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대학의 스티븐 월트 교수가 ‘미국 새 대통령은 합리적 행위자가 아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그는 유럽이나 아시아, 중동 등 각 지역은 스스로 세력균형을 이루도록 해야 하며, 미국이 ‘자유주의 질서’의 제공자를 자처하여 독일이나 일본처럼 돈 있는 나라들이 무임승차하도록 해서는 안 되며, 원하지도 않는 나라들에게 민주국가를 건설해주겠다는 허망한 전략을 구사해서도 안 된다고 강조한다.

어라? 바로 “자기 문제는 자기가 해결하라” “미국이 개입하는 경우, 그 비용은 그 지역 국가들이 대야 한다”라는 트럼프의 대외 전략이 아닌가? 하지만 트럼프의 전광석화 같은 일처리를 보고 더 이상 자신들의 이론이 이런 비합리적 행위의 근거로 인용되는 걸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경제 쪽은 훨씬 더하다. 트럼프 경제정책을 지지하는 학자도 찾기 어렵지만, 그동안 대대적인 재정확대 정책을 주장했던 크루그먼 교수도 트럼프의 ‘1조 달러 규모 인프라 투자’ 비판을 여기저기 쓰느라 바쁘다. 하지만 세계 유수 대기업들의 반응은 사뭇 다르다. GM, 포드, 도요타, 다임러, 현대, 삼성, LG 모두 멕시코 등에 하려던 기존 투자 계획을 취소하고 미국에 투자하겠다는 발표를 줄줄이 내놓고 있다.

취임 일주일 만에 오바마케어 폐지, TPP 협상 탈퇴, 멕시코 국경 장벽 세우기, 반이민 행정명령 등, 아무리 미국 대통령이라도 심사숙고를 거듭할 수밖에 없는 사안들을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해치우는 트럼프라면 무슨 짓을 못할 것인가? 눈앞의 이익을 즉각 계산한 사업가들은 알아서 납작 엎드렸다.

과연 국제 거시경제 쪽에도 이런 수법이 통할까? 예컨대 트럼프는 현재 미국 법률만으로도 중국에 45%의 관세를 매길 수 있다. 하지만 중국은 일개 기업이 아니라 구매력 기준 GDP로 미국과 어깨를 겨누는 대국이다. 바로 보복에 나설 것이다.

‘트럼포노믹스’는 미국 홀로 실천할 수 없다. 트럼포노믹스의 핵심인 인프라 투자(1조 달러)와 법인세 인하(35%에서 종국적으로 15%까지)는 현재의 재정적자를 눈덩이처럼 부풀릴 것이다. ‘국경조정세’(수입산 부품은 비용으로 처리하지 못하고 수출품에 대해서는 감세한다)는 변동환율제 아래에서 달러의 절상을 낳는다. 지금 미국은 선진국 중 가장 나은 성과를 보이고, 유럽과 일본은 미국을 좇아 양적 완화를 하고 있으니 달러가 강세를 보이는 건 당연하다.

대대적 성장정책에 따른 인플레이션 우려와 재정적자는 금리를 끌어올릴 테고 이는 다시 달러의 강세를 부추긴다. 트럼프 대통령 스스로가 불확실성의 원천이므로 세계의 돈은 계속 미국으로 몰려들 것이다. 결국 천문학적 무역적자도 예견된다.

사드 배치하면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하지 않는다고?

이제 남은 수단은 통화전쟁밖에 없다. 괜히 트럼프가 중국과 일본, 그리고 뜬금없이 독일을 들먹인 게 아니다. 실제로 1970년대 이래 미국은 몇 차례 통화전쟁을 일으킨 바 있다. 특히 천문학적 쌍둥이 적자로 골머리를 앓던 레이건 정부가 이뤄낸 1985년의 플라자 합의는 대승으로 기록될 만하다. 하지만 지금은 1980년대 후반의 초호황기가 아니다. 침체의 늪에서 발버둥치는 유럽이나 일본, 특히 중국이 이런 으름장을 순순히 받아들일 리 없다. 지금 트럼프에게 필요한 나라는 알아서 납작 엎드릴 첫 번째 나라다. 불행히도 한국은 대미 무역흑자 제4위의 나라다.

황교안 대통령 직무대행은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까? 미국의 셰일가스를 수입하고 항공기 수입에 보조금을 주겠단다. 유일호 경제부총리는 미국의 환율지정국 요건 세 가지(대미 무역흑자가 300억 달러를 넘는 나라, 경상수지 흑자가 GDP의 3%를 넘는 나라, 외화 구매가 GDP의 2%를 넘는 나라) 중에 마지막이 해당되지 않는다며 자위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은 오직 하나의 요건에만 걸리고 독일이나 일본도 우리와 마찬가지다. 왜 매티스 미국 국방장관은 그 많은 나라 중에서 첫 번째 순방지로 한국과 일본을 잡았고, 또 황교안 대행은 무슨 약속을 했을까?

작금의 동아시아 역학 속에서 한 나라가 삼성이나 현대처럼 결정을 내려서는 절대 안 된다. 사드를 조기 배치하고 대미 수입을 알아서 늘려준다고 트럼프가 아시아 MD의 비용을 면제해주고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하지 않을까? 환율에 관해서 중국과 일본, 독일은 한국의 동지이니 당연히 공동행동을 할 일이다. 동남아의 미국 동맹국인 타이나 필리핀은 이미 중국·러시아와 외교를 강화하고 있다. 왜 대한민국은 이 정도의 상상력도 없을까?

기자명 정태인 (칼폴라니 사회경제연구소 소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