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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에서 용이 나지 못하는 세상

2017년 03월 01일(수) 제493호
김형민 (PD)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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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에서 받아들인 과거제도는 조선 초기 신분이 낮은 급제자의 비율이 40~50%에 이르렀다. 하지만 점차 기득권을 보호하는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현재 대학 입시도 비슷하다.

국사 시험문제 하나. “고려 광종 때 도입되었으며 후주의 귀화인 쌍기의 권유로 채택했던 관리 선발제도의 이름은?” 0.1초 만에 대답할 수 있을 거다. “과거제도!” 맞아. 과거제도의 시작은 중국 수나라 문제 때야. 그는 400여 년 동안 5호 16국과 남북조 시대라는 극심한 혼란에 시달려온 중국을 다시 하나로 통일한 황제지.

사면팔방으로 찢어진 천하를 하나로 묶어놓으려면 강력한 중앙권력이 필요했지. 각지에서 여전히 똬리를 틀고 있는 세력들도 견제해야 했던 수나라 문제는 583년 각 주에 명령하여 매년 3명을 천거하게 하고 시험을 보아 성적에 따라 관직을 내리는 제도를 실시해. 처음에 선거(選擧)라고 불리던 이 제도는 이후 과거(科擧)로 이름을 바꾸고 확대 실시되면서 중국의 전통적 관리 임용제도로 천몇백 년 동안 유지된단다.

‘시험을 보아 실력을 가려 인재를 선발한다’는 원칙이 지구는 둥글다는 얘기만큼이나 당연해 보이지? 하지만 중국 문화권을 벗어나면 과거는 무척 획기적이고 최근세에 이르기까지 서양에서는 상상하지 못했던 제도였어. 유명한 계몽주의 철학자 볼테르가 “중국의 과거제도는 인재들을 시험을 통해 고용하기 때문에 평등한 제도이며, 엄격한 시험을 거쳐 구성원을 선발하는 정부보다 나은 정부는 어디에도 없다”라고 부러워했지.

ⓒ연합뉴스
2016년 10월16일 서울 경희궁에서 열린 조선 시대 과거시험 재현 행사.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과거제도는 조선 초기에는 신분이 낮은 급제자의 비율이 전체의 40~50%에 이르렀고 중반에는 주춤했다가 말기에 이르면 다시 그 비율로 회복되는 등, 이른바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고 해. 외국 사람들이 놀라는 한국 사람들의 높은 교육열이란 어쩌면 이 과거제도의 장구한 전통의 잔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거야.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이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소리는 자식이 글 읽는 소리(子弟讀書聲)”라고 했듯, 총명한 자식이 공자 왈 맹자 왈 책을 줄줄 외운다면 고관대작이건 산골짝 농부건 목숨을 걸고 과거 공부를 시켰을 테고, 실제로 ‘가문의 영광’을 이룬 사례가 많았다고 하니 말이야.

원칙적으로 천민이 아닌 양인들, 즉 농민은 물론 수공업자나 상인들까지도 과거를 볼 수는 있었다지만 실제로 한글도 아닌 한자로 하는 공부를, 인쇄술이 발달하지 못해 책을 일일이 필사하기 일쑤였던 시절에 과거제도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이들은 제한돼 있었어. 더하여 ‘시험’의 생명이라 할 공정성마저 흔들렸다면 과거제도는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시스템이 아니라 용 될 일 없는 이무기들의 헛된 희망을 소비하는 무대로 바뀌었다고 보는 편이 맞지 않을까. 다산 정약용 선생의 말씀을 들어보자.

“명문거족의 자제들은 이를 공부하려 하지 않고 오직 저 시골구석의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만이 공부하고 있다. 따라서 문예를 겨루는 날에는 권세가의 자제들이 시정의 노예들을 불러 모아 (중략) 이들은 눈을 부라리고 주먹을 휘두르며 주인의 시험지를 먼저 올리기 위해 첨간만 바라보고 서로 앞을 다투어 몽둥이질을 한다. 합격자를 발표할 적에 보면 시(豕)자와 해(亥)자도 구분하지 못하는 젖내 나는 어린애가 장원을 차지하게 되기 일쑤다(<조선의 뒷골목 풍경> 강명관 지음, 푸른역사 펴냄).”

ⓒ연합뉴스
서울 대치동 학원가 논술학원 앞에 줄지어 선 학부모와 학생들.
조선 정조 때쯤이면 과거 시험장에 몰린 수험생 수가 10만명에 달했다고 해. 그런데 수험번호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시험 답안지를 빨리 낼 수 있는 ‘좋은 자리’ 잡기 쟁탈전이 벌어졌는데, 명문거족 집안에서는 미식축구 선수들처럼 몸싸움 잘하는 ‘떡대’들을 내세워 그 도련님들 자리를 맡도록 했다는 것이지. 그 외 대리시험이나 답안지 바꿔치기 같은 부정행위는 이루 헤아릴 수도 없었어.

