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계에서 특정 대상에 대한 박근혜 정부의 고의적 지원 배제 의혹이 처음 불거진 때는 2014년 연말이었다. 서울연극협회가 주관하는 ‘2015 서울연극제’가 아르코예술극장 대관 심의에서 탈락한 것이다. 이 일을 두고 2014년 연말부터 2015년 연초에 걸쳐 연극계는 강력한 항의 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엄청난 규모의 블랙리스트를 기반으로 한 문화예술계 검열이 전방위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리라고는 거의 짐작하지 못했다.

이후 ‘블랙리스트’의 존재 가능성이 처음으로 시사된 것은 2015년 9월10일 JTBC 보도를 통해 폭로된 ‘2015년 창작산실’ 검열 사태였다. 필자는 바로 ‘2015년 창작산실’ 연극 분야 심사위원이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하 문예위)가 주관한 창작산실 시범공연 심사는 2015년 4월7일부터 11일까지 서울 동숭아트센터 소극장에서 이루어졌다. 심사 대상 작품은 총 15개였고 5일간 심사위원 다섯 명이 시범공연을 관람하며 심사를 진행했다.
 

ⓒ시사IN 신선영1월20일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예술인 블랙리스트 작성 혐의와 관련해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서울중앙지법에 출석하고 있다.


심사 마지막 날인 4월11일 점심시간에 갑자기 당시 문예위 창작지원부의 장용석 부장이 나타났다. 그는 문제가 되는 작품들이 있으니 이들을 최종 선정에서 배제해줄 것을 요구했다. 심사위원 중 김 아무개 연출가(2016년 작고)는 불같이 화를 내며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필자는 오후에 심사 대기 중인 마지막 두 작품을 고려하여 끝까지 심의에는 참여하지만 특정 작품을 배제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혔다. 장용석 부장은 뛰쳐나간 김 아무개 연출가를 다시 정중히 모셔왔고 오후 심의가 진행되었다. 심사위원들은 전원 합의로 15개 작품 중 8개 작품을 지원대상작으로 선정했다. 또 혹시 모를 결과 조작에 대비해 심사평에 이례적으로 작품 이름들을 일일이 열거했다.

4월11일에 끝난 심사 결과는 두 달을 넘겨 6월이 되었는데도 발표되지 않았다. 급기야 문예위는 6월18일에 심사위원 전원을 재소집해 심사 결과를 번복하라고 요구했다. 이 자리에는 장용석 부장과 함께 당시 문예위의 이한신 예술진흥본부장이 나왔다. JTBC가 보도한 대로 그들은, “세 개 작품이 문제인데 박근형의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만 빼주면 나머지는 봐주겠다”라고 했다. 그들은 박근형이 2013년에 국립극단에서 연출했던 〈개구리〉가 박정희 전 대통령과 박근혜 현 대통령을 비판했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박근형을 배제하지 않으면 발표가 계속 미뤄지고 나머지 7개 작품도 지원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협박’까지 했다. 그리고 그들은 문체부로부터, 아니 더 윗선으로부터 내려오는 모종의 리스트가 존재함을 암시했다. 이른바 ‘블랙리스트’였던 것이다.

심사위원들이 심사 결과를 바꾸지 않자 이한신과 장용석은 그다음 날쯤 아예 박근형 연출가를 찾아가 지원 수혜를 포기하라고 종용했다. 6월21일 일요일에 장용석 부장은 필자에게 다시 만나자고 했다. 그는 박근형이 지원금 포기를 약속했는데 위에 보고했더니 “박근형을 뭘 믿고 그냥 말만 듣고 왔느냐, 각서라도 받아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더 이상 예술가를 모욕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이한신과 장용석은 6월22일 오후에 박근형을 다시 만나 결국 포기 각서까지 받아냈고, 각서상의 날짜를 ‘7월15일’로 요구했다.

‘창작산실’ 심사 결과는 6월29일에 발표되었다. 물론 이 발표에는 박근형의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 후 문예위 직원 누군가는 8월4일 날짜로 문예위 행정시스템에 들어가 극단 측이 한 것처럼 포기 신청을 입력했다. 이는 명백한 범법 행위이다. 2015년 국회 국정감사에서 이한신은 “포기하기로 하셨는데 또 ‘홈페이지에 들어가셔서 이렇게 저렇게 등록하셔야 됩니다’라고까지 말씀드리는 것이 정말 송구스러웠습니다”라면서 문서 조작을 인정한 바 있다.

