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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에서 현실로 도피하는 좌파

2017년 03월 01일(수) 제493호
장정일 (소설가)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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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단적 중도파’는 좌파와 우파가 서로를 극복하기 위해 경쟁하던 정치의 기능을 없앤다. 이때 정치는 권력 자체가 목적이 된다. 실업·환경·복지·교육·인권 등 중요하고 시급한 것은 ‘빅텐트’와 ‘대연정’ 밖에 있다.

“민주주의는 심각한 혼란에 빠져 있다.” 영국의 좌파 저널리스트 타리크 알리가 쓴 <극단적 중도파>(오월의봄, 2017)에 나오는 첫 구절이다. 그러나 정작 혼란스러운 것은 이 책의 제목이다. 좌파나 우파가 한쪽으로 치우친 것을 극좌나 극우라고 일컫는 것은 예사롭지만, 균형잡기나 타협의 산물인 중도에 ‘극단적’이라는 관형사는 어울리지 않는다. 한국판 편집자가 임의로 지은 제목인가 싶었지만, 원제가 ‘The Extreme Centre’이니 오해할 여지는 없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서구 정치는 좌파와 우파가 이념적으로나 정책적으로 서로를 극복하기 위한 경쟁을 해왔다. 좌파와 우파의 각축과 병존은 서구 정치가 추구해온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지은이가 ‘극단적 중도파’라고 명명한 이것은 전통적 정치를 가능하게 해주던 동력인 좌우파의 적대를 없애버린다. 전통적인 정치가 산산이 부서진 자리에 현실주의자들의 야바위판이 벌어진다. ‘진보적 보수주의자(반기문)’니, ‘빅텐트(안철수·손학규)’니, ‘대연정(안희정)’이니 하는 것들이 그렇다.

1994년 최연소 노동당 당수가 된 토니 블레어는 1979년 보수당에 빼앗긴 정권을 18년 만에 찾아왔다. 전전임(前前任) 총리였던 마거릿 대처는 ‘사회는 없다’라고 선언한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의 숭배자였다. 하이에크의 주요 논지에는 사회가 없으므로 당연히 노동권과 보편 복지를 보장하는 ‘사회국가’도 허상이며, 서로 경쟁하는 개인만 존재한다. 대처는 케인스주의 경제정책을 배척하고 베버리지 보고서(1942년에 작성된 영국 사회보장제도의 시안)를 토대로 한 국가적 합의를 무효로 되돌렸으며, 노동조합을 파괴했다.

ⓒ이지영 그림
블레어는 노동당 개혁이라는 구호로 당수가 되었다. 그가 노동당 당수로서 가장 먼저 한 일은 1918년부터 노동당 정책의 대명사였던 국유화 강령을 당헌에서 삭제하는 거였다. 현재의 영국 노동당은 블레어 도당이 당을 전횡했던 시절의 노동당을 신노동당(New Labour, 1994~2010)이라고 따로 지칭한다. 신노동당 지지자들은 대처주의를 수용하는 노동당의 변화를 긍정적인 뜻에서 급진적이라고 환영했고, 대처주의로 고통받은 영국 민중은 신노동당이 일단 승리를 쟁취하고 나면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회복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희망과 달리 블레어가 3기 연속 집권했던 10년(1997~2007) 동안 이들은 대처리즘을 더 순도 높게 발전시켰다.  

