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우리가 폭탄을 돌리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요.”

고등학교 1학년 학생에게 학원을 그만둘 것을 종용한 날이었다. 학생은 학원 수업에 자주 빠졌고, 과제를 해오지 않기 일쑤였다. 어쩌다 학원에 오면, 수업 중에 책상이나 벽을 쾅쾅 치는 등 폭력적인 모습을 보였다. 학부모에게 상황을 말하고 가족과 협력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우리 말은 듣지도 않으니까 학원에서 알아서 하세요!”라는 부모의 대답이 반복되었다. 강사는 결심했다. “나는 너한테 더 이상 무엇을 가르칠 수 있을지 모르겠어. 네가 학원에 몸만 오가는 걸 그냥 두는 건 내가 잘못하는 것 같아. 공부할 마음이 나중에 생기면 다시 만나자.”

아이는 한 치의 미련도 없이 교실을 나갔다. 학원을 나간다고 제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부모가 자식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모는 “우리 아이가 귀찮으니 나가라는 것 아니냐?”라며 마음 상해했고 “그러니까 선생님 말씀은 우리 애를 가르치고 싶지 않다는 것 아니에요? 학원이 좀 부족한 애들 데려다가 잘하게 하는 거 아니에요?”라고 분노하기도 했다. 이렇게 결론지었다. “이런 무책임한 학원에 보낼 바에는 다른 학원에 보낼 걸 그랬네요.” 이 학원을 나간 아이는 다른 학원에 또 다닐 것이다.

ⓒ김보경 그림
부모가 힘들어서 아이를 학원에 맡겨놓고 싶은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교사에게, 학교 밖에서는 강사에게 자녀를 떠넘기며 부모로서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면 답답하다. 자녀를 둘러싼 수많은 어른 중 가장 영향력이 강한 사람은 부모일 것이다. 자신도 통제하지 못하는 자녀가 생판 남인 교사나 강사에 의해 다듬어지길 바라는 것은 판타지 소설 같은 이야기다. 교사의 말 한마디로 인생이 달라졌다는 여러 미담의 주인공이 내 자식이길 바라는 건 무책임한 일이다.

폭탄 돌리듯 아이 학원을 옮기는 부모들

자주 일어나는 문제는 아니다. 수강료를 내야 하기 때문에 수업받을 마음이 없는 아이들이 찾아오는 일은 드물다. 하지만 수업 내내 다른 친구에게 종이 쪼가리를 던지며 괴롭히는 아이, 음료수 캔을 칼로 도려내 흉기를 만들어 여학생들을 위협하던 아이, 상대방에게만 들릴 정도로 계속 욕설을 하는 아이 등 저항감을 표현하는 데 수업 시간 전부를 쏟는 아이들이 있다. “학교에서도 그런다고 해서 걱정이 많다. 부모가 말한다고 들을 나이도 아니고… 그대로 두면 애 아빠도 때리겠더라. 학원에서 알아서 신경 좀 써달라”는 말로 온전히 내게 떠안겨진 아이들이다.

부모들은 돈을 내고 아이를 맡겼으니 수강료만큼의 시간은 아이가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지 않게 붙잡아달라고 한다. 아이를 갈등의 근원지에 던져놓고 별일이 없기를 바라는 것은 그야말로 희망사항이다. 그 시간에 피해를 보는 다른 아이들에게 마냥 참아달라고만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아이가 학원을, 나아가 학교를 싫어한다면 부모는 다른 방법을 써봐야 하지 않을까. 단지 아이가 하는 말이 ‘말 같지가 않고’, ‘세상 물정 모르고 하는 소리’ 같아서 듣고 싶지 않다고 학원에 던져두면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다. 어떻게든 공부는 시켜야겠고, 대학도 보내야겠다 하더라도, 아이의 의견을 세심히 들어본다면 학교나 학원이 아닌 다른 타협점을 찾아낼 수 있을것이다.

강사 개개인이 가진 책임감도 저마다 정도가 다르다. 강사, 교사, 그 어떤 어른이더라도 아이를 ‘내 자식’처럼 여기고 신경 쓰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강사 혼자서도 학습 기회와 경험을 다양하게 제공할 수는 있지만 학습 자체를 거부하는 아이들을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부모의 노력과 지원이 필요하다. 부모도 방치한 아이들을 강사 혼자 어떻게 할 수 있을 리 없다. 이 학원이 그걸 못해줬다고 저 학원으로 아이를 옮겨봐야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돌리고 있는 꼴이다. 학원에 아이를 보내는 것은 교육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제3자와 함께 다시 교육을 해보겠다는 출발점에 서는 일일 뿐이다.

기자명 해달 (필명·대입 학원 강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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