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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라 부르기도 민망한 원고 뭉치”

2016년 12월 13일(화) 제482호
변진경 기자 alm242@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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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28일 국정 역사 교과서 현장검토본이 공개됐다.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 헌정 교과서’가 아니냐는 그간 의혹은 사실에 가까웠다. 공개하지 않았던 집필진도 드러났는데, 대부분 친정부·우편향 인사들이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지난 11월28일 국정 역사 교과서의 현장검토본이 공개됐다. 지난해 11월3일 고시를 확정하고 밀실 집필을 이어온 지 1년 만이다. 그간 국정교과서를 둘러싸고 비판과 의혹이 불거질 때마다 교육부는 “실제 나온 교과서를 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라며 자신감을 내보였다. 교육부가 자랑하는 대로 국정 역사 교과서가 진짜 ‘질 높고 균형 잡힌’ 교과서인지, 전문가들과 함께 그 내용을 검증했다.

교과서야? 오답 노트야?

국정 역사 교과서는 책 전반에 걸쳐 초보적인 사실 오류가 수두룩하다. 청동기 시대 단원은 첫 문장부터 틀렸다. “인류가 사용한 최초의 금속 도구는 청동기였다”(고등 <한국사> 20쪽). 고고학고대사협의회 김장석 회장(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설명에 따르면 인류가 사용한 최초의 금속 도구는 ‘청동’이 아닌 ‘순동’으로 만든 것이다. 김 회장은 “집필자의 무지함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다”라고 말했다.

ⓒ시사IN 이명익
그간 국정교과서를 둘러싸고 의혹이 불거질 때마다 이준식 교육부 장관(위)은 “실제 나온 교과서를 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라며 자신감을 내보였다.

근현대 단원에도 틀린 내용이 많다. 안중근 의사의 미완성 논책 <동양평화론>을 ‘자서전’으로 둔갑시키고(고등 <한국사> 190쪽), 1919년 9월 통합 임시정부 성립 당시 노동국 총판이었던 안창호를 내무 총장으로 잘못 표기했다(고등 <한국사> 210쪽).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한민국 건국 강령’ 일부 내용은 실제 원문과 다르다(고등 <한국사> 238쪽).

세계사 단원도 만만치 않다. 세계 최고(最古) 법전은 우르남무 법전인데, 함무라비 법전을 세계 최초의 법전으로 설명하거나(중등 <역사 1> 18쪽), 델로스 동맹과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성립 과정 순서를 뒤바꿔놓는(중등 <역사 2> 12쪽) 등 오류가 심각하다. 한국서양사학회 강성호 회장(순천대 사학과 교수)은 “서양사를 기술한 14쪽에서만 확실한 오류 19건을 찾아냈다. 한 쪽당 평균 1.5건으로, 이를 전체 교과서에 적용하면 오류 개수는 모두 400~ 500건에 이르지 않을까 싶다”라고 말했다.



‘박정희’ 23회나 언급

하지만 이런 오류들은 현대사 왜곡 서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현장검토본이 발표되기 전부터 국정교과서는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 헌정 교과서’가 아니냐는 의혹이 여러 차례 제기되었다. 실제 공개된 내용을 보면 의혹은 사실에 가깝다.

일단 국정교과서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언급하는 분량이 압도적으로 많다. 고등 <한국사>의 경우 261쪽에서 269쪽까지 9쪽에 걸쳐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이력과 업적을 다루었다. 한 쪽에 일곱 번 등장하기도 하는 ‘박정희’ 이름 석 자는 책 전체에서 총 23회나 언급된다. 교과서에 등장한 전 역사적 인물을 통틀어 가장 많다.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이신철 교수는 “예전 한 검정교과서의 경우 한 페이지에 ‘민족’이라는 단어가 아홉 번 등장해 ‘너무 민족주의적인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거기에만 비추어봐도 국정교과서가 얼마나 ‘박정희 찬양’ 책인지 알 수 있다”라고 말했다.

ⓒ연합뉴스
기업인과 함께 나온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진(맨 위·아래)은 뉴라이트 학자들의 <대안 교과서>에 실린 것으로, 이번 국정교과서에 그대로 옮겨졌다.