‘제3의 길’ ‘갈등 제로 정치’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 따위 솔깃한 도식을 내세웠지만, 블레어가 이끈 “신노동당은 재계가 마음껏 돈벌이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했던 것”이 전부다. 신노동당은 평등과 사회정의라는 개념 자체를 폐기하고 재분배 정치로부터 등을 돌리면서, 노동당이 고수해온 사회민주주의와 단절했다. 이들은 영국은행에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 완전한 자율권을 부여하는 것으로 금융부문을 자유시장에 맡겼고, 미혼모 복지수당 삭감과 대학 등록금 의무 납부제를 실행하고, 각종 공공 서비스를 사영화
<극단적 중도파>
타리크 알리 지음
장석준 옮김
오월의봄 펴냄
하는 등, 대처가 하지 못했던 것을 더 과감하고 정밀하게 밀어붙였다. 슬라보예 지젝의 <자본주의에 희망은 있는가>(문학사상사, 2017)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가장 뛰어난 업적을 물었을 때, 대처 총리는 망설임 없이 ‘신노동당’이라고 대답했다.” 알리는 노동당이 대처주의에 투항하게 된 배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25년 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 함께 붕괴한 것은 소비에트 연방이나 ‘공산주의 이상’ 혹은 ‘사회주의 해법’의 유효성만은 아니었다.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도 함께 추락했다. 승리한 자본주의의 돌풍이 전 세계를 휩쓰는 상황에서 사회민주주의는 과거 자신들의 사회 프로그램을 구성하던 요소들을 지키려는 결의나 비전을 보여주지 못했다. 대신 자살을 선택했다. 이것이 바로 ‘극단적 중도파’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지젝 역시 <자본주의에 희망은 있는가>에서 알리와 동일한 설명을 한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대항적 시스템 및 노동자의 권익을 약속하는 다른 생산 체계의 심각한 위협이 있어야만 노동자와 빈곤층에 상당한 배려를 제공”한다. 그런데 “그런 대항이 사라질 경우, 유럽의 사민주의 복지국가의 해체도 가능하다”.

“야당이 없는 나라에 살고 있다”

자신이 살고 있던 공공주택이 주택담보회사의 소유가 되면서 보금자리에서 쫓겨나야만 했던 약 100만명의 신노동당 열성 지지자들은 블레어에게 속은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그런데도 블레어가 총선에서 세 번 내리 승리하면서 총리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영국 민중에게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알리는 이런 딜레마를 “우리는 야당이 없는 나라에 살고 있다”라는 말로 요약했다.

영국 정치는 “보수당-자유민주당 연립정부에 노동당이 추가된, 머리는 셋이지만 몸통은 하나인 극단적인 중도파의 손아귀에 있다.” 극단적 중도파가 되면서부터 좌파는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전통적인 좌파 정책을 내팽개치고 차츰 자본친화적이 되기 시작했다. 또 정권을 쥐고 나서도 시민의 권리보다 자본의 이해를 우선하면서 기업 권력에 굴종한다. 이처럼 좌우의 정치적 차이가 축소되면서 정치는 권력 그 자체가 목적이 되고 게임에 참여한 엘리트 정치꾼의 사업으로 전락한다. ‘박근혜-최순실-이재용’ 조합이 벌인 정경유착은 앞으로도 계속된다. 좌파가 우파와 차이가 없어질 때, 민중은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하나는 극우에 투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투표장에 가지 않는 것이다.  

‘빅텐트’와 ‘대연정’은 정치적 차이가 사라져버린 한국 정치의 민낯과 추한 권력의지를 보여준다. 솔직히 거기에 뭐가 있나? 거기에는 상위 1%와 야합하는 지배 엘리트와 상위 10%에 가입하려는 중산층의 욕망만 있다. 실업·환경·복지·교육·인권 등, 경제발전보다 뒤처진 정말 중요하고 시급한 정치적인 것은 모두 빅텐트와 대연정 밖에 있다. 더불어민주당의 유력 대선 후보인 문재인과 안희정은 신자유주의로 기울어졌던 노무현 정권의 잘못을 사죄하거나 반성하기는커녕, “노무현 정권이 정말 변절한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가진 진보의 개념이 낡아서 그런 것인지 묻고 싶다”(<시사IN> 제491호 “정권 교체 그 이상을 원한다면!” 기사 참조)라고 반문한다. 우리가 가진 진보의 개념이 낡았다? ‘현실에서 환상으로 도피한다’가 일상적 어법이지만, 지젝은 거꾸로 ‘환상(사회주의라는 이상을 향한 투쟁)에서 현실(시장과 기업 만세!)로 도피한다’라는 말로 오늘날의 좌파를 꼬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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