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디 드라마 속 재벌 2세 주인공이 주는 달콤한 환상으로도 시대 전체가 느끼는 불안을 감출 수는 없었다. 개인의 삶은 여전히 고용불안과 무한경쟁의 정글로 내쳐진 상태였다. 국가가 IMF 관리 체제를 극복했다고 말하며 샴페인을 터뜨리던 시절, 사람들은 서서히 나의 행복과 국가·기업의 행복이 서로 무관할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내 삶은 변함없이 고통스럽고 불안한데 고통을 분담하자던 재벌들은 나날이 승승장구했다. 2000년대 중반쯤 들어서면, 트렌디 드라마 속 재벌 2세 또한 천천히 ‘실장님’이나 ‘본부장님’처럼 혈연 대신 능력으로 그 자리에 올라간 이들로 대체되기 시작한다. 재벌이 유사 가장이자 울타리를 제공하는 왕국일 수 있었던 시절의 향수는 점점 그 효험을 잃었다.

IMF 관리 체제 한가운데에서 방영을 시작한 MBC 〈국희〉(1999)는 크라운제과의 성공 사례를 모티브로 삼은 작품이었다. 빵 표면에 식용 글리세린을 발라 빵의 변질을 막고, 크래커 사이에 땅콩크림을 넣어 만든 샌드과자로 선풍적 인기를 끌며 일어난 기업이라는 설정은 실제 크라운제과의 전신인 영일당의 역사를 가져왔다.

ⓒMBC 〈국희〉 화면 갈무리MBC 드라마 〈국희〉(위)의 주인공 국희는 정의로운 기업인이 되어 기업을 탄탄하게 이끈다.
그러나 국희(김혜수)의 인생 역정은 정성희 작가의 창작이었다. 친일파 양부에게 독립군 친아버지를 잃고 재산도 모두 빼앗긴 천애의 고아. 정직하게 먹고살아보겠다고 제빵 기술을 배워 일어났으나 자신의 특허를 도둑질해간 양부 탓에 위기에 처한다. 하지만 기지를 발휘해 재기에 성공한 것도 모자라 친일파 양부가 죗값을 치르도록 만드는 국희의 일대기는 실제 크라운제과의 역사나 해방 후 한국 기업들의 성장 역사와는 큰 연관성이 없었다.

〈국희〉가 창작을 통해 시청자들에게 제공한 서사는 단순히 기업의 성공담이 아니다. ‘불의한 방법으로 부와 권력을 축적한 양심 없는 상대 기업(과 친일파 잔존 세력) 때문에 고통받던 선량한 주인공(과 시청자인 나)의 성공담’이다. 드라마를 통해서라도 악이 패배하고 마침내 정의가 승리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이들의 무의식이 〈국희〉에 호응한 셈이다.

여기에서 주인공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주체인 친일파 양부 송주태(박영규)가 국희보다 먼저 더 큰 성공을 거둔 기업인으로 그려지는 건 의미심장하다.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제과시설을 인수해 성장한 풍강제과는, 작은 빵집에 불과한 태화당의 비법을 도둑질해 먼저 특허를 내는 비양심적인 회사로 그려진다. 겉으로는 번지르르한 성공을 자랑하는 기업이 온갖 범죄와 편법으로 점철되어 있었다는 설정은, 〈국희〉가 아이러니하게도 기업에 대한 대중의 적개심에 힘입어 성공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소시민 국희가 기업인이 되어서도 정의를 구현해 태화당을 성장시키고 나아가 풍강제과를 인수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모든 기업인이 다 부패한 것이 아니라 권선징악을 이루어낸 사례도 있었다’는 판타지를 제공했다. 마치 양심적이고 선량한 정치인에 대한 판타지가 기존 정치권에 대한 혐오에 기대고 있는 것처럼, 〈국희〉는 기업에 대한 대중의 혐오와 기대라는 양가감정에 기반을 둔 성공작이었다.

