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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간 조선인 강제연행 기록해온 85세 일본인 작가

2017년 03월 03일(금) 제493호
도쿄·이령경 편집위원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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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인 강제연행 연구가 하야시 에이다이는 조선인 광부와 조선인 특공대의 한 많은 삶을 기록한 책을 서른일곱 권이나 썼다. 그의 아버지는 신사로 도망 온 조선인 광부를 보살피다 경찰에 끌려가 고문당해 사망했다.

하야시 에이다이. 조선인 강제연행 연구자는 물론 이 문제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은 이 작가를 모를 리 없다. 1933년생인 그는 1968년부터 2016년까지 책 57권을 썼다. 편저 등 13권을 빼더라도 엄청난 작업량이다. 기록작가인 그의 책은 모두 방대한 취재의 결과물이다. 그가 취재한 지역은 후쿠오카 현 지쿠호를 거점으로 홋카이도, 한국, 사할린, 뉴기니아, 시베리아까지 과거 일본제국을 망라하고 있다. 그중 서른일곱 권에는 강제 동원된 조선인 광부와 노동자와 특공대의 한 많은 삶이 ‘재현’되어 있다. 2016년 12월5일 다큐멘터리 영화 <아라가이(저항)-기록작가 하야시 에이다이>(니시지마 신지 감독) 시사 상영을 보고 주인공을 만나보고 싶었다.

하야시 에이다이가 나고 자란 지쿠호의 탄광지대는 근대 일본 산업의 근간이었다. 1939년부터 식민지 조선에서 이곳 탄광으로 강제연행을 당한 수많은 노동자들이 일본의 침략전쟁을 위해 일해야 했다. 하야시 에이다이의 아버지는 지쿠호 인근 다가와 지역에서 100년 이상 이어져온 신사의 관리와 의식을 관장하는 간누시(神主)였다. 온 국민이 침략전쟁에 동원되던 그 시절 그의 아버지는 신사에서 열린 출정식에서 죽지 말고 꼭 살아 돌아오라는 말을 거리낌 없이 하는 인물이었다. 참담한 노동환경과 차별을 견디지 못하고 아버지의 신사로 도망 오는 조선인 광부들이 많았다. 한꺼번에 20명이나 도망쳐올 때도 있었지만 그의 부모는 성의껏 보살피고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도왔다. 하야시 에이다이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던 해 아버지는 그 일로 특별고등경찰에게 끌려가 고문당해 사망했다. 그때부터 하야시 에이다이는 ‘비국민, 역적의 자식’이라는 손가락질을 당했다. 결국 아버지를 잃고 빚만 남았지만, 그는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잊지 않고 찾아와 돈을 놓고 간 조선인을 잊을 수가 없었다. 이 체험이 하야시 에이다이의 ‘반권력’ ‘전쟁과 평화’의 원점이다.

ⓒRKB 매일방송 제공
하야시 에이다이 씨는 사설 도서관 ‘아리랑 문고’를 집필실로 사용하고 있다.