ⓒ연합뉴스


국정교과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포함한 5·16 군사 쿠데타 세력을 한국 경제발전의 주역으로 치켜세운다. 장면 정부의 경제개발 계획과 비교하며 5·16 쿠데타 세력의 경제개발 계획을 높이 평가하고(고등 <한국사> 260쪽), “경제개발을 최우선 과제로 설정한” 박정희 정부의 수출정책, 중화학공업 육성, 새마을운동 등의 장점을 자세히 설명했다(고등 <한국사> 264~268쪽). 박정희 집권 시대를 다룬 단원 소제목들을 살펴보면, ‘박정희 집권→경제발전’의 인과관계를 암시한다. ‘박정희 정부의 출범’ 뒤에는 ‘경제개발 계획의 추진’이, ‘유신 체제의 등장’ 뒤에는 ‘중화학공업의 육성’이 따라붙는 식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과오를 설명할 때는 항상 명분과 단서가 붙었다. 5·16은 “사회적 혼란과 장면 정부의 무능, 공산화 위협”(고등 <한국사> 261쪽) 때문에, 1965년 체결된 한·일 협정은 “경제개발을 위한 자금 마련을 위해”(고등 <한국사> 262쪽), 유신 체제는 “국가 안보를 명분으로”(고등 <한국사> 265쪽) 이루어진 것이라고 국정교과서는 설명했다. 박정희 정부의 새마을운동에 대해서도 아홉 줄에 걸쳐(고등 <한국사> 268쪽) 그 장점을 나열하다가 단점은 딱 한 줄, “유신 체제 유지에 이용되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라고 서술했다.

2008년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이 창립한 교과서포럼은 <대안 교과서 근·현대사>를 펴냈다. 친일을 미화하고 이승만·박정희를 찬양했다는 비판을 받은 이 책 195쪽에는 포항제철 착공식에서 발파 스위치를 누르고, 용광로에 불을 지피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진이 나란히 실렸다(왼쪽 위 두 사진). 이 두 사진은 이번 국정교과서 중등 <역사 2> 143쪽과 고등 <한국사> 267쪽에 각각 나눠 실렸다. 이제껏 역사 교과서에 수록된 박정희 관련 사진은 주로 쿠데타 당시 군복을 입은 모습이었다. 또한 이번 국정교과서는 이례적으로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고등 <한국사> 266쪽)도 다루었다.

ⓒ연합뉴스
이제껏 역사 교과서에 주로 실려온 쿠데타 당시 군복 차림의 사진(위)은 수록되지 않았다.

교과서가 재벌 홍보?


국정 역사 교과서에서 대한민국 경제개발의 주연이 박정희라면, 조연은 “재벌이라고 불리는 대기업 집단”이다.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 정책 아래) 재벌은 투자 규모가 큰 중화학공업과 신규 사업에 진출하였”고 “이후 미국, 유럽 등의 세계적 기업들과 경쟁할 수 있는 수준으로 성장하였다”(고등 <한국사> 267쪽). 교과서에는 삼성 이병철 회장, 현대 정주영 회장, 유한양행 유일한 회장을 ‘한국의 대표적인 기업인’으로 소개하며 그 업적을 기술하기도 했다. 이신철 교수는 “교과서에 특정 기업인과 현존 기업명을 홍보한 것이 불법이 아닌지 검토가 필요하며, 다른 경쟁 기업의 소송도 가능할 것 같다”라고 말했다.

정작 우리나라 경제개발에 헌신했던 노동자, 농민, 소상인 등은 ‘고속 성장의 그늘’이라는 소단락 안에서 짤막하게 다뤄졌다. 전태일 열사는 그의 주장에 대한 제대로 된 소개도 없이 “요구가 매번 묵살되자 분신자살”한 사람으로 표현했다.



독일 나치 정권도 미화

국정 역사 교과서는 우리나라 역사뿐 아니라 세계사도 왜곡했다는 지적을 받는다. 서양사학회 강성호 회장은 국정 중학교 <역사> 교과서가 독일 나치 정권의 등장 과정을 미화화고 부정적 서술을 최소화했다고 분석했다. “대공황을 전후하여 사회 혼란이 가중되자 사람들은 안정과 질서를 가져다줄 강력한 정권의 출현을 희망하였다”(95쪽)라는 설명이 대표적이다. 또한 국정교과서는 세계사 분량 대부분이 미국 역사 중심이며 동남아시아·인도·서남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에 대해 “광범위하고 철저한 무관심”을 보이고 있다고도 비판받았다. 실제 서양사 부문 집필진 3명 가운데 2명이 미국사 전공자다.

