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옛날 음악 얘기를 좀 해본다. 오래되었지만 현 시국에 적확하게 들어맞는 그런 음악 얘기다. 일단 시제를 1980년대로 돌려보자. 당시 미국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집권하에 있었다. 미국 위스콘신 대학 교수이자 역사가인 크레이그 워너가 지적했듯이, 레이건 대통령 재임 기간은 “미국 내 인종 관계에서 19세기 후반 이후 최악”인 시절이었다. 거칠게 분류하자면 백인 기득권층과 흑인 소외계층, 즉 부자와 빈자 간의 갈등이 절정으로 치달았고, 이는 결국 엄청난 부의 불균형을 낳으며 미국 사회를 둘로 갈라버렸다.
실제 통계가 이를 증명한다. 1983년부터 1989년 사이 미국 상위 1% 가구의 부는 66%나 증가했고, 1983년 미국 백인 가정은 평균 흑인의 11배, 1989년에는 22배가 부유해졌다고 나타났다. 이뿐 아니다. 이른바 레이거노믹스로 불리던 신자유주의 기치 아래 빈민, 노동자, 마약중독자, 에이즈 환자, 동성애자 등은 철저히 외면당할 수밖에 없었다. 시사평론가 케빈 필립스가 1980년대를 “미국 상류층의 승리였다”라고 단언한 근거다. 자연스레 1980년대는 크레이그 워너의 말마따나 “치유의 동력으로서 음악이 저점을 찍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기성에 대한 반항으로부터 출발한 로큰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주지하다시피, 독재정권 치하에 있던 우리나라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최근 해석을 둘러싸고 첨예한 대립이 벌어진 신중현의 작품 ‘아름다운 강산’이 그 좋은 예다. 기실 이 곡은 신중현이 당시 최고 권력의 명령을 거부하고 만든 곡이었다. 그런데 글쎄, 나도 롤랑 바르트를 존경하지만 “해석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야 한다”라는 명제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로 지정했다고 가정해보자. 이걸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취존’과 ‘개취’라는 상대주의도 좋지만…
바꿔 말하면, 어느새 우리는 끝없는 상대주의의 덫에 걸려버린 게 아닌가 생각한다. ‘취존(취향 존중)’ ‘개취(개인 취향)’라는 표현만 봐도 그렇다. 그래, 모든 이들의 음악적인 취향을 인정해야 한다고 치자. 이렇게 되면, 이 세상 사람들이 듣는 모든 음악이 저 나름대로 ‘다 좋은 것’이라는 결론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 정말로 그렇다고 확신하는가? 혹시 이것은 위선이 취하는 또 다른 가면이 아닐까? 물론 나도 타인의 취향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만약 누군가의 취향이 별로라고 느껴지면, 적어도 아예 언급하지 않거나, 내가 더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설득력 있게 권하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뿐이다. 허망한 객관을 늘어놓기보다는 매혹적인 주관을 조리 있게 펼쳐낼 수 있는, 그런 사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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