와세다 대학에 입학한 하야시 에이다이는 심각한 공해문제로 권력과 자본에 시달리다 버림받은 사람들과 몇 달을 같이 살았다. 학교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공무원이 된 그는 공해 반대 운동을 하며 취재를 시작했다. 이때부터 그는 적극적으로 ‘비국민’의 길을 걸었다. <청산되지 않은 쇼와(昭和)-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1990)은 하야시 에이다이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사진 600여 장에 짧은 해설을 붙인 이 책에는 그가 20여 년간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취재한 강제연행 당사자와 가족 63명의 인터뷰가 실렸다. 영상기록(사진)과 증언(인터뷰)이 결합되어 말살당한 역사적 실상을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다. 취재와 저술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전후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는 명부가 없다고만 했다. 포기하지 않고 관련 자료를 찾아다니던 하야시 에이다이와 강제연행 진상규명 운동 단체는 우연히 관련 공문서를 발견하게 된다. 군함도로 더 유명한 하시마(瑞島)와 사키토(崎戸) 탄광에서 일하다 자살하거나 병사 또는 익사한 광부들의 화장을 허가한 증명서였다. 1990년 8월 하야시 에이다이는 명부 중에 조선인으로 추정되는 사망자 170명의 본적지로 편지를 보냈다. 세월이 많이 지났고 창씨개명으로 본명이 아닌 일본식 이름이 많았기 때문에 답장이 몇 통 올지 알 수가 없었는데 편지가 오기 시작했다. 140통이 수취인 불명으로 되돌아왔지만 경상도·전라도·경기도에서 답장이 모두 30통 왔다. 답장을 받고 그는 먼저 한국의 유족들은 가족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알고 있는지, 정당한 보상금은 받았는지 걱정했다. 그해 10월 그는 유족을 만나러 한국을 방문했다. 하야시 에이다이는 강제연행 당했던 가족을 잃은 유족들의 심정을 전혀 모르는 일본인에게 현실을 알리고 기록할 의무가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강제연행이 남긴 상처는 여전히 깊었다. 남편이 일하던 탄광 사진을 보여주자 어떻게 죽었는지 알려줘서 고마워한 유족도 있었지만, 잊어버리고 살았는데 왜 이제 와서 떠올리게 해 괴롭히느냐는 가족도 적지 않았다. 방송으로도 제작된 <죽은 이에게 보내는 편지-해저 탄광의 조선인 광부들>(1992)에는 원망이 가득한 노인의 시선이, ‘억울하다’ ‘아이고’ 울부짖는 유족의 목소리가 그대로 실려 있다. 유족을 만난 밤 그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강제연행에 대한 전후 책임을 계속 회피하고 있는 일본의 국민으로서 하야시 에이다이는 괴로웠다. 그는 책을 쓸 때마다 “일본인의 문제이기도 한 조선인의 강제연행 문제에 대한 당신의 자세는?”이라는 물음을 일관되게 던졌다.

“포기하지 않고 추적하면 진실에 다가가게 된다”


하야시 에이다이의 취재는 집요했다. 43년 전 취재 기록을 토대로 특공대 관련 정보를 얻고자 한 마을 400여 가구를 일일이 방문하는 것은 기본이고, 수십 년에 걸쳐 아버지를 고문한 경찰이나 조선인 광부를 학살한 일본인 노무관리자를 찾아냈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추적하다 보면 진실에 다가가게 된다고 말했다.

일본으로서는 숨기고 싶은 사실을 파헤치는 그의 책이 발간될 때마다 우익이 집으로 몰려와 ‘비국민 하야시 에이다이는 죽어라’고 협박했고, 밤낮을 가리지 않는 협박 전화에 온 가족이 시달렸다. 어느 날 중학교 교사를 하면서 몇십 년 동안 하야시 에이다이의 ‘돈 안 되는 일’을 지원해준 아내가 자유를 달라고 했다. 집을 나온 그는 사설 도서관 ‘아리랑 문고’를 겸하고 있는 거처에서 생활하고 있다.

ⓒ연합뉴스
일본 나가사키 현에 위치한 군함도. 일제강점기에 조선인 광부들이 강제노동을 한 해저 탄광이 있었다.

지난 1월5일 후쿠오카 시내에서 1시간 이상 차를 몰아 하야시 에이다이가 사는 아리랑문고를 방문했다. 그는 악성 암 환자였다. 하지만 암환자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목소리는 힘이 넘쳤고 유쾌했다. 그에게 “한평생 쉬지 않고 취재를 계속해온 원동력은 무엇이었나?”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냥 조사하고 찾는 일을 좋아하는 바보”라며 아이처럼 환하게 웃었다. 20년 전부터 물심양면으로 하야시 에이다이를 지원하고 있는 모리카와 도미에 교수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아직 써야 할 책이 10권은 있다. 그때까지는 죽을 수가 없다”라고 말하는 하야시 에이다이에게 기온이 뚝 떨어지는 겨울밤은 위험하다. 얼마 전에도 밤에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도 그는 해가 뜨면 책상 앞에 앉아 테이프로 손가락에 만년필을 묶고 글을 쓰고 있다.

“역사의 교훈을 배우지 않는 민족은 결국 자멸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라는 하야시 에이다이의 말은 식민지 지배와 전쟁 책임을 외면하고 역사를 왜곡하려는 일본에만 해당되는 말은 아니다. 당장 내일의 건강상태가 걱정인 하야시 에이다이가 남은 책을 다 쓸 수 있기를, 그리고 한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다큐멘터리를 볼 수 있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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