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넌 대통령?’ 미국 최고 유력지 〈뉴욕 타임스〉의 1월30일자 사설 제목이다. 이 신문이 난데없이 특정인의 이름을 사설 제목으로 거론하며 비판한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백악관 수석 전략가’인 극우 인사 스티브 배넌(63)이 트럼프 행정부의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최근 단행한 ‘반(反)이민 행정명령’은 물론이고 멕시코 국경 장벽 설치, 각종 자유무역협정 파기 등 배후에 배넌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우선주의’를 표방해 전 세계의 빈축을 산 트럼프 취임 연설문도 배넌 작품으로 보인다. 심지어 배넌은 외교 문외한인데도 불구하고 국가안보회의(NSC:대통령과 국무장관, 국방장관 등 외교·안보 부처 수장들이 참석하는 회의) 상임위원이 되었다. 트럼프의 눈과 귀를 사로잡은 사람은 배넌만이 아니다. 의회 보좌관 출신으로 대선 때 트럼프의 연설문 작성자로 인연을 맺은 뒤 현재 백악관 정책국장으로 있는 스티븐 밀러(31)의 파워도 하늘을 찌른다. 유력 시사 잡지 〈뉴욕〉이 최근 호에서 “밀러와 그의 멘토 배넌은, 트럼프 행정부 초기의 혼란을 야기한 반이민 행정명령의 작성 책임자다”라고 지적할 정도다.

ⓒAP Photo1월23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결재 서류에 서명 하고 있다. 스티브 배넌 백악관 수석 전략가(맨 오른쪽)와 스티븐 밀러 백악관 정책국장(오른쪽에서 두 번째).
실제로 배넌과 밀러 두 사람은 최근 트럼프의 ‘반이민 행정명령’이 시행되는 과정에 깊숙이 개입했다. 이 명령에 따르면, ‘잠재적 테러 위협’ 관련 지역으로 묶인 이라크·이란·리비아·예멘·소말리아·수단·시리아 등 7개국 국민은 향후 90일 동안 미국에 들어갈 수 없다. 난민들 처우도 크게 개악됐다. 난민들의 미국 입국은 향후 120일 동안 금지된다. 특히 몇 년째 떠돌고 있는 시리아 난민들은 무기한으로 미국에 들어갈 수 없다. 이런 내용의 행정명령에 트럼프가 서명한 것은 지난 1월27일이다. 그때까지 이민 관련 주무 부처인 국토안보부는 물론이고 법무부·국무부·국방부 등도 행정명령 관련 일정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과 존 켈리 국토안보장관도 트럼프 서명 직전에야 해당 내용을 듣고 측근들에게 분통을 터뜨렸다고 한다.

이런 사태가 벌어진 이유는, 백악관 측, 좀 더 구체적으로는 배넌과 밀러가 반이민 행정명령 내용을 국토안보부 등에 통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CNN은 “이런 명령은 통상 백악관 법률고문실의 자문을 거치게 돼 있지만 배넌과 밀러는 이마저 생략했다”라고 보도했다.

배넌과 밀러는 반이민 행정명령에 대한 국토안보부의 ‘유권해석’마저 뒤집었다. 이번 행정명령이 발동된 시점에서 가장 혼란에 빠진 집단은 ‘미국으로 이동 중인 관련 국가 시민들’이다. 해외에서 미국행 비행기를 기다리거나 이미 미국 공항에서 대기 중인 무슬림들은, 그 자리에서 발이 묶이고 말았다. 혼란이 극심해지자 국토안보부는 ‘행정명령이 미국 영주권자에겐 적용되지 않는다’는 내용의 긴급 유권해석을 내렸다. 하지만 이런 유권해석은 백악관에 의해 곧바로 부정됐다. 영주권자인 경우, 일단 미국 입국은 허용하지만 향후 120일 동안 해외에 나갔다 들어오려면 일종의 허가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CNN은 “이 같은 유권해석도 배넌과 밀러가 주도하는 트럼프의 이너서클(inner circle)이 내렸다”라고 폭로했다. 현재 트럼프의 이너서클에는 두 사람 외에도 ‘백악관 선임 고문’인 트럼프의 사위 재러드 쿠슈너가 포함돼 있다.

트럼프 행정부 내의 혼선이 극으로 치달으면서 책임 소재를 둘러싼 난투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배넌, 밀러 등 트럼프 측근 그룹’과 ‘프리버스 백악관 비서실장을 중심으로 하는 관료 집단’ 간의 싸움이다. 이와 관련해 〈워싱턴 포스트〉는 “트럼프 행정부에서 대통령의 결정에 적극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이끄는 핵심 인물은 배넌과 밀러다. 이들을 관리해야 할 프리버스 비서실장 등 백악관 관료들은 우왕좌왕하면서 배넌과 밀러의 행위를 해설하는 데 급급하다”라고 지적했다.

