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걸, 이게 뭐라고 긴장이 될까. 인터넷에서 ‘대포폰 구입’이라는 키워드를 넣어 가장 처음 나온 연락처로 전화를 거는 순간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구매 절차를 꼬치꼬치 물어봐도 되나?’ ‘그것도 모르냐면서 기자 아니냐고 하면 뭐라고 대답하지?’…. 첫 전화는 실패했다. 없는 번호였다. 적발될까 봐 수시로 번호를 만들고 없애는 모양이었다. 다른 업체를 찾아서 연락했다. 대포폰 구입 문의를 한다고 말문을 여니, 상대방은 자기네는 삼성 폰만 취급한다는 말부터 지하철 배송과 오토바이 퀵에 따른 가격 차이까지 술술 이야기했다. 괜한 걱정이었다.

ⓒ시사IN 양한모

상대방은 내가 누군지 전혀 궁금해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지하경제에서 활약하는 이에게 대포폰을 사는 사람 신분이 뭐가 중요할까. 경찰만 아니면 되지(대포폰 판매와 구매는 징역 3년 이하 또는 벌금 1억원 이하 처벌을 받는다).

그 덕분에 최순실 일가의 대포폰 사용 취재에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었다. 최순실씨 집에서 잠시 살았을 정도로 가까이 지냈던 한 취재원의 말에서 취재가 시작되었다. 그는 최씨 일가가 사용했던 대포폰을 또렷이 기억했다. 색깔과 기종까지 자세히 알려주었다. 끝자리가 ‘1001’ ‘8888’과 같은 황금번호도 썼지만 ‘1600’ ‘1800’ ‘5655’ 등 다양한 번호로 대포폰을 만들고 사업 관계에 있던 이들에게도 나눠주며 사용하도록 했다고 한다.

최순실·장시호씨의 보안 의식은 유별났다. 사업을 하면서도 절대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관련 문건 파쇄는 기본이고, 서류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이메일 등 비밀번호도 수시로 바꿨다. 신용카드 대신 현금을 주로 썼다. 국정원 댓글 사건을 취재할 때가 떠올랐다. 정치·선거 개입 댓글을 달던 국정원 요원들은 ‘신용카드 사용금지, CCTV 안 보이는 자리에 앉기, 드나드는 카페 주기적 교체’ 등 매뉴얼에 따라 공작했다. 음습하고 무언가를 감춰야만 하는 이들의 공통점인 것 같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직 최순실 일가가 관여한 일의 10%도 나오지 않았다는 한 취재원의 말이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예전 같았으면 ‘에이 설마’ 하며 합리적 의심의 범위를 벗어났던 의혹들이 이번 사건에서는 대부분 팩트가 되었다. 그래서 아찔하다. 지금까지 보고 들은 건 겨우 예고편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마저 든다. 갈 길이 아직 멀다.

기자명 김은지 기자 다른기사 보기 smi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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