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동료 산부인과 의사들의 카톡방을 뜨겁게 달군 그림이 있었다. 인유두종바이러스(HPV) 백신 중 하나인 ‘서바릭스’를 만드는 회사의 브로슈어에 실린 그림이었다. 백신을 맞을지 말지 고민하는 여중생에게 남자아이가 다가가서 말한다. “너 그거 얌전히 맞는 게 좋을 거야. 신문에서 사춘기 때 맞는 것이 좋다고 했어.” “이 자식! 네가 뭘 알아? 남자가.” “사, 상관있어! 여자가 나중에 내 아이를 낳을 수도 있으니까!” 접종 경험자로서, 의사로서 우리의 공통된 의견은 이랬다. 백신 주사를 자궁경부암 예방하려고 맞지, 아기 낳으려고 맞는 건가?

해당 제약회사 홍보팀의 안타까운 감각과 재능을 탓하기에는, 이미 사회가 대놓고 여성의 몸에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논란이 됐던 행정자치부의 ‘대한민국 출산지도’만이 문제는 아니다. 보건복지부의 ‘사회가 책임지는 행복한 임신·출산’ 홍보 페이지를 보면 만 12세 여아 HPV 백신 무료접종 사업을 ‘임신 전 예방·준비’ 일환으로 홍보하고 있다. 물론 자궁경부암 예방은 중요하다. 자궁경부암은 2014년 기준으로 10만명당 9명의 유병률을 보이고 있다(갑상선·유방·대장·위·폐 다음으로 6위이다). 선진국에 비해 유병률이 높다. 특히 젊은 층의 유병률이 높다. 백신 접종과 정기검진의 중요성이야 말해 무엇하랴. 하지만 자궁경부암에 대한 대중의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아무 말’이나 해도 되는 건 아니다.

내가 임신할 수 있는 몸임을 자각하고, 누구와 언제 섹스를 하고, 언제 임신과 출산을 할지 고민하고 합의하고 결정하는 것과, 타인에 의해 임신할 수 있는 몸으로‘만’ 상정되는 것은 천지 차이다. 전자는 몸에 대한 자기결정권과 재생산권이라는 중요한 시민권을 찾는 과정이고, 후자는 보호와 통제되어야 할 존재로 대상화되는 과정이다.

ⓒ정켈 그림

이른바 ‘낙태죄’ 처벌 강화 국면이나 대한민국 출산지도 이슈에서 여성들이 꾸준히 ‘My body My choice(나의 몸 나의 선택)’라는 구호를 가지고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렇기에 이 구호는 여성의 재생산권뿐만 아니라 장애인 인권, 트랜스젠더 성별 정정, 정신질환자 인권침해 등 여러 인권 이슈에 적용시킬 수 있다.

임신할 몸만이 아닌 자기결정권을 가진 시민이기에

여성의 몸을 섹슈얼하게 또는 모성적으로만 보는 대상화는 공기 같아서 무의식중에 여성에게 내재화된다. 산부인과 문턱이 많이 낮아지는 만큼 포괄적이고 중립적인 이름인 ‘여성의학과’로 부르자는 노력도 이루어지고 있지만, 아직도 산부인과는 임신·출산 관련 병원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인 것도 이 때문이다. 이 고정관념은 청소년이나 미혼 여성이 여성과 진료를 받는 일을 방해한다. 2012년 한국여성민우회에서 산부인과 이용 경험이 있는 여성 1067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했는데 61.6%가 ‘처음 산부인과를 방문했을 때 망설였다’고 대답했다. 그들 중 67.9%가 진료 자체가 두려워서, 21.6%가 사회적 시선 때문이라고 답했다.

담배는 나중에 엄마가 될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각종 암과 호흡기 질환의 원인이기에 끊기를 권유한다. 생리통은 아기를 낳으면 없어진다고 설명할 게 아니라, 생리혈 배출을 위해 자궁이 수축할 때 생기는 통증이므로 진통소염제와 진경제로 완화할 수 있다고 설명해야 한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마지막 편지처럼, 우리는 질병이나 장애를 증명해서 동정받고 싶지도, 성실히 일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싶지도 않은,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내 몸을 온전히 긍정하고 통제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 욕구이자 권리이며, 이 욕구가 부정되는 경험은 결국 시민으로서 갖는 권리를 부정당하는 일이다. 자궁을 가지고 있어서, 누군가의 엄마가 될 거라서가 아니라, 우리는 인간이라서 존중받고 싶다. ‘임신·출산 정책’이 아니라 ‘여성건강 정책’이 필요하다.

기자명 윤정원 (녹색병원 산부인과 과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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