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백수가 된 남편이 퇴직금으로 치킨집이라도 차리겠다고 할까 봐 아내는 전전긍긍했다. 당분간 책을 좀 읽겠다고 하니 ‘그러면 사고는 안 치겠구나’ 싶었던 걸까. 아내는 재취업을 종용하는 대신 시간을 허락했다. 7년 뒤, 남편은 ‘홍차 선생’으로 인생 2모작을 성공적으로 일궜다.

2010년 문기영씨(54)는 16년간 몸담았던 식품 회사를 그만둬야 했다. 마케팅 담당으로 커피믹스의 성장 과정을 누구보다 자세히 지켜봤던 그였다. 지금이야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지만, 퇴사 후 갑자기 남아도는 시간 앞에 적잖이 당황했다. 집중할 게 필요했다. 퇴직 1년 전 홍차를 담당하면서 가졌던 관심을 계속 이어가면 어떨까 싶었다.

국내서 중에는 문씨의 지적 욕구를 만족시켜줄 만한 홍차 관련 서적이 없었다. 외국 서적까지 닥치는 대로 찾아 읽기 시작했다. 마치 고시 공부하는 것처럼 무섭게 집중하는 그에게 어느 날 친구가 무심코 “책이라도 한 권 쓰든지”라고 말했다. 너무 깊이 발을 담갔다는 핀잔이 담긴 말이었다. “지금 피겨 배워서 김연아 되라는 거냐?”라고 웃어넘겼다.

ⓒ시사IN 신선영〈홍차 수업〉과 〈철학이 있는 홍차 구매가이드〉를 펴낸 문기영씨.
그런데 공부가 깊어질수록 나눠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제대로’ 된 홍차 책 한 권에 대한 목마름이 컸다. 홍차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홍차가 ‘무엇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도 드물었다. ‘떫다’ ‘맛없다’라는 편견에 갇혀 있기에는 그 역사성이나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었다. 세계인이 물 다음으로 많이 마시는 음료 역시 차다. 2012년 스타벅스가 6억 달러를 들여 차 전문업체 티바나홀딩스를 인수한 건 상징적이다. 사람들이 커피를 라테로 시작해 원두로 관심을 확장하듯, 홍차도 흔한 티백에서 출발해 잎차로 관심을 옮겨올 수도 있지 않을까. 문씨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공부한 결과를 바탕으로 누가 시킨 것도 아닌 책을 쓰기 시작했다. 2013년 여름이었다. 완성된 원고를 들고 출판사 일고여덟 군데를 직접 찾아갔다. 짠 것처럼 돌아온 답은 똑같았다. ‘내용은 좋으나 본 출판사의 기획 방향과 맞지 않습니다.’ 반쯤 포기하는 심정으로 글항아리출판사에 원고를 보낸 뒤 영국으로 차 기행을 떠났다. 돌아와 메일을 확인하니 출판사 대표의 답장이 와 있었다. 기대 없이 열었는데 계약하자는 내용이었다. 강성민 글항아리 대표는 첫 만남에 계약서를 들고 왔다. 문씨의 원고는 〈홍차 수업〉(2014)이라는 제목으로 글항아리 ‘실용의 재발견’ 시리즈 첫 번째 책이 되었다. 그리고 2016년에는 차의 종주국이자 본고장인 중국에 수출됐다. “한국 사람이 와인 관련 책을 쓴 게 프랑스에 수출된 거랑 똑같은 거죠(웃음).”

〈홍차 수업〉은 지금까지 6쇄를 찍으며 7000부 가까이 팔렸다. 첫 책을 내고 석 달 뒤 서울 홍대 근처에 ‘문기영홍차아카데미’라는 이름으로 작은 사무실도 열었다. 열 명 남짓 앉으면 꽉 차는 공간의 한쪽 벽은 각종 차가 담긴 틴 케이스(캔 용기)가 진열돼 있는데, 마치 ‘차 도서관’을 방불케 한다. 수강생은 주로 〈홍차 수업〉을 읽고 온 독자들이다.