선거 공약 실천 명목으로 행정명령 남발

양측의 볼썽사나운 내분이 MSNBC 방송의 인기 아침 프로그램 〈모닝 조(Morning Joe)〉에서 격렬하게 질타당하기도 했다. 트럼프도 즐겨 본다는 방송이다. 반이민 행정명령 발동 직후 백악관 내부를 밀착 취재한 프로그램 사회자 조지프 스카버러는 1월30일 아침 방송을 진행하다 중단하더니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밀러를 윽박질렀다. “지난주는 정말 치욕스러운 시간이었어. 모든 것은 너(밀러) 때문이야!” 스카버러는 “백악관 권력 투어에 나선 어린 조무래기(밀러)가 ‘나는 행정명령을 쓸 테니 너희 관리들은 엿이나 먹어라’는 식으로 굴고 있다”라며 밀러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하지만 배넌과 밀러 두 사람의 국정 농단은 트럼프의 엄호 아래 지속될 전망이다. 두 사람에 대한 트럼프의 신뢰가 여전히 두텁기 때문이다. 배넌은 트럼프를 만나기 전 이미 극우 논객으로 명성을 떨친 인물이다. 해군 장교 출신으로 한때 증권 투자자, 영화 제작자 등으로 활동했던 배넌은 지난 몇 년 동안 우익 온라인 매체 ‘브레이트바트(BreitBart)’를 통해 반무슬림·반이민 정서를 여과 없이 표출해왔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와 맥을 같이하는 ‘미국 민족주의’의 주창자이기도 하다. 배넌이 트럼프와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해 8월이다. 트럼프가 폴 매너포트 당시 선거본부장을 전격 해임한 뒤 그 자리에 배넌을 영입했다. 배넌은 ‘브레이트바트’를 트럼프의 선전 도구로 적극 활용했다. ‘분노한 백인 노동자 계급’을 유인하는 선거 전략의 입안자도 배넌으로 알려졌다. CNN은 배넌이 내치를 넘어 외교·안보 영역인 NSC에까지 진입한 사실을 두고 “트럼프 임기뿐 아니라 앞으로 수십 년 동안 기존 세계 질서를 바꿀 수 있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며 우려를 표했다.

고작 31세에 권력의 정점에 오른 밀러는 고등학교 때부터 일찌감치 ‘꼴통 보수’ 학생으로 악명을 떨쳤다. 그는 고교 시절인 2002년 교지에 히스패닉 학생들에 대한 극단적 혐오감을 표출한 논설을 게재해 파문을 일으켰다. 듀크 대학에 들어간 2007년부터 반이슬람 운동을 주도했다. 대학 졸업 뒤에는 하원의원 보좌관 생활을 하다가 반이민주의자인 제프 세션스 상원의원을 만났다. 밀러는 세션스 의원을 도와 2013년 공화·민주 상원의원 8명이 초당적으로 발의한 (이민자에게 온정적인) 이민 개혁 법안을 상원에서 부결시키는 데 앞장섰다. 지난해 1월 트럼프 선거 캠프에 합류한 밀러는 트럼프의 공화당 대선 후보 수락 연설문 작성자로 이름을 날렸다. 정치 전문 매체 〈폴리티코〉는 경력이라곤 7년 의회 보좌관 생활이 전부인 밀러가 트럼프의 신임을 얻게 된 데는 무엇보다 이민 문제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투쟁 경험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밀러는 샐리 예이츠 법무장관 대행이 반이민 행정명령에 공개적으로 반발하자 보수 방송인 〈폭스 뉴스〉에 나와 “예이츠의 반발은 배신행위다. 법을 집행할 수 있는 사람으로 교체될 것”이라며 자신의 존재감을 한껏 드러냈다. 직후 예이츠는 트럼프로부터 전격 해임됐다.

이처럼 스티브 배넌과 스티븐 밀러는 이념적 편향성이 심한 인물로, 백악관 입성 당시부터 적잖은 우려의 대상이었다. 최근 반이민 행정명령 사건을 통해 그동안의 우려가 확인된 셈이다.

문제는 트럼프가 앞으로도 선거 공약을 실천한다는 명목으로 거추장스러운 입법보다 행정명령을 남발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인데, 그때마다 배넌과 밀러 두 사람의 입김이 작용할 게 뻔해 보인다. 〈워싱턴 포스트〉 보도에 따르면, 조만간 트럼프는 미국인 일자리 보호 명목으로 외국인에 대한 비자 발급 심사를 대폭 강화하는 내용의 행정명령을 발동할 계획이다. IT 업계가 해외 고급 인력을 확충하기 위해 이용해온 취업비자 제도 역시 대폭 개악하는 행정명령을 염두에 두고 있다. 트럼프, 밀러, 배넌 등이 공유하는 반이민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행정명령이다.

현재로서는 배넌과 밀러를 통제할 방안이 없다. 트럼프 대통령은 밀러와 배넌을 “나의 두 스티브 형제(my two Steves)”라고 부를 정도로 전폭적인 친근감을 표시하고 있다. 두 사람은 한동안 트럼프의 엄호를 받으며 마음껏 미국 국정을 농단할 것으로 보인다.

기자명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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