끌려갔던 소녀는 제자리로 돌아왔다. 부산 시민의 힘으로 만든 부산 평화의 소녀상은 주부산 일본 총영사관(이하 일본 영사관) 30m 앞에 설치됐다. 부산 시민 5143명이 기금을 모았고 시민단체와 노조 30여 개가 힘을 보탰으며 대학생 20여 명이 경찰에 연행된 끝에 이룬 결과였다.

부산 소녀상 설치 운동은 2015년 12월28일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 본격화되었다. 지난해 내내 대학생과 시민 600여 명이 부산 동구 고관로에 있는 일본 영사관 앞에서 소녀의 모습을 한 채 침묵시위를 벌이는 ‘인간 소녀상 1인 시위’를 진행했다. 지난 350일간 꾸준히 1인 시위에 참여한 마희진씨(22)는 “부산에는 소녀상이 없으니까 우리 스스로가 소녀상이 되면 된다는 마음으로 흰 저고리와 검정 치마를 입고 시위를 했다”라고 말했다.

인간 소녀상 시위를 하던 중 영사관 앞에 소녀상을 세우자는 제안이 나왔다. 지난해 6월 부산우리겨레하나와 부산여성연대 등 30여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미래 세대가 세우는 평화의 소녀상 추진위원회’가 만들어졌다. 3개월여 만에 8500여만 원이 모였다. 설치를 위해 부산시·부산 동구청과 협의에 들어갔다. 하지만 부산시는 부산 동구청 관할이라며 판단을 미뤘다. 부산 동구청은 ‘기초지자체가 판단하기에는 민감한 사항’이라며 외교부에 조언을 구했다. 이에 외교부는 지자체가 알아서 할 일이라며 책임을 떠넘겼다. 협의가 지연되자 시민단체는 행동에 나섰다. 지난해 12월28일 낮 12시30분 일본 영사관 정문에서 수요집회를 여는 사이 영사관 후문 30m 앞 일장기를 바라보는 곳에 소녀상을 설치했다. 그날 오후 2시 동구청 도시안전과 공무원 40여 명이 ‘인도에 설치된 노상적치물이 도로의 통행을 방해한다’는 도로법을 근거로 소녀상을 철거했다. 후폭풍이 만만치 않았다. 이튿날 오전부터 동구청 도시안전과를 비롯한 구청 모든 부서에 항의 전화가 빗발쳤다. 동구청 홈페이지는 접속자 과다로 서버가 다운됐다.

ⓒ연합뉴스주부산 일본 총영사관 앞에 다시 설치된 소녀상.
부산 동구청은 소녀상을 철거했지만 무게 1.5t, 높이 1.5m인 소녀상을 제대로 보관할 곳이 없었다. 소녀상을 실은 트럭이 갈 만한 곳이라고는 고가도로 밑, 서너 군데의 쓰레기 선별장과 건설자재 야적장 등이었다. 〈부산일보〉 등 언론사의 취재로 소녀상이 고가도로 아래 건설자재 사이에 방치돼 있다는 사실도 보도되었다. 시민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시민들이 답을 주었다”

결국 박삼석 부산 동구청장은 지난해 12월30일 소녀상을 돌려주고 앞으로 소녀상 설치에 관해 어떠한 개입도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소녀상은 같은 날 오후 2시, 일장기가 보이는 일본 영사관 앞 30m 인도에 설치됐다. 지난해 12월31일 저녁 9시 제막식을 열었다. 부산 서면에서 촛불집회를 마친 뒤 5㎞를 행진해온 시민 3만여 명이 함께했다. NHK 등 많은 일본 언론사도 제막식을 중계했다.

일본 외무성과 일본 관방장관은 1월4일까지 두 차례에 걸쳐 유감을 표명했다. 일본 영사관도 “소녀상 설치는 2015년 12월28일 한·일 ‘위안부’ 합의 정신에 위배돼 매우 유감이다. 빈 협약 제31조 3항에 따라 영사 기관의 안녕을 방해하고 위엄을 침해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라며 유감을 표했다. 또 일본 정부는 1월6일에는 나가미네 야스마사 주한 일본 대사와 모리모토 야스히로 부산총영사를 일시 귀국시켰다. 현재 진행 중인 한·일 통화스와프 협상도 중단했다.

기금 모금부터 소녀상 설치까지 진행한 한은주 부산겨레하나 금정지부장은 “제작 기금을 다 모을 수 있을까, 설치할 수 있을까, 철거되면 되찾을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 부딪힐 때마다 시민들이 답을 주고 힘을 보탰다. 역사를 기억하는 명소로 만들겠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조소희 (〈부산일보〉 기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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