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이나 유명인이 던지는 인상 깊은 한마디를 영어로 사운드 바이트(sound bite)라고 한다. 본래는 긴 인터뷰 내용을 짧게 요약한 한마디를 뜻한다. 늙으나 젊으나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 코 박고 사는 요즘은 그야말로 사운드 바이트의 세상이다. 지난 미국 대선에서는 이 사운드 바이트가 괴력을 발휘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심판이 초읽기에 들어가고 대선이 당겨질 것이 확실해지면서 짧은 메시지가 횡행한다.

미국의 철학자 잭 보웬은 바로 이 단문을 읽어내는 데 독보적인 경지를 개척한 인물이다. 그는 경쾌하지만 소신 있게 한 줄 비난을 하거나 풍자의 이면을 집요하게 비틀어대 종종 읽는 사람을 깔깔대게 만든다. 그는 주로 자동차 범퍼 스티커에 새겨진 내용을 다루는데 이를 테면 이런 거다. ‘주여, 주님의 충직한 종들로부터 저를 구하소서.’ 그는 이 메시지를 이리저리 뒤집어 종교라는 허울을 쓰고 행해지는 위선과 폭력을 꼬집는다.

궁지에 몰린 박근혜 대통령 본인이나,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려는 사람들과 그걸 막으려는 사람들, 이미 대통령이 그만둔 거나 마찬가지라 치고 차기 대통령 선거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모두 정신없이 사운드를 바이트하고 있다. 위기에 처하거나 간절히 원하는 게 있을 때 사람들은 생소리를 내게 마련이다. 그런

ⓒ한성원 그림
원색의 소리들에 둘러싸여 있다 보니 잭 보웬 흉내를 내보고 싶어졌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까발려지는 내내 너무 오랫동안 정색을 했더니 좀 지쳤다. 힘든 때일수록 웃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남긴 말 중 사람들의 마음을 가장 많이 움직인 것은 ‘이러려고 내가 대통령을 했나. 자괴감이 든다’였다. 사실 이런 생각이 드는 게 정상이긴 하다. 본인까지 포함하면 역대 대통령 중 좋은 꼴을 보고 그만둔 이가 없다. 황교안 국무총리처럼 과도기에 잠깐 얻어걸렸던 분들을 빼고는 모두 험한 일을 당했다. 박 대통령의 아버지부터가 총에 맞지 않았던가.

앞으로도 대통령직이 순탄하리라는 보장이 없는데도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면 대통령을 하겠다는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어리둥절할 정도다. 대세룡, 잠룡, 잡룡에 불사조까지. 얼마 전 국회의원 선거에서 떨어진 사람들조차 얼굴에 철판을 깔고 머리를 들이민다. 박원순 서울시장처럼 점잖은 사람조차 ‘똥볼’을 여러 번 차게 만드는 걸 보면(촛불 경선 주장은 아직도 잘 이해를 못하겠다) 그 자리가 요물은 요물인가 보다. 사람들은 대통령 선거가 다가올 때마다 지치지도 않고 제왕적 대통령제가 한계에 달해 헌법을 고쳐야 한다고 부르짖곤 하는데 한 번도 실행에 옮긴 적은 없다. 그걸 아는가. 개헌론은 언제나 현 정권의 연장을 바라는 이들과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없는 이들이 합심해 내놓는 메뉴라는 걸. 나는 처음 정치부 기자 발령을 받아 여의도를 출입하기 시작했던 1990년대 초반부터 20년 넘게 개헌 얘기를 귀가 따갑게 들었다.

통계를 보면 정부기관이든, 기업이든, 교회든, 절이든 그 조직의 윗자리에 오른 사람들이 오래 산다. ‘윗분’들이 스트레스가 심해 암에 걸리기 쉬울 것 같지만 오산이다. 남자든 여자든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이 거기에 절절매며 따르는 사람보다는 장수한다. 두고 보면 알겠지만 안종범 전 수석이나 문고리 3인방보다, 어쩌면 휴대전화를 옷에 문질러 공손하게 대령했던 젊은 이영선 행정관보다도 최순실씨가 더 오래 살지 모른다. 박관천 경정이나 고영태씨 등의 견해에 따르면 박근혜 대통령도 최순실씨보다 오래 살기 힘들다. 사람들이 나이가 들수록 자리 탐욕이 심해지는 건, 권력이 곧 불로장생약이라서가 아닐까.