경화거족의 ‘사륙문’은 지금의 ‘사교육’

그런데 고관대작들로서는 이 부정행위를 하는 것도 귀찮아졌던 모양이야. 넉넉한 호수에서 노닐던 그들은 각지의 개천들을 말려버림으로써 개천의 용을 멸종으로 몰아넣는다. 이런 식이었다. “서울 선비들은 사륙문(중국의 육조와 당나라 때 유행한 한문 문체, 4자로 된 구와 6자로 된 구를 배열하기에 사륙문이라 불린다)을 익혔으나 시골 선비들은 그것을 제대로 배울 방법이 없었다. 이렇게 해서 경화거족들(서울에 뿌리내린 명문세족들)은 자기 자식들에게 합법적으로 정당하게 급제할 수 있는 길을 넓혀주었고, 그럼으로써 자기들만의 서울, 자기들만의 나라를 만들어나갔다(<서울은 깊다> 전우용 지음, 돌베개 펴냄).” 이런 비열한 ‘갑질’의 결과는 정조 임금의 다음과 같은 탄식이었어. “급제하는 이들은 모두 남산과 북악 사이의 집안 자제들뿐이로다.” 왈패들을 돈 주고 사서 “우리 도련님 나가신다. 길 비켜라” 하는 것도 우세스럽고, 엽전깨나 쥐여주고 공부만 한 선비를 사서 대리시험 치르기도 뭣했던 조선의 ‘갑님’들은 마침내 합법적이고 우아하게, 객관적인 실력으로 촌놈이나 미천한 개천 놈들의 도전을 차단하고 그들만의 리그를 펼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던 거야. 시간이 갈수록 혜택을 보는 이들은 또 그 안에서 줄어들었고 종국에는 안동 김씨 세도 같은 막장과 만나게 되는 거지. 과거제도의 모순을 날카롭게 비판했던 정약용도 어떤 면에선 기득권에 집착하는 양반의 일면을 보여주기도 해. “무슨 일이 있어도 사대문 밖으로 나가지 말고 버텨라. 서울을 벗어나는 순간 기회는 사라지며 다시 일어서기 어렵다”라고 자식들에게 당부하고 있으니 말이야.

이렇게 얘기하다 보니 문득 아빠가 어느 시절 얘기를 하고 있나 헛갈린다. 아빠가 대학생 때에도 부정입학은 많았는데 태반은 대학 당국에 돈을 쥐여주고 입학시키는 형태였고 가끔 대리시험 등도 있었지. 적발될 가능성도 많았고 실제로 꽤 여럿 들통이 나서 망신살을 사고 쇠고랑을 차곤 했어.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런 뉴스는 사라졌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넉넉한 사교육을 통해, 풍족하게 쌓인 스펙을 통해, ‘할아버지의 부와 엄마의 정보력과 아빠의 무관심’을 겸비한 ‘인재’들이 주로 대한민국이라는 하늘을 휘저을 ‘용’들이 될 수 있었으니까.

조선 후기 서울 양반들이 차별화된 능력의 근거로 이용했던 ‘사륙문’은 우리 시대의 ‘사교육’으로도 대변될 수 있을 거야. 한 달에 기백만원 드는 영어 유치원에서 네이티브 스피커들과 어울리며 자라고 맘 내키면 한 몇 년 해외 연수를 다녀온 ‘인재’와 냉장고에 단어장 붙여놓고 애플, 엘리펀트 읽으며 영어를 시작한 ‘둔재’가 어찌 상대가 되겠니. 또 정조가 탄식한 ‘남산과 북악 사이의 자제’들은 그 이름도 유명한 ‘대치동’이나 ‘중계동’이나 ‘목동’ 아이들로 바꿔 읽을 수 있고, 특수목적고등학교니 자율형사립고등학교니 하는 명찰로 대체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른바 자본주의 사회에서 능력 있는 자가 성공하는 건 당연하다고 말하지. 하지만 그 명제는 기회의 평등과 평가의 공정함 위에서만 반듯할 수 있어. 그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사회에서는 최순실의 딸 정유라 말처럼 ‘돈 있는 부모’나 ‘빽 좋은 부모’가 실력을 구성하게 되고, 그 나라는 머지않아 망하게 돼. 바로 조선이 걸었던 길이지. 오늘 영화 보러 가자는 아빠 말에 대한 네 대꾸가 가슴이 아팠다. “고등학교 가니까 주말에 노는 습관을 줄여야 돼.” 네가 넘기는 영어 단어집이 눈을 찌르는구나. 앞으로 그 단어들을 일상으로 체득해 영어에 능숙한 아이들과 경쟁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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