당시 사태의 추이를 이토록 자세히 복기하는 것은 블랙리스트의 실행 과정이 얼마나 악랄하고 집요했으며, 우리 시대 최고의 예술가를 얼마나 고통스럽게 했는가를 기록하고자 함이다. 박근형은 개인적으로 감사원 감사도 두 차례 받았으며 오랜 기간 신변의 위협을 느꼈다고 한다.

표현의 자유 억압이자 예술 향유권 강탈

2015년 9월10일 관련 보도가 나간 후, 연극계는 너나없이 충격과 분노에 휩싸였다. 창작산실에 선정된 7개 극단은 지원을 받느냐, 거부하느냐를 놓고 격론을 벌였다. 결국 박근형의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를 제외한 7개 작품으로 그해 ‘창작산실’ 무대가 꾸며졌지만 연극계의 내홍은 깊어만 갔다. 2015년 겨울에는 ‘세월호’를 연상시킨다고 한국공연예술센터가 공연을 방해한 ‘팝업씨어터’ 사태, 박근형이 연출 작업에 참여하는 것을 트집 잡은 국립국악원의 ‘소월산천’ 사태가 연이어 터지면서 연극인들은 칼바람 부는 길거리로 검열 반대 시위를 나섰다. 연극인들의 결사적인 투쟁은 장장 5개월에 걸쳐 21개 극단이 참여한 ‘권리장전 2016_검열각하’로 이어졌다. 그리고 ‘검열각하’ 프로젝트가 끝나갈 무렵, 블랙리스트의 실체가 드디어 만천하에 공개되었다.

 

 

 

ⓒ연합뉴스블랙리스트 예술인 배제를 실제로 집행한 기관인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권영빈 전 위원장(왼쪽)과 박명진 현 위원장(오른쪽).

 


〈한국일보〉를 통해 보도된 블랙리스트 9473명의 이름은 사실 기본 바탕에 불과했다. 최근 특검과 국정조사 청문회를 통해 블랙리스트는 청와대와 국정원과 문체부에 의해 더 정교하게 가다듬어지고 치밀하게 관리되었음이 드러나고 있다. 예를 들어 필자가 참여했던 ‘2015 창작산실’ 연극 분야 심사 과정에 대해서도 ‘심사 전 4건 발굴(3건 제외, 1건 배제 불발)’ ‘심사 후 특이사항 2건 통보’ ‘현장에서 공연을 직접 보면서 인터뷰하는 실연 심사 방식상 사전에 협의했음에도 불구, 5명 중 2명의 심사위원이 강하게 반발하여 1건 배제 불발’이라는 구체적 보고가 문체부의 문건에 올라가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된 3건의 작품은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박근형 작·연출), 〈고제〉(백하룡 작·전인철 연출), 〈떠도는 땅〉(동이향 작·연출)이며 문예위 자체 검토 의견까지 첨부되어 있다.

문체부의 블랙리스트 관련 문건에는 2015년 5월 기준으로 문예위에 접수된 지원 신청 3360건 중 448건이 선정되고 133건이 배제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블랙리스트를 구체적으로, 직접적으로 실행한 핵심 기관이다. 권영빈 전 문예위원장과 박명진 현 문예위원장은 결코 이 책임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연극계 검열 사태의 시초가 된 서울연극제 대관 심의에 대해서도 “서울연극협회 등 편향 단체가 관행적으로 지원받는 사업에 대한 철저한 심사를 통해 지원 차단 조치”라고 명시되어 있다.

연극, 무용, 음악, 미술, 문학 등 순수예술은 국가의 지원 없이 발전하기 어렵다. 우리 삶에서 문화예술은 우리를 숨 쉬게 하는 ‘산소’와 같은 것이기에 마땅히 국민의 세금으로 지원해야 하는 ‘공공성’을 지닌다. 블랙리스트 사태는 단순히 예술가들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 것이 아니라 국민이 자유롭게 문화예술을 향유할 권리를 빼앗은 것이다. 배우 메릴 스트립의 골든글로브 수상 연설의 한 부분을 인용하면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공적인 자리에 있는 사람, 강력한 사람이 굴욕감을 주려는 본능을 드러내면, 그건 모든 사람의 삶에 스며든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해도 된다는 허가를 주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무례는 무례를 부른다. 폭력은 폭력을 조장한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위치를 이용해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면 우리 모두가 패배한다.”

 

기자명 김미도 (연극평론가·서울과학기술대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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