이들의 자존감을 길러주기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기자명 이중현 (남양주시 조안초등학교 교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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