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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흙더미 속에 묻힌 암살자들

2017년 03월 09일(목) 제494호
김형민 (PD)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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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살 대상이 되는 사람은 대개 역사에 그 이름을 남긴다. 암살을 지시한 사람도 보통 잘 먹고 잘 살다 죽는다. 정작 암살을 실행에 옮긴 이들은 암살이라는 범죄의 무게를 일방적으로 감당하며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최후를 맞은 곳은 청와대 관저가 아니라 궁정동이라는 안가(安家), 즉 정부 기관이 비밀스럽게 관리하는 안전 가옥이었어. 한국 현대사 최대의 암살 사건이 벌어진 무대인 이 궁정동 안가에 또 하나 ‘걸출한’ 암살자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건 역사의 아이러니일 거야. 그 암살자의 이름은 염동진이야.

염동진.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과 비슷하지? 네가 재미있게 본 영화 <암살>에서 이정재 아저씨가 맡았던 역, 독립군 출신이지만 고문에 못 이겨 밀정이 된 사람 기억나지? 그래 염석진. 그 극중 이름은 바로 염동진에서 따온 거야. 실제 염동진도 독립운동가였고 일본 경찰에 잡혀 고문을 당한 뒤 밀정 노릇을 했다는 설이 있어. 그러나 그가 밀정이었다는 정확한 증거는 현재로서는 없다고 해.

해방 전 임시정부 내무부장이던 신익희는 백의사(白衣社)라는 특수 행동대를 조직해. 당시 중국의 지배자였던 장개석이 운용한 비밀 첩보 조직 남의사(藍衣社)를 본떠 만든 조직이지. 염동진(본명은 염응택)은 그곳의 총책이었어. 앞서 말한 궁정동 안가는 바로 이 백의사의 총본부였단다. 이곳에서 혈서를 쓰고 목숨을 걸고 백의사로서 임무를 완수하겠다는 선서를 한 암살자들은 남과 북 곳곳으로 스며들어갔어. 정치적 문제를 둘러싸고 김구와 대립하던 송진우와 장덕수가 그들의 손에 쓰러졌고 거물 정치인 여운형도 백의사에게 암살됐다는 설이 유력해. 그들의 활동 무대는 38선 너머 북한까지 뻗었어.

ⓒ연합뉴스
1968년 1월21일 청와대를 기습하려다 생포된 김신조씨(왼쪽 두 번째)가 사살된 공비들의 신원을 확인하고 있다.
국내파 공산주의 운동의 거물이었던 현준혁이 백의사 손에 쓰러졌고 ‘북한 왕조’의 창시자 김일성도 백의사 요원에게 수류탄 공격을 받았지만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했지. 북한 고위급 인사들이 잇단 습격을 받는 가운데 김일성의 외삼촌이자 기독교 목사로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을 만들어 김일성을 도왔던 강양욱 목사도 표적이 됐어.

1946년 3월 백의사 단원인 최기성·김정의·이희두 등이 강양욱 목사 자택에 들이닥쳤다. 강양욱 목사는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지만 큰아들과 며느리, 큰딸, 그리고 또 다른 아들 중매차 찾아온 손님들까지 총탄과 수류탄 세례를 받고 숨졌어. 중상을 입은 큰딸은 죽어가면서 “나는 아버지 때문에 죽는다”라고 유언을 남겼다는구나. 네 할아버지께 한번 강양욱의 이름을 물어보렴. 할아버지는 그 이름을 생생히 기억하실 거야. 기독교인으로서 공산당에 협력했던 강양욱은, 목사로서 신을 부정하는 공산주의에 반대했던 네 증조할아버지는 말할 것도 없고 북한에서 왕성한 세력을 지녔던 기독교인들에게 ‘공공의 적’이었으니까. 백의사 요원들을 감춰주고 지원했던 이들 역시 기독교인이었단다. 강양욱의 딸 역시 그 분위기를 짐작하고 있었겠지.

한국전쟁 이전 백의사가 북한 지도자들의 생명을 노린 것처럼 북한 역시 남한 수뇌부를 암살 형태로 제거하려는 시도를 계속했어. 1968년의 1·21 사태는 그 대표 사례였지. 북한 특공대 31명이 휴전선 경계를 뚫고 청와대 코앞, 그러니까 지난번에 네가 갔던 윤동주기념관 근처 창의문, 청와대 턱밑까지 침투했던 사건이었어. 그들은 남한 군복 차림으로 당시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방첩대’를 사칭하며 군경의 검문을 피했지만 막판에 종로경찰서장의 제지에 가로막혔지. 수류탄을 퍼붓고 기관단총을 난사하며 흩어진 북한 특공대는 남한 군경과의 전투 과정에서 거의 전멸했고 한 명은 생포됐다. 김신조라는 사람이야. 그는 침투 의도를 묻는 질문에 “박정희 목을 따러 왔수다”라고 투박하게 내뱉어 남한 사람들을 경악시켰지. 이 사건 때문에 언젠가 너와 함께 걸었던 서울 성곽길이나 인왕산길은 30년 동안 민간인 출입이 통제됐고, 주민등록증 제도가 생겨났으며 향토예비군이 창설됐단다.

