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현실(VR)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꿈꿔온 기술이다. 복잡한 기계 장치를 머리에 쓰고 가상의 체험 속에 빠져든다는 상상은 1935년 과학소설(SF)에서 처음 등장했다. 미국 작가 스탠리 웨인바움이 쓴 〈피그말리온의 안경〉에서다. 이 소설의 ‘미친 과학자’인 루드비히 교수는 ‘우리는 감각을 통해서만 현실을 파악’하기 때문에 감각을 완벽히 재현하면 꿈을 현실로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루드비히 교수는 영상과 소리뿐 아니라 냄새와 맛까지 재생할 수 있는 ‘마법 안경’을 만들었다. 소설 속 주인공은 이 안경을 쓰고 미리 교수가 만들어둔 가상현실을 다섯 시간 동안 체험하면서 가상의 캐릭터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소설 속에서 교수는 이 ‘마법 안경’을 대기업에 팔려 했지만 ‘화질이 뿌옇고 한 번에 한 명만 쓸 수 있으며 너무 비싸다’는 이유로 거절당한다.

2014년, 미국 스타트업 ‘오큘러스 VR’은 진짜 ‘마법 안경’을 만들었다. 이 안경 역시 SF 속에서 대기업에 거절당한 그 제품과 정확히 같은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기업의 반응은 달랐다. 페이스북은 무려 2조5000억원을 주고 오큘러스 VR을 인수했다. 사람들은 흥분했다. 가상현실 기술이 드디어 충분히 무르익었다는 희망이 빠르게 퍼졌다. 다른 기업들도 부랴부랴 움직였다. 곧이어 HTC는 ‘바이브’를, 소니는 ‘플레이스테이션 VR’을, 구글은 골판지로 저렴하게 만들 수 있는 ‘카드보드’를 내놓았다. 삼성전자는 페이스북과 제휴해 ‘기어 VR’을 출시했고 벌써 수백만 대를 팔아치웠다.

ⓒ연합뉴스서울 역삼동의 VR 기반 복합 문화 공간 ‘VR 플러스 쇼룸’ 에서 한 방문객이 VR 기기를 체험하고 있다.
‘마법 안경’은 소설 속 상상보다 훨씬 단순한 구조로 되어 있다. 먼저 눈앞에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화면과 큰 볼록렌즈를 둔다. 이렇게 하면 커다란 텔레비전이 시야를 가득 채우는 것처럼 화면이 크게 보인다(다만 확대했기 때문에 해상도는 낮아진다). 그다음에는 센서로 머리의 방향을 인식해 보는 방향에 맞는 영상으로 계속 바꾸어 보여준다. 물론 사용자가 자연스럽게 느끼게 하기 위해서는 이 반응이 매우 빨라야 한다. 센서나 프로세서 같은 전자 부품들의 성능이 좋아지면서 최신 기기들은 반응속도(머리가 움직인 후 화면이 바뀌는 데 걸리는 시간)가 50분의 1초 이하로 줄어들었다. 아직 어지러움을 호소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럭저럭 자연스럽다는 평가가 많다.

이런 VR 헤드셋으로 경험할 수 있는 세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게임이다. 컴퓨터그래픽을 이용해 실시간으로 그려내는 진정한 가상의 세계다. 오큘러스나 바이브는 이곳에 집중한다. 고사양 PC에 케이블로 VR 헤드셋을 연결한다. 이렇게 만든 세계는 보는 방향뿐 아니라 몇 발짝 정도의 움직임에 따른 변화도 그려내고, 사용자와 상호작용도 가능하다. 다만 게임용 VR 헤드셋은 가격이 60만원 이상이며(둘 다 국내에는 정식 발매되지도 않았다), 이와 연동되는 PC는 훨씬 더 비싸다. 진지한 게이머들 외에는 구매를 결정하기가 어렵다. 유선의 불편함도 단점이다. 게임 중에 (VR 헤드셋을 쓰면 보이지도 않는) 케이블에 걸려 넘어지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 다른 세계는 360° 영상이다. 이름 그대로 앞뒤, 좌우, 위아래의 모든 방향의 영상을 한 장면으로 합친 것이다. ‘기어 VR’이나 ‘카드보드’처럼 스마트폰을 이용하는 VR 헤드셋은 PC보다 컴퓨터그래픽 처리 능력이 부족해서 게임보다는 360° 영상을 보는 데 적합하다. 이런 360° 영상은 VR 헤드셋 없이도 쉽게 체험할 수 있다. PC에서는 마우스로 잡아끌어서, 스마트폰은 터치하거나 직접 스마트폰을 움직여서 원하는 방향의 영상을 볼 수 있다.