물 400㎖, 차 2~3g, 우려내는 시간 3분

문씨는 최근 두 번째 책 〈철학이 있는 홍차 구매 가이드〉를 펴냈다. 3년 만이다. 전작이 홍차라는 큰 숲을 조망하는 내용이었다면 이번 책은 홍차 하나하나에 집중했다. 단순 소개에 그치지 않고 가격과 구입 방법, 우려내는 방법까지 담았다. 주로 수업에 사용하는 차로 각 영역의 대표적인 맛과 향을 가진 표준적인 홍차들이다. 홍차를 처음 접하는 사람이 겪는 시행착오를 줄이는 데 도움을 주고 싶었다. 그사이 번역서도 하나 냈다. 미국 차 산업 분야에서 트레이닝 매뉴얼로 활용되는 30년 된 ‘고전’ 〈홍차 애호가의 보물상자〉(글항아리, 2016)를 국내에 소개했다.

최근 온라인상에서 벌어진 이른바 ‘홍차 예송 논쟁’을 문씨도 관심 있게 봤다. 홍차 입문을 얼그레이로 시작하느냐, 마느냐에 대한 입씨름이었다. 문씨 역시 굳이 따지자면 얼그레이를 그다지 선호하는 편은 아니다. 맛은 전적으로 취향의 문제이기 때문에 가타부타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논쟁을 지켜보며 생각보다 홍차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어서 즐거웠다.

“공부를 할수록 홍차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아집니다. 제가 3~4년 미친 듯이 공부하긴 했지만, 거꾸로 말하면 그 정도로도 전문가가 될 수 있을 만큼 홍차 시장이 작습니다.” 국내 차 시장은 1000억원대 수준이지만(커피는 5조원대) 그만큼 성장 가능성도 무궁무진하다. 고급 차나 잎차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것도 세계적 트렌드다. 영국에서는 여전히 95%에 이르는 사람들이 티백 형태로 차를 즐기지만, 유명 호텔에서 여는 ‘애프터눈 티파티’는 석 달 전에 예약해야 할 만큼 인기가 뜨겁다.

물론 홍차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싼 가격이다. 관세 문제 때문에 국내에 수입될 때는 다소 비싸지만, 250g짜리 틴 케이스에 든 잎차 한 통을 사면 100잔은 너끈히 우릴 수 있다. 최종적으로 흡수되는 카페인 양은 커피보다 훨씬 적으면서도 각성효과나 긴장을 완화시키는 효과는 더 크다. 차에만 들어 있는 ‘테아닌’ 성분 덕이다.

문씨는 초심자에게 홍차에 각종 향을 입힌 가향차나 좋은 품질의 블랜딩 홍차를 추천한다. 단일 다원에서 생산된 차는 개성이 있지만, 그 개성만큼이나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선입견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차 회사들도 가향차에 더 많은 투자를 한다. 예쁜 색과 모양의 틴 케이스는 차를 즐기는 즐거움을 배가시킨다.

홍차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세 가지를 기억하면 된다. ‘물 400㎖, 차 2~3g, 우려내는 시간 3분’은 일종의 공식이다. 여기에 찻잔이나 주전자 등 다구를 미리 뜨거운 물로 데워두면 금상첨화다. 이렇게 차를 우리면 절대 떫지 않다. 무엇보다 PH7(중성)에 가까운 한국의 물은 홍차를 우리는 데 최고다. “차를 우린다는 건 뜨거운 물에서 찻잎으로부터 수용성 고형물질을 추출하는 거거든요. 물의 PH가 너무 낮거나 높으면 차가 잘 안 우러나요. 그런 점에서 한국은 복받은 거죠(웃음).”

뜨거운 홍차 한 잔에는 차를 키워낸 토양과 공기, 그리고 차를 가공한 기술이 같이 우러나온다. 인도와 스리랑카의 다원을 여러 차례 돌아봤던 문씨는 홍차를 귀하게 여긴다. “농사짓는 분들이 쌀 귀하게 여기잖아요. 그거랑 똑같아요. 차가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는지 아니까요.” 유명 차 생산지와 다원을 둘러싼 식민의 역사를 짧게나마 굳이 책에 언급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차는 여권 신장에도 일부 기여했다. 18세기 영국에서 처음으로 여성의 출입을 허용했던 차 판매점 ‘골든 라이언’의 존재는 여권 신장의 상징이었다. 이처럼 문씨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홍차에 대해 못다 한 이야기가 많이 남았다. 언젠가는 홍차의 역사만큼이나 다양한 홍차를 둘러싼 이야기들을 해보고 싶다.

기자명 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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