ⓒ연합뉴스
버마(미얀마) 아웅산 테러 현장.
북한이 기도한 가장 가공할 암살 음모는 1983년의 아웅산 폭탄 테러일 거야.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동남아 5개국 순방을 떠났는데 그 첫 방문지였던 버마(현 미얀마)의 수도 랭군(양곤)에서 버마의 독립 영웅 아웅산 묘소에 참배하는 일정이 잡혀 있었어. 그런데 북한은 공작원들을 침투시켜 아웅산 묘소 지붕에 폭탄을 장치하고 전두환 대통령 일행의 도착에 맞춰 폭발 스위치를 누르게 한단다. 전두환 대통령은 위기를 모면했어. 북한 공작원들이 대통령과 외모가 비슷했던 버마 주재 한국 대사를 대통령으로 착각했기 때문이야. 버마와 한국이 발칵 뒤집힌 가운데 북한의 공작원 3명이 버마 당국에 포착됐어. 한 명은 사살됐고 한 명은 사형대에 오르지만 한 명은 범행의 전모를 자백하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 강민철이라는 사람이었어.

금강산 일만이천봉 아래가 고향인 아웅산 테러범

암살 대상이 되는 사람은 대개 역사에 그 이름을 남겼고, 암살을 지시한 사람도 보통 잘 먹고 잘 살다가 죽었지만 정작 암살을 실행에 옮긴 이들의 삶은 역사의 흙더미 속에 비참하게 묻혔다. 암살이라는 범죄의 무게를 일방적으로 감당하는 운명을 맞아야 했지.

ⓒ연합뉴스
2008년 버마 감옥에서 숨진 북한 테러범 강민철.
강양욱을 습격했던 백의사 요원들은 현장에서 사살되거나 체포돼 처형됐어. 그들은 대개 스물 안팎의 청춘이었단다. 청와대 습격 멤버 중 유일하게 살아남아 남한에 정착한 김신조는 자신의 사진이 실린 교과서로 자식들이 공부하는 것을 봐야 했고, 아내와 아들딸이 “공비(共匪)의 마누라와 자식”으로 손가락질받는 비참함을 겪었단다. 30년도 더 지나 영화 <실미도>가 개봉됐을 때 다시금 그 이름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서 결혼을 앞두고 있던 아들이 파혼당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어.

아웅산 테러범 강민철은 버마 감옥에서 25년을 지낸 뒤 쉰셋의 나이로 2008년 세상을 떴어. 그와 감옥에 함께 있었던 버마 정치범 윈틴은 그에 대해 이렇게 증언하더구나. “자신의 조국으로부터 외면당해 이국땅에 팽개쳐져 고향과 가족에게 돌아가지 못하는 신세를 한탄하곤 했습니다. (…) 최종 정착지나 행선지가 어디가 될지도 고민했지만, 무엇보다도 감옥을 일단 벗어나고 싶다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그냥 출소만 한다면 자신은 행복할 것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강민철의 고향은 금강산 일만이천봉을 품고 있는 강원도 통천이었어.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누이동생 하나 있는 단출한 가정에서 자란 강원도 청년은 스물다섯 나이에 만리타향의 국립묘지 지붕에 폭탄을 장착해 터뜨렸고 여생을 죄수로 지내다 고달픈 삶을 마감하고 말았어. 강민철, 김신조, 백의사 청년들, 그들의 인생은 대체 누구에게 그 책임을 물어야 하고 그들은 누구에게 자신의 삶에 대한 보상을 요구할 수 있을까.  

말레이시아에서 북한의 ‘백두 혈통’ 김정남이 독살됐다. 행동대원으로 좀 엉성해 뵈는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여성을 동원한 기이한 암살극이었으나 공작은 성공했다. 북한 용의자들은 해외로 도피했지만 북한 국적의 한 젊은이는 말레이시아 당국에 체포됐더구나. 아무 원한도 없고 마주칠 일도 없었던 김정남을 죽이라고 명령한 사람은 그에게 한 점 미안한 마음이나 지니고 있을까? 이 암살로 그의 여생에 드리워질 암운(暗雲)에 한 조각 책임감인들 지닐까. 세계 역사에 흔하고 우리 역사에도 널려 있는 수많은 정치적 암살과 암살 미수 사건들을 기억으로 훑으면서 떠올리는 답 없는 질문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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