내용은 둘째 치고, 세계사를 ‘국정’으로 가르치는 것 자체가 국제사회에서 매우 부끄러운 일이라고 역사학자들은 말한다. 보통 교과서를 누가 편찬하느냐에 따라 국정(Government -issued Textbook System), 검정(Textbook Authorization System), 인정(Textbook Adoption System), 자유발행(Textbook Autonomy System) 체제로 나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국을 대상으로 중·고등 과정의 역사 교과서 발행 실태를 살펴보면, 국정제가 남아 있는 나라는 멕시코·그리스·아이슬란드·터키·칠레 등 5개국뿐이다(이 가운데 멕시코·터키·칠레는 검·인정도 병행한다). 국정과 정반대인 자유발행은 16개국이나 되었다. 서유럽 등 국내총생산(GDP)이 높을수록 상대적으로 자유발행제가 많다. OECD 회원국들은 국정→검·인정→자유발행제로 넘어가는 추세이지, 한국처럼 검정제에서 국정제로 역주행하려는 나라는 한 곳도 없다(<시사IN> 제333호 ‘역사의 주권은 국가에게 없다’ 기사 참조).

이신철 교수는 최근 만난 일본과 중국 출판 관계자 및 학자와 나눈 이야기를 들려주며 국정 역사 교과서에 대한 국제사회의 반응을 전했다. “일본에서 우익 교과서를 펴내는 우익 출판사 관계자가 한국에서 1년 안에 국정 역사 교과서를 펴낸다는 소식을 듣고 말문이 막혀 ‘아무리 한국이 압축 성장을 했다지만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놀라더라. 중국에서는 공산당 원로들이 ‘한국처럼 우리도 국정교과서를 내자’고 주장하고 나서 학계 학자들이 골치가 아프다는 얘기를 전했다. 이 얼마나 국제적 망신인가.”



ⓒ시사IN 신선영
11월30일 역사교육연대회의 소속 학자들이 국정교과서 내용을 분석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올드 보이’들이 쓴 낡은 교과서


역사학계 전문가들은 이번 국정 역사 교과서에 ‘한물간’ 학설도 잔뜩 실렸다고 지적했다. 대표 사례가 고려시대 권문세족을 권문(權門)과 세족(世族)으로 구분해 부른 것인데, 이는 오히려 교육부가 ‘최신 연구 성과를 반영했다’며 자랑스레 내세운 부분이다.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이익주 교수 설명에 따르면, 이런 구분법은 고려시대 변화와 발전을 강조하던 민족주의 사관을 비판하는 차원에서 1990년대에 제기된 학설로,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도 아니다. 이 교수는 “권문세족을 권문과 세족으로 기계적으로 분리하면 고려 후기 사회발전을 설명할 길이 없게 된다”라고 말했다.

조선시대 양반·상민·노비의 구성 비율에 관한 설명(고등 <한국사> 145쪽)이나 광주 학생 항일운동을 ‘여학생 댕기머리 희롱’으로 축소 묘사한 부분(고등 <한국사> 220쪽) 등도 학계에서 거의 폐기되다시피 한 학설이다. “동아시아에서는 서남아시아보다 농경이 늦게 시작되었지만”(고등 <한국사> 16쪽)이라는 설명은 50년 전쯤에나 통용되던 학설이다. 고고학고대사협의회 김장석 회장은 “남중국의 쌀 재배가 서남아시아보다 최소한 1000년 이상 빨랐다는 것이 고대사학계 상식이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낡은 학설이 교과서에 실린 원인은, 집필진 대다수가 현직에서 은퇴한 고령 연구자들이기 때문이다. 역사 전공 교수들은 “학회 활동도 하지 않아 최신 동향을 접할 길이 없는 은퇴 사학자들이 기존 교과서에서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답습하거나 자신의 특정 학설이 적힌 저서만 참고하다 보니 이런 낡은 교과서가 나온 것 같다”라고 입을 모았다.



이처럼 오류·왜곡투성이인 국정 역사 교과서를 두고 역사학계와 현장 교사들은 ‘수정’을 요구하지 않는다. 고쳐서 쓸 수 있는 수준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국역사교사모임 등 485개 단체가 속한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는 국정 역사 교과서에 대해 “교과서라는 이름을 달기에도 민망한 원고 뭉치일 뿐”이라며 즉각 폐기하고 교육부 장관이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교육부는 12월23일까지 현장검토본에 대한 국민 여론을 듣고 현장 적용 방법을 검토하겠다는 방침이다. 국정·검정 교과서를 1년 동안 혼용하는 방안 등도 거론되지만 박근혜 정부 특유의 ‘물타기’와 ‘시간 벌기’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교육부는 12월1일 “국정교과서를 거부하는 교육감에게는 시정 명령과 특정 감사 등 모든 방안을 강구할 것”이라며 엄포를 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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