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페미니즘이 뭐야?” 오랜만에 방문한 서점에서 한 단발머리 아이가 해맑게 물었다. 아이 앞에는 요즘 ‘잘나가는’ 페미니즘 도서들이 나란히 진열되어 있었다. 그중 한 권을 읽던 나는 이어질 대화를 기대하며 귀를 활짝 열었다. 아빠는 침묵했다. 아이는 다시 물었다. “페미니즘이 뭐냐구우!” 기어이 대답을 듣겠다는 그 초롱초롱한 호기심에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아이와 나의 바람과는 달리 아빠는 끝내 대답을 하지 않고 아이의 손을 잡고 다른 코너로 이동했다. 아빠는 나중에라도 대답했을까? 내가 그런 질문을 받는다면 뭐라고 대답했을까?

후배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자기 남편이 친구들과 만났는데 어쩌다 ‘페미니즘’ 이야기가 나왔고 그의 친구들이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네 와이프 페미니스트라며? 얼마나 고생이 많으냐. 힘들겠다. 힘내라.” 그 ‘페미니스트’ 후배는 졸지에 남편 고생시키는 몹쓸 존재가 되었다. 후배의 남편은 “페미니즘이 얼마나 좋은데!”를 설파하는 사람이지만 그와 무관하게 동정받아 마땅한 불쌍한 존재가 되었다. 문득 오래전 텔레비전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던 반공 만화 〈똘이 장군〉이 생각났다. 그 만화에서 ‘북한 괴뢰군’은 인간이 아니라 늑대였다. 누군가에게는 페미니즘에 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인간의 얼굴이 아닌’ 존재로 받아들여질 것으로 생각하니 마음이 서늘해졌다. 이런 당혹과 오해는 어디서부터 비롯된 걸까?

ⓒ정켈 그림

얼마 전 ‘과격한 페미니즘’을 문제시하며 “그것은 진정한 페미니즘이 아니다”라고 하는 어떤 ‘형제님’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내가 그에게 한 이야기를 재구성하면 이렇다. “페미니즘을 이해하는 견해는 각자 다를 수 있습니다. 다만 진정한 페미니즘이냐, 아니냐를 판단하여 구분할 정도로 우리가 페미니즘에 관해 잘 알고 있고, 우리 사회가 그것을 숙고하고 있었을까요? 그 ‘진정한’은 도대체 누구의 기준일까요? 저는 페미니즘이라는 광대한 세계를 아직 잘 모릅니다. 그래서 배우려는 것이고요. 우리에게 필요한 건 진정한 페미니즘과 아닌 것을 성급하게 분리하는 자신의 기준이 아니라 학습과 대화 아닐까요?”

두려움과 적대감은 배우지 않으려는 토양에서 자란다

이렇게 이야기한 나도 나를 ‘페미니스트’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하지 못한다. 다만 ‘페미니스트가 되어가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나를 “이미 페미니스트”라고 분류할 것이다. 또 다른 누군가는 “아직 멀었군” 하며 피식 웃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다양한 페미니즘을 만나며 이 시기를 통과하고 있다. 그렇기에 “페미니즘이 뭐예요?” 라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던 그 아빠의 서성거림을 이해한다. 나도 굳이 이름 붙이자면 ‘서성거리는 페미니스트’니까. 우리 주변에 이런 사람들이 의외로 많을 것이라 짐작한다. 이른바 ‘페미니즘 리부트’라고 불릴 만큼 다양한 서사와 담론들이 활짝 만개했지만 마치 과식한 사람들처럼 서로 부대껴하고 있다. 우리는 이 주제에 관해 아직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영화 〈컨택트(원제 Arrival)〉는 지구에 도착한 미확인 외계 생명체와 소통하는 과정을 그린다. 언어학자인 루이스 뱅크스는 “나는 인간, 이름은 루이스”라는 말로 그들과 언어를 교환하고 소통한다. 경이로운 장면이다. 외계 생물체에 이름을 붙이고, 언어를 해석하는 과정은 그들이 지구를 위협하거나 멸망시키려 온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고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나는 이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두려움이나 적대감은 배우지 않으려는 토양에서 완강하게 뿌리를 내리고 자라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은 이미 도착한 언어다. 그래서 우리에게 “페미니즘이 뭐예요?”라는 질문과 학습, 대화가 필요하다. 함께 살아야 하니까. ‘페미니즘은 돈이 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관련 도서나 강좌가 흥하고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라고 선언한 대통령 후보까지 나섰으니 얼마나 좋은 배움의 기회인가.

기자명 오수경 (자유기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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