반기문, 인명진, 서청원. 이 70대 3인방도 나이 드는 걸 겁나게 만드는 분들이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다른 건 몰라도 체력만은 타고났다. ‘불가능한 직업’이란 평을 듣는 유엔 사무총장직을 10년이나 수행하고 나서 숨 돌릴 새도 없이 곧바로 한국으로 달려와 대통령 선거 본선을 치르듯 뛰어다니지 않았던가. 이분이 ‘시차 무시하는 법’이란 책을 쓴다면 베스트셀러가 되지 않을까. 이분은 나이 든 사람의 건강을 해칠지 모르는 자기 성찰 능력이 애초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정치에 환멸을 느껴 그 정치를 교체하려고 대선 출마를 결심했다가 바로 그 정치에 환멸을 느껴 대선 출마의 ‘순수한 뜻’을 접은 분이다(!!!). 10년 동안 이분 지휘를 받아온 유엔 직원들한테 내가 왜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걸까. 개발도상국으로서는 거의 유일하게 정치 민주화와 경제발전을 동시에 이룩한 대한민국에서 온 이 노련하다는 외교관에게서 그들은 뭘 봤을까.

서청원, 최경환 등 새누리당 내의 박근혜 정권 특급 부역자에게 ‘일본 같으면 할복했다’는 악담을 퍼부은 인명진 비대위원장도 감탄스러운 분이다. 말인즉슨 옳다. 쓰레기가 온 나라를 덮었는데 버렸다는 사람도 없고 잘못했다는 사람도 없는 지경이 아니던가. 그런데 할복해야 할 사람들을 위한 비상대책을 마련하려고 본인이 굳이 나설 필요가 있었을까. 이분은 반기문씨한테 나이 든 사람이 겨울에 너무 열심히 돌아다니다 보면 낙상하기 쉽다고 충고했는데, 남의 흉허물을 들추는 데는 송곳 같다. 그게 자기한테도 해당하는 얘기든 아니든. 어쨌건 주여, 앞으로도 주님의 충직한 종으로부터 서청원 의원 등등을 구하지 마소서.

인명진 위원장은 누구까지 할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김무성 전 대표도 노려보지 않을 수 없다. 이분이 탈당해서 마치 사면을 받은 것처럼 착각할까 봐 말해두고자 한다. 이분은 박근혜 정부가 시도한 이른바 문화 쿠데타를 추진한 주역 중의 한 명이다. 김무성씨는 박근혜 대통령의 말대로 역사를 제대로 배우지 못해 혼이 비정상이 된 경우이다. 부친이 친일파로 분류된 그는 국사학자의 90%가 좌파라는 획기적인 주장을 폈다. 그는 부친이 민족교육에 앞장섰으며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지원했다고 주장한다. 아버지의 친일 행위를 부각하는 것은 좌파의 공격이라며 열을 낸다. 물타기와 색깔론, 이는 친일 행적을 감추고 싶은 이들이 질리도록 늘어놓는 궤변의 전형이다. 그가 박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워야 하는 고비 고비마다 주저앉곤 했던 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덩칫값도 못해서가 아니라 박 대통령과 여러모로 생각이 같아서였지 않았을까. 그는 정직하기는 한 사람이다.

수십 년 빨아먹은 빨갱이라는 뼈다귀

할복해야 마땅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한테 국회의원을 그만두라고 집단행동을 하는 놀라운 일도 벌어졌다. 적반하장은 결코 레전드가 아니다. 새누리당 의원들이 박근혜 대통령을 발가벗겨 풍자한 작품을 전시한 표창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의원직을 내놓으라고 함께 모여서 악을 쓴 것이다. 반민특위에 회부된 민족반역자 중에 자기 행동을 반성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수사가 아니라 진짜다)는 점을 감안하면 새누리당 의원들이 표 의원에게 인상 쓴 것쯤이야 애교라고 해야만 할까. 인명진 위원장의 기준으로 보더라도 할복해야 할 사람에 가까울 것 같은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의 지지율이 치솟는 것도 괴이한 일이다.