ⓒMBC 〈영웅시대〉 화면 갈무리MBC 드라마 〈영웅시대〉(위)는 재벌 창업주들의 일대기를 그렸지만 방영 내내 논란이 일었다.
반면 같은 방송사에서 2004년 방영을 시작한 대하드라마 〈영웅시대〉도 실제 기업을 모델로 삼아 폐허가 된 조국에서 맨주먹으로 일어선 기업인들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이었지만 방영 내내 여러 가지 잡음에 시달려야 했다. 현대와 삼성을 모델로 삼은 세기그룹과 대한그룹의 성장기는 〈국희〉에 비하자면 집요할 정도로 실제 사건을 흡사하게 모사하는 데 공을 들였다. 드라마 첫 회부터 천사국(김갑수, 고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을 모델로 함)의 투신자살 장면으로 시작해 현대의 경부고속도로 건설이나 삼성의 사카린 밀수와 같은 한국 기업사의 중요한 장면들을 고스란히 드라마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노동자는 없고 신화론적 재벌 인식만

판타지를 그릴 공간은 축소되고 실제 역사의 비중이 늘어났으니, 재벌 창업주들에 대한 긍정적인 묘사는 마치 실제 역사에 대한 작가의 코멘트처럼 작용했다. 재벌들을 국가경제를 위해 이바지한 선량한 주역으로 그리고, 개발독재를 주도한 박정희의 여러 과오를 측근들의 잘못인 것처럼 축소하는 역사 왜곡의 혐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모델이 된 회사로부터 모티브만 따와서 시청자들의 판타지를 충족시켰던 〈국희〉와 달리 〈영웅시대〉는 논쟁적인 반응을 피할 수 없었다. 이환경 작가는 시청자들이 사극을 보듯 편안하게 드라마를 봐주길 바란다는 뜻을 밝혔지만 그러기에는 작품이 다루는 소재 자체가 달랐다. 이미 사라진 봉건왕조의 흘러간 역사를 다루는 사극과, 우리가 살고 있는 민주국가에서 압도적인 힘을 과시하는 재벌의 역사를 다룬 드라마를 동일 선상에 놓기는 어려운 노릇 아닌가.

그 무렵 이환경 작가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재벌은 노동자의 권익이 전무하던 시대에 정권의 비호하에 이뤄진 집단이고 사라질 확률이 높다”라며 “나는 노동자 출신이다. 애써 그들을 미화할 이유가 전혀 없다”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시청자들이 동의하지 못했던 것은 〈영웅시대〉를 ‘황무지에서 신화를 만들어낸 인간 중심주의’라고 설명하는 세계관 자체였다.

재벌이 개발독재와 정권의 비호 속에서 노동자의 권익을 억누른 대가로 성장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그 서사를 창업주 개인과 몇몇 가신들이 일궈낸 ‘신화’라고 인식하는 세계관은 인간 중심주의라기보다는 신화론적 인식에 가까웠다. 재벌을 미화할 의도가 없다는 작가의 말은 아마 진심이었으리라. 재벌의 성장사를 묘사하는 그의 관점 자체가 이미 ‘맨주먹으로 성공을 일궈낸 몇몇 영웅들의 시대’로 당대를 축약하는 세계관에 갇혀 있는데 굳이 추가로 미화할 이유는 없었을 테니 말이다.

회사는 다시 성장가도로 복귀했는데 내 생활과 일자리는 예전 같지 못한, ‘내’가 없는 경제 회복에 불안해하던 당대의 한국인들에게, ‘노동자’ 없는 재벌 신화인 〈영웅시대〉가 전달하고자 했다는 꿈과 희망은 잘 와 닿지 않았다. 당장 텔레비전을 끄면 구조조정의 압박과 불안정 노동의 물결이 내 목줄을 죄는데, 대통령과 담판을 지어 취업길을 뚫어내는 드라마 속 박대철(유동근·현대건설 재직 시절의 이명박을 모델로 함)의 신화가 내게 힘이 되긴 어려운 일이었다.

이후 한국의 대중문화 속에서 기업들이 묘사되는 방향은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재벌과 개발독재 시기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가상의 세계 안에 반영된 기업 묘사 또한 함께 달라진 것이다. 환상이 고갈된 자리에, 자본이 우리를 구원하지 않을 것이란 사실만 날로 선명해지고 있다. 텔레비전 밖에서나, 텔레비전 안에서나.

기자명 이승한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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