360° 영상을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다음 로드뷰나 네이버 거리뷰도 360° 영상이다. 길거리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둔 것이 로드뷰인데, 동일한 원리로 동영상도 찍을 수 있다. 로드뷰 같은 360° 영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여러 대의 카메라로 모든 방향을 촬영해야 한다. 그리고 사진들을 짜깁기(stitching)하는데, 한 시점에서 보이는 모든 영상은 구(球) 형태이므로 이를 (지구를 세계지도로 표시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평면에 펴서 한 장의 영상으로 만든다. 이런 360° 영상을 VR 헤드셋으로 보면 느낌이 많이 다르다. 당장 VR 헤드셋으로 ‘구글 스트리트뷰’를 보면, 지구촌 구석구석 작은 골목까지 가본 것 같은 현실감을 약간이나마 느낄 수 있다. 사물의 크기나 거리감이 실제와 같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감에 가장 먼저 주목한 쪽은 성인 영상물 업계였다. 이제껏 나온 360° 콘텐츠 가운데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한 것이 ‘19금’ 성인 영상물이다. 좋든 싫든 이런 성인 콘텐츠가 IT 기술 확산의 큰 동력이 되어왔기 때문에, 성인 영상 덕분에라도 VR이 성공할 것이라고 예측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국 사람들은 ‘VR 우동’이라는 은어로 VR 성인 영상을 검색한다. 이런 ‘VR 우동’을 사업화하겠다는 국내 벤처기업도 있다. 이 회사는 국산 에로 영화를 중심으로 한 360° 동영상 플랫폼을 오픈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숙박업소와 계약해 객실에 VR 헤드셋을 비치하겠다는 계획도 내놓았다.

최근 저널리즘 분야에서도 VR 기술이 쓰이고 있다. 〈타임〉은 〈라이프 VR〉을 만들었다. 대표적인 시사 화보 잡지였던 〈라이프〉는 인터넷에 밀려 2007년 문을 닫았는데, 그 이름 뒤에 VR을 붙여 시대에 뒤처지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뉴욕 타임스〉는 삼성전자의 ‘기어 360’을 협찬받아 매일 한 편 이상의 360° 영상을 올리는 ‘데일리 360’을 운영 중이다.

VR 헤드셋 끼고 촛불집회 ‘원격 참가’ 해볼까

360° 영상은 기존 영상과 무엇이 다를까? 기존 영상은 항상 ‘앵글’이 있었다. 현장의 어떤 부분을 보여줄지 촬영하는 사람이 결정했다. 하지만 360° 영상은 다르다. 항상 전체 현장을 기록한다. 현장의 더 많은 모습을 보여줄 뿐 아니라 의도가 배제된 객관적인 영상을 얻을 수 있다. 이런 특징 때문에 의외의 결과가 생기기도 한다. 서울 강남역 화장실 살인사건의 피해자 추모 메모를 훼손하던 한 남성이 한 언론사의 360° 영상 한구석에서 포착되기도 했다.

360° 영상을 실시간으로 생중계하면 현실감은 더 커진다. 가고 싶지만 갈 수 없는 곳에도 갈 수 있다. 일본에서는 거동이 어려워서 손자의 결혼식에 갈 수 없는 할머니를 위해 VR 생중계를 이용하는 프로젝트가 진행됐다. 할머니의 집과 300㎞ 떨어진 결혼식장에는 카메라가 달린 로봇이 대신 참여해 손자와 껴안았다. 이런 ‘원격 존재(Telepresence)’는 VR 생중계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모습이다. 최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매주 벌어지는 촛불집회 현장을 360° 생중계하는 언론사도 있다. 진짜 광화문에 와 있는 것 같다거나, 해외에 있어서 참석하지 못한 안타까움을 달랬다는 댓글이 달렸다. 아직 시청자가 많지 않지만 VR 헤드셋을 쓰고 볼 때의 몰입감을 고려하면, 이 시청자들도 참가자 수에 보탤 만하다.

하지만 현재의 360° 영상 기술은 한계가 뚜렷하다. 화질이 낮다는 것이 가장 큰 불만이다. VR 헤드셋의 화질이 부족하고 360° 영상의 화질도 떨어진다. 카메라 가격도 비싸고 이를 방송 제작 환경에서 운영하기도 어렵다. 기술적 한계는 천천히 개선되고 있지만 이보다 촬영 기술이나 편집 기술,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VR에 맞는 기획력과 상상력이 더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구글이 자신들의 새로운 VR 헤드셋에 ‘백일몽(daydream)’이라는 낭만적인 이름을 붙인 것처럼 가상현실 기술은 ‘꿈같은 체험’을 추구한다. 〈피그말리온의 안경〉 속 주인공은 가상의 캐릭터와 서로 자신의 세상이 진짜라고 논쟁한다. 장자(莊子)의 꿈속 나비 이야기와 비슷하다. ‘내가 나비의 VR 체험 중인지, 나비가 내 VR 체험 중인지’ 헷갈릴 날은 당분간 오지 않겠지만, 가상현실에 대한 상상력을 발휘하기에는 충분한 시기다.

기자명 김응창 (SK텔레콤 디바이스 테크랩 매니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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