이 빨갱이란 뼈다귀는 수십 년을 빨아먹었는데도 아직 단물이 나오는 모양이다. 1948년 7월17일 제정된 제헌헌법은 제101조에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소급해서 처벌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미군정이 친일파를 등용하는 바람에 역사를 바로 세울 골든타임을 놓치고 만 터였다. 많은 의원들이 노심초사한 끝에 ‘정부 내 친일파 숙청에 관한 건’과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압도적인 표 차이로 통과시켰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남북 협상파와 좌파가 선거에 참여하지 않아 의회 내에는 우파가 절대다수였는데도 이룬 쾌거였다. 친일 반역자 청산을 요구하는 국민의 열망이 얼마나 강렬한지 의원들이 감지한 결과였다.

법 공포를 전후해 서울 시내에 ‘친일파 청산을 주장하는 자는 빨갱이’라는 내용의 삐라가 일제히 살포되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반공국민대회도 열렸다. 내무부가 지원하는 관제 데모였다. 이승만 정권은 이 빨갱이 여론몰이를 동력으로 삼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무력화했다. 이승만 정권은 국회 프락치 사건을 조작해 반민특위 핵심 관계자들을 무더기로 체포했다. 각 정부기관은 반민특위의 자료 제출 요구를 거부하고 온갖 방해 책동을 했다.

대통령 탄핵에 반대한다며 태극기를 몸에 두르고 거리로 뛰쳐나온 이들은 70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는 걸 아는지 모르겠다. 이 ‘태극전사’들은 ‘군이여 일어나라, 국민이 명령한다’ ‘빨갱이를 죽이자’며 죽어라 악을 써댄다. 이석기 전 의원을 감옥에 보낸 이 나라의 법 감정에 따르면 사실 이들은 너끈히 10년형은 살아야 마땅하다.

이들을 뒤에서 부추기는 이들은 예나 지금이나 반일이건 부정투표 항의건 반독재건 전혀 다른 종류의 재료로 빨갱이라는 동일한 물질을 만들어내는 신묘한 재주를 지녔다. 1948년 그 중요한 때에 지금처럼 국회는 국민의 요구에 굴복했다. 그러나 이 사회 엘리트란 자들이 국민의 뜻을 배신하고 역사를 거꾸로 돌렸다.

비관론자들은 지금 헌법재판소의 기류가 바뀌었다며 다시 반동이 오지 않을까 염려하는데 그런 일이 다시는 벌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역사는 반복되지만 양상은 매번 다르다고 하지 않던가. 어떤 때는 비극이고, 어떤 때는 희극이고. 이번에는 부디 희극이었으면 좋겠다. 황교안 국무총리의 욕심이 커질수록 가능성도 높아진다고 본다. 대통령이 임기를 마치게 되면 황 대행에게는 기회가 없다. 우리가 보기에도 지금 황 대행 얼굴이 너무 밝은데 뒤끝 작렬인 대통령이 보기에는 어떻겠는가. 힘내시라.

최순실씨만 보더라도 이번에는 아무래도 희극 요소가 강하다. 그녀는 조사받기를 거부하다 특검에 끌려가면서 ‘특검은 자유민주주의가 아닙니다’라고 소리 질렀다. 장담하건대 정치학자 중에도 자유민주주의가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다. 계몽주의와 아테네까지 들먹이더라도 뜻이 명료해지지 않는다. 다만 이 용어는 멸공주의자를 만나야만 비로소 빛을 발한다. 누군가 자기가 빨갱이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을 때 입는 옷이라고나 할까. 그러고 보면 최순실씨는 특검을 종북이라고 욕하고 싶었나 보다. 공안 통치를 견인해온 대한민국 검사들에게 빨갱이라고 소리치는 사람은 첨 봤다. 최순실씨는 확실히 발상이 남다르다. 사식 잘 챙겨 먹으면서 검사들에게 쫄지 말고 기운 내시라.

참고한 활자:〈범퍼 스티커로 철학하기〉(민음인), 〈친일과 망각〉(다람)

기자명 문정우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o@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