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하면 자기 세상에 안녕을 고하고 알지도 못하는 외계인들 사이에서 살기를 택할 수 있을까?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가 1973년 발표한 SF 단편소설 ‘보이지 않는 여자들’(〈체체파리의 비법〉, 아작, 2016)의 남자 주인공 돈은 현실 세계를 버리고 차라리 외계로 떠나버린 여성 루스를 끝내 이해하지 못한다. 돈이 보기에 여성은 해방됐고, 평등한 권리를 보장하는 법안이 만들어졌음에도 루스가 너무 방어적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루스가 보기에 여성의 권리는 남성의 ‘허용’ 안에서만 이뤄진다. “여자들이 하는 일은 생존하는 거예요. 당신네 세계의 틈바구니에서 살아가는 거죠.”

2016년 한국 여성들은 그 틈바구니에서 비어져 나오기를 선택했다. 그리고 미국의 시인이자 페미니스트인 뮤리엘 루카이저의 말처럼 되었다. “만일 한 여성이 자신의 삶에 대해 진실을 털어놓는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세상은 터져버릴 것이다.” 지난 10월 중순 ‘오타쿠 내 성폭력’으로 시작된 SNS상의 ‘#_내_성폭력’ 해시태그는 문학계, 미술계 등 문화예술계 전반으로 번지면서 각종 파문을 낳았다. 폭로라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고발’은 현재진행형이다. 서울예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학내에 관련 대자보를 붙이는 등 목소리는 목소리를 붙잡고 온라인을 넘어 오프라인까지 번졌다.

ⓒ연합뉴스‘#_내_성폭력’ 움직임은 지금 우리가 놓여 있는 현실을 드러낸다. 위는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 관련 여성 단체 기자회견 모습.
문제가 불거진 곳이 문화예술계였을 뿐 성폭력이 만연한 문화, 즉 강간 문화(rape culture)는 ‘일상화’되어 있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하다. 리베카 솔닛은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창비, 2015)에서 강간 문화를 이렇게 정의한다. “강간 문화란 강간이 만연한 환경, 미디어와 대중문화가 여성에 대한 성폭력을 규범화하고 용인하는 환경을 말한다. 여성 혐오 언어의 사용, 여성의 몸을 대상화하는 시선, 성폭력을 미화하는 태도를 통해서 지속되며, 그럼으로써 여성의 권리와 안전을 경시하는 사회를 낳는다.”

해시태그로 성폭력을 증언하는 여러 목소리들에서 확인할 수 있듯, 권력관계를 이용해 성희롱 발언을 일삼거나 성추행을 친근함의 표현처럼 사용하는 것은 모두 강간 문화를 토대로 벌어진 행위라 할 수 있다. 가해자 대부분은 ‘법적인 책임’의 경계에서 줄타기하며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해왔다. 그래서 나올 수 있는 ‘사과문’이란 대표적으로 이런 식이다. “나로 인해 마음 다친 모든 분들께 사과드려요(박범신 작가 페이스북 사과문).”

10월26일 한국여성민우회가 주최한 ‘성폭력 피해에 공감하는 첫사람 문화제’의 패널로 나온 여성학자 권김현영씨는 해시태그 성폭력 증언의 성과를 이렇게 평가했다. “증언들이 아카이빙된다는 점에서 좋은 전략이다. 해시태그 움직임은 ‘지금 우리가 놓여 있는 공간이 어떤 곳인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집단 교육의 장이 되고 있다. 구조적인 권력의 문제를 드러내는 것이다. 대부분의 성폭력 사건에서 가해자만을 징계해서 꼬리를 자르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이는 가해자 개인의 일탈로 반응하는 것으로, 구조적인 문제로 접근하는 것과 대비된다.”

