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동 성폭력 생존자다.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가해자가 나에게 나쁜 병을 옮겼다고 믿었고, 내 인생은 끝났다고 여겼다. 2차 성징은 더뎠다. 차라리 내가 남자였으면 하고 빌었다. 몇 번 자살을 결심하는 동안 계절은 무심히 갔다. 악몽도 잦아들었다.
살아남았으므로 살기로 했다. 그 와중에도 자잘한 성폭력의 자장 안에 있었다. 나는 이왕이면 ‘잘’ 살고 싶었다. 잘 살고 싶어서 페미니즘을 붙잡았다. 페미니즘은 내게 입이 되어주고, 목소리가 되어주었다. 그 덕분에 나는 피해자가 아니라 생존자가 되었다. 내가 경험한 폭력을 입 밖으로 꺼내 말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를 둘러싼 풍경도 달라졌다. 나는 혼자가 아니고, 내가 당한 일은 내 잘못이 아니며, 나는 이 고통을 ‘자원화’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고통과 더불어 살아갈지, 어디에 서서 고통을 바라보아야 할지에 따라 고통은 다르게 해석된다(〈페미니즘의 도전〉, 정희진).”
몇 년 전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다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엄마 역시 젊은 시절 직장 내 성폭력 생존자였다. 엄마는 자신의 고통을 어떻게 ‘자원화’해야 하는지 몰랐고, 입이 있으되 말하지 못했다. 대신 엄마가 배운 건 “다 그러고도 살아”라는 체념이었다. 엄마가 내 성폭력 사건에서 보인 무력함을 나는 그제야 온전히 용서할 수 있었다.
2012년 첫 조카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터진 울음을 나는 한동안 해석하지 못했다. 그건 단순한 기쁨이 아니었다.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 깨달았다. 나는 그 아이가 이 땅에서 여성으로 살아갈 일이 안쓰러웠다. 앞으로 당할 일들이 떠올라 고통스러웠고, 무서웠고, 서러웠다. 한 집안의 3대가 이어지는 동안 사회는 여전히 ‘다 그러고 살아’를 위안 삼아 여성의 경험을 묵살한 채 멀쩡한 척 돌아가고 있었다.
SNS상의 ‘#OO_내_성폭력’ 해시태그를 보면서 먼지 쌓인 묵은 기억들이 떠올라 몇 날 밤을 뒤척였다. 폭로라는 방식이 가진 위험성(예컨대 무고죄와 명예훼손 소송에 휘말림)에도 불구하고 목소리는 목소리를 붙잡고 이어졌다. 그 목소리는 더는 이렇게 살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용기가” 되고 있었다. 그 덕분에 세상의 풍경 역시 달라질 것이다. 나는 우리가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게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게 됐다. 내가, 우리가 했던 경험을 더는 물려주지 않을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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