2015년 첫 시집 〈철과 오크〉를 문학과지성사(문지)에서 낸 송승언 시인이 11월3일 문지에 제안한 내용은 터져 나온 폭로를 구조적으로 해결하자는 목소리에 힘을 보탰다. 송 시인은 가해자 다수가 문지에서 시집을 낸 시인이라는 점이 우연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문지에서 책을 낸 작가를 높이 평가하는 분위기가 권력이 되었으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송 시인은 다섯 가지를 제안했다. △가해 문인들의 책을 계약해지할 것 △인맥 출판 통로로 작용하고 있는 내규를 재정비할 것 △문지문화원 사이에서 활동하는 강사들에게 성폭력 관련 조항을 강의 계약서에 첨부할 것 △출판 표준계약서에 성폭력 관련 항목을 추가할 것 △편집자들의 ‘의전 행위’를 금지시킬 것 등이다. 송 시인은 “문학은 응당 시대 윤리를 반영하는 예술임을 믿는다. 최근 피해자의 고발과 독자들의 요구를 단순히 ‘포퓰리즘’으로 보고 있다는 소리들이 단지 루머이거나 저의 환청이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당장 가시적인 변화도 목격된다. 국문과 대학원생인 고 아무개씨(31)는 해시태그 움직임을 지켜보며 자신의 경험도 정리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고씨는 무엇보다 이번 일을 계기로 ‘조심하는 분위기’가 생긴 게 기쁘다고 말했다. “당장 스터디 모임이나 뒤풀이 자리에 나가보면 공기가 다르다. 그동안 당연했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다는 걸 당사자들뿐 아니라 가해자들이 깨닫게 된 게 큰 성과라고 생각한다. 폭로라는 방법의 전략적 효용 여부를 떠나, 일종의 ‘경고’ 역할은 확실히 하고 있다.”

“말하고 나면 그때부터 다음이 시작된다”

400명 이상의 성폭력 피해자를 만나온 미국의 정신분석학자 데이비드 칼로프는 성폭력 피해의 여파를 이렇게 설명한다. “성폭력 피해자들이 보이는 외상후증후군은 드레스덴 폭격, 아우슈비츠 포로수용소, 베트남·과테말라·보스니아 등 대학살이 일어난 마을,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브라질 고문실과 같은 집단 테러에서 살아남은 자들과 비슷한 증세를 보인다. 그들은 헛간, 다락방, 블라인드가 쳐진 공간에서 일어난 지극히 개인적인 전쟁에서 돌아온 용사이기도 하다.”

성폭력 생존자들을 위한 가이드북 〈아주 특별한 용기〉(동녘, 2012)의 저자들은 ‘침묵 깨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많은 생존자들은 다른 생존자들이 보여주는 용기를 보면서 동기 부여가 된다. 생존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친구에게 드러내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책을 쓰고, 가해자(혹은 기관)를 고소할 때 그녀는 다른 생존자들에게 침묵을 깨라고 자극하는 중이다. 많은 여성들이 다른 생존자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치유를 결심하게 된다.”

여성학자 권김현영씨 역시 “말하고 나면 그때부터 다음이 시작된다. 나아진다기보다 달라진다”라고 말했다. 수치심은 비밀스러운 베일에 싸여 있을 때에나 존재한다. 자신이 경험한 일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생존자가 지니고 살아온 수치심을 꺾을 수 있는 강한 힘이 된다.

강남순 미국 텍사스크리스천 대학 브라이트 신학대학원 교수는 성폭력에 대한 고발과 문제 제기를 단순한 사과나 처벌로 봉합할 게 아니라, 복합적으로 이해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표면에 드러난 특정 사건에 대한 분노만이 아니라, 성차별적 의식과 가치가 한국 사회 전반에 마치 공기처럼 퍼져 있어서 어떻게 많은 남성들 속에 ‘자연화’되어 있는지, 또한 여성들 스스로에게도 ‘내면화’되어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단순한 생존을 넘어 동등한 삶을 요구하는, 더디지만 변화의 과정으로 가는 길이 목소리들을 통해 이렇게 또 한 발짝 열렸다